눈을 뜬 에릭은 주위를 둘러봤음. 내가 왜 침대에 누워있지? 이틀을 내리 잤지만 단편적인 것 외에는 기억이 안나. 누군가의 비명과 팔이 아팠던 기억, 그리고 까만 머리의 꼬마 아이. 몇 년간 이곳에 있으면서 애를 본 기억은 없었어. 거의 헬파이어클럽 일원이나 아주 가끔 저택을 관리해주는 인간들을 볼 뿐이었음. 그나마 남이 자기 방도 손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식사도 혼자 챙겨먹는 바람에 관리인들은 볼 기회도 없음. 그럼 그 아이는 누구였을까. 삼단 같은 흑발과 빨간 볼이 인상적인 귀여운 아이였음. 오래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서 몇 번 두들기며 식당으로 향했음. 그런 그 앞에 펑 하고 아자젤이 나타났어. 옆에는 그 아이가 같이 있었음. 아자젤은 엠마로부터 어떻게 이름도 안지어줄수가 있냐는 둥 내가 지금 당장 쇼우를-이제는 님자도 안붙임-압박해서라도 이 아이 교육은 제대로 시킬 테니까 각오하라는 협박을 듣느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써니는 배고프다며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밥 먹자고 보채고 있어. “알았어 이 자식아!” 절규에 찬 외침과 함께 저택의 식당으로 왔는데 눈앞에 물 컵을 들고 에릭이 떡 하니 서 있어. 아자젤은 한동안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느라 에릭과 써니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음. 머릿속엔 경종이 울림. 아 시바 좆됐다^^ 난 여길 나가야겠어요. 어? 안되잖아?^^ 허허허 이거 참 허허. 쇼우를 제외한 헬파이어클럽 내에서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어. 써니와 에릭을 어떻게 해서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임. 에릭이 써니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도 다행이긴 했지만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얻은 교훈으론 결코 마주쳐서 좋을 게 없음 이었어. 그런데. 그랬는데. 아 망했어요. 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구나. 에릭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아자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 써니에게로 시선을 옮겼어.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에릭은 버릇처럼 방긋 웃었음. 아 이 아이가 그 아이구나. “안녕하세요!” 써니가 툭 튀어나가며 인사를 하자 아자젤은 빨간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였음. “안녕하세요. 음 저기.. 팔은 괜찮으세요?” 에릭은 써니가 가리킨 왼쪽 팔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음. “응 이제 괜찮아. 그런데 넌” “으아아! 매그니토!” 너무나도 급작스레 끼어든 아자젤을 바라보며 인상을 팍 구겼지만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온갖 손발짓을 다 동원해 허둥대면서 둘의 정신을 쏙 빼놓으려 했어. “아 저 으응 그래 넌 배고프다 했지! 어서 밥먹자! 시간맞춰 먹어야지 안그러면 너 키 안큰다! 그리고 매그니토! 물 다 마셨으면 얼른 나가줘! 얘가 좀 밥을 지저분하게 먹어서 말야! 하하!” “나 지저분하게 안 먹어요!” 아 쓰읍 참말로 아자젤 인생 안 풀리네요. 이래서 어린애는 안 된다니까 등등 속으로 욕을 해댔지만 최대한 웃는 낯을 한 채로 둘을 떼어놔야 했어.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아자젤이란 생물은 목숨을 잃을 것 같았거든. 너무 당황해서 자신에게 텔레포트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둘을 떼어놨어.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느라 옷이 온통 다 젖기까지 했음. 에릭은 뭐하는 짓이냐며 항의를 했지만 그가 간절한 얼굴로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물컵을 그대로 든 채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음. 그리고 써니는 간만에 외식을 했어. 외식이란 말에 이리저리 날뛰며 좋아했지. 밖에 나갈 일이 많지 않으니까 기분이 날아갈것 같았음. 그리고 아자젤의 부탁으로 내친김에 외박까지 하게 되었어. 아자젤은 그날 저녁 립타이드와 엔젤을 묵고 있는 호텔로 불러내 대책회의에 열을 올렸음. 열과 성의를 다하며 회의를 했지만 보람도 없이 다음날 문제가 터지고 말아.

에릭에게 들킨 이상 저택 내는 절대 안전하지 않아. 아예 써니를 따로 내어 살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렇게 된 이상 엠마의 협박뿐이 아니더라도 자비에 스쿨에 맡기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 쇼우가 허락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일을 먼저 실행시키려고 해. 파이팅! 퐈이야! 기합을 넣고 다 같이 저택으로 돌아온 것까진 좋은데 한 가지 실수를 한건 써니도 같이 데려왔다는 점임. 혹시나 바깥에 나간 게 신나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잃어버릴까 옆구리에 꼭꼭 챙겨왔어. 립타이드가 써니를 아이의 방 의자에 앉혀놓고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야 돼! 돌아다니면 혼나! 라고 했지만 고개만 끄덕이곤 5분도 못 앉아 있는 게 애들이란 종족이지. 세 사람은 애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어. 그들이 써니의 짐을 꾸리고 쇼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가느라 써니에 대한 경계가 소홀할 무렵에 아이가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쪼르륵 2층 에릭의 방문 앞에 서서 넓고 높은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노크를 해. 안에서 기척은 들리지 않아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는데 창가 쪽 소파에 사람이 누워있어. 에릭이 가슴 위에 책을 얹은 채 오수를 즐기고 있었음. 써니는 큰 눈을 꿈뻑이며 가만가만 다가갔어. 에릭이 잠들어 있는 풍경은 빛 노출을 많이 받은 사진작품 같았음. 브루넷의 헤어는 색이 거의 날아가 블론드로 보일 정도였고 얼굴은 정말 새하얗게 빛났어. 낯선 인기척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이 뜨이더니 회색도 파란색도 아닌 오묘한 눈동자가 새카만 동공을 조이며 써니를 바라봤어. “안녕?” 약간 잠긴 목소리는 웃음기를 띄고 있었음. 써니는 저도 모르게 같이 웃었어. “우리 저번에도 봤지?” “응.” 써니는 나중에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에릭의 가슴에 달려가 파묻힐 정도로 깊이 안겼어. 에릭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제야 자기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지만 떨어지지 않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음. 이상하게 그리웠어. 이 남자의 품에 한 번도 안겨본 적이 없었지만 너무너무 안기고 싶었어. 에릭은 아이가 떨어질 것 같지 않자 곤란한 미소를 짓고는 등을 도닥도닥 쓰다듬어줬어. 에릭의 생각은 이래. 어린애가 부모도 없이 이곳에 뚝 떨어진 것 같은데 혼자서 얼마나 외로울까. 게다가 첫 아이와 연배가 좀 비슷해 보여서 마음이 쓰여. 그 아이가 잘 태어나서 컸으면 이 아이보다 한두살정도 더 많을 텐데. 끌어안아 무릎에 앉혀주며 하나하나 물었어. “이름이 뭐야?” “이름 없어요. 근데 다들 절 써니라고 불러요.” “이름이 없다니.. 부모님은 없는 거야?” 차라리 안 물어 봤으면 좋았을걸. 누구나 안 물어 볼 리가 없는 여상스런 질문이었음. “아뇨. 여기 아버님이 계세요. 근데 전 무서워서 많이 못 뵈었어요.” “아버님?” “네. 세바스찬 쇼우.”

도닥이던 손이 멈췄어. 써니는 거기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바닥에 내쳐졌음. 바닥에 부딪친 몸이 아픈 걸 신경 쓰기보다 방금의 행동에 너무나 놀라 쓰러진 몸을 발딱 일으켜 에릭을 바라봤는데, 아버님보다 무서워 보여. 금방이라도 그의 눈이 불에 탈것만 같아. 조금 전까지 웃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어. 써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저씨 왜 그래요? 하며 다가갔어.

엔젤은 윗 층에서 큰 폭발음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아 서둘러 올라가봤더니 써니가 에릭의 방 문과 함께 복도에서 나뒹군 채로 맞고 있었어. 아이는 무자비한 폭력에 옴짝 달싹 못하고 있었는데 엔젤이 아이를 빼앗아 안고 복도 창문에서 아래로 뛰어내렸어. “거기서!!” 에릭도 덩달아 뛰어내리려던 찰나 아자젤이 뒤따라와 간신히 막아섰음. 뒤에서 외치는 소리는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어. 엔젤마저도 두려움을 느끼고 정원 구석에 숨어서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써니와 함께 떨고 있었음. 

아자젤도 자신도 잔뜩 상처를 입고 난 후에야 조금 진정한 에릭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음.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쥐어뜯었어. 머리카락이 한 웅큼씩 뽑히자 아자젤은 바로 그의 양 손을 구속시켰음. 머리카락을 못 뜯자 입술을 씹으며 씨큰하게 눈물을 뚝뚝 떨구는 에릭을 보고 아자젤은 마음 깊이 숨을 내뱉었어. 바닥을 뒹굴던 써니의 머리채를 잡고 소리를 지르며 뺨을 때리던 에릭은 정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음. “왜 그랬어?” “닥쳐.” “그래도 네 아이다. 네가 낳은 녀석이야.” “닥쳐 씨발! 닥쳐! 죽어야 돼 저런 거.. 죽여 버리겠어.” “..에릭. 저 아이 쇼우님께도 버림받았다. 너라도 받아줘야지. 불쌍한 애란 말이다. 넌 모르지? 저 녀석 이름도 없어!” 에릭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게 아자젤을 바라봤음. “내가 왜 쇼우의 새끼를 받아줘야 돼? 내가 낳았다고? 웃기지마 난 저런 거 낳은 기억 없어! 저게 뭔데 내 자식이야? 내 자식들은 다 죽었어.. 제대로 낳아주지도 못해서 한번 품어보지도 못하고 다 떠나보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하나는 저거 때문에 죽은 거 기억 안나? 네가 그걸 다 봤잖아!” 숨도 안 쉬고 내뱉는 말들에 아자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맞는 말이야. 다 봤거든. 아들이었던 첫째와 딸이었던 둘째까지. 둘 다 아자젤이 묻어주기도 했음. 너무 작아서 한 손으로 덜렁 들렸어. 에릭에게 말은 못해줬지만 아이들은 저택 뒤뜰에 묻혀있어. 파들거리며 울고 웃는 에릭을 가만히 당겨 안아줬음. 써니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자신들의 실책이 너무 커. 더더욱 빨리 써니를 자비에스쿨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음.

엔젤의 방으로 온 써니는 그녀의 품에서 울고 있었어. 맞은 몸이 너무 아프다고 우는데 엔젤마저 가슴이 아팠어. 심지어 써니는 에릭이 자기와 무슨 관계인지도 몰라. 호감을 가졌던 사람에게 이렇게 맞아 본 것도 처음이라 마음의 상처도 매우 큼. 엔젤은 괜찮아, 이제 다시 저 사람 볼 일 없다며 다독여줄 뿐이었음. 나쁜 사람. 얘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매그니토는 미쳤어. 


립타이드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쇼우를 찾으러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관리인에게서 저택에 사단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 드디어 올게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괴롭혔음. 얼굴이 빨갛게 부어서는 훌쩍이고 있는 써니를 보니까 저도 모르게 화가 나려고 해. 평소에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별 관심도 갖지 않았어. 잘 웃을 줄도 모르고 울 줄도 모르는 애가 맞아서 울고 있는 걸 보니까 부아가 치밀어 올라. 내 저걸 그냥.. 하며 뛰쳐나가는데 엔젤이 붙잡아. “그냥 놔둬. 우리는 지금 그 사람을 이해해 줘야만 해.” 립타이드는 한숨을 푸욱 쉬며 주먹을 쥐었던 손을 풀어버림.

소식을 전해들은 쇼우는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었어. 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 라며 넘기려는 식이었음. “그런데 내 아들을 맡기려는 곳이 자비에 스쿨이라니? 그런 오합지졸들과 어울리게 놔둬야 하는 건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곳이라면 뮤턴트인 그 아이를 잘 가르칠 것입니다.” “오, 뮤턴트이기도 했군. 난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연구를 했지만 너무나 쓰레기 같은 연구결과에 침통했어. 그래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 무슨 능력이지?” 자기 아들 능력도 모르고 있었다니 모시고 있는 분이긴 했지만 이쯤되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음. “시간을 다룰 수 있습니다. 모르셨다니 놀랍군요.” 꽃을 한 송이 쥐어주면 그 꽃의 태곳적인 씨앗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던가, 에릭의 팔에 구멍이 났을 때처럼 다치기 이전으로 되돌린다던가-이 부분은 쉽게 말하면 블리치의 오리히메같은-하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 이외의 구체적은 능력을 계발하지 못했어. 능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쇼우는 그냥 초침 분침정도 다룰 줄 아나보지 하고 약간의 흥미를 보이며 자비에 스쿨의 입학을 허가해줬음. 그런데 서류에 써니의 인적사항을 적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아직 해결이 안됐어. 이름이 없잖아. 쇼우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미국 전역에서 흔하디 흔한 마이클이란 이름을 줬어. 마이클 쇼우. 그게 이제부터 써니의 이름이야. 

태어난지 3년만에 마이클이란 이름을 얻게 된 아이를 세바스찬 쇼우의 호적에 올리기 위해 그 많고 많은 기관 중 제일 바쁘고 정신없는 CIA를 이용했어. CIA는 졸지에 쇼우의 비서나 수행할 일을 맡은 것에 대해 격분했어. 더 이상 못참겠다 헬파이어클럽을 때려부수자 란 여론도 있었지만 모두 묵살됐음. 공격해서 얻을게 뭐야. 죽음뿐일걸. 덕분에 마이클은 나쁜쪽으로 CIA내부 최고 유명인사가 되었음. 무사히 호적이 등록되고 입학서류를 스쿨에 제출했어. 엠마는 서류를 갖고 온 헬파이어 한무더기를 보고 인상을 썼음. “다들 표정이 왜 이래? 애 얼굴은 또 왜 이 모양이고?” “자초지종 설명할 시간 없다. 우린 돌아가야 해.” “..뭐, 그래 알아서들 해. 서류는 제대로 갖고 왔네. 얘 이름은 이제 마이클?” 마이클-써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이상한 분위기에 엠마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던 행크와 션이 마이클의 짐 가방을 챙겨들었고 레이븐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의 마이클을 감싸 안았음. “괜찮아. 우린 널 기다리고 있었어. 자비에 스쿨에 온 것을 환영해, 마이클.”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이클은 냅다 울음을 터뜨렸음.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들이라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가슴이 벅차올랐어.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어. 아빠는 자신을 돌아봐주지도 않고 엄마는 누군지도 몰라. 헬파이어클럽이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타인의 관심일 뿐이지 부모의 사랑은 아니야. 마이클은 평생 자기가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살 것 만 같았어. 그런 아이에게 기다리고 있었어, 환영해란 말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음. 레이븐은 당황하며 마이클을 안아들어 밖으로 달래러 나갔음. 엠마는 레이븐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환하게 웃으며 헬파이어들에게 고개를 돌렸음. “마이클의 얼굴이 부은 이유와 너희들이 축 쳐진 이유를 말해줘야겠지? 조금 전의 시간이 없다는 변명 하지 마. 저건 어딜 봐도 맞은 흔적이야. 여긴 학교고, 내가 맡을 아이가 왜 저렇게 됐는지는 들어야겠어.”

엠마는 찰스처럼 인내심이 많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는 타입도 아냐. 하지만 이 일은 그들의 입으로 직접 들어야 할 것 같았음. 다리를 꼬고 우아한 모습으로 얘기를 다 들은 엠마는 눈썹을 씰룩였어. 너무나도 찝찝하고 기분 나쁜 얘기들이야. 모든 사건의 원인을 얘기하자면 매그니토와 쇼우는 마이클을 자식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지. 두통이 일었어. 이 이상의 이야기를 들었다간 다시 한 번 꿈속에서 에릭의 기분 나쁜 과거들을 보게 될 것만 같아. 이야기는 끝났지만 네 사람은 섣불리 자리를 뜨지 못했음. 여튼 서류상으로 문제도 없고 마이클은 무사히 입학이 허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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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젤은 의사의 소견을 들으며 마른세수를 연거푸 반복했어.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아도 모체도 항생제에 대한 반응이 있었는데 태아에겐 그게 치명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함. 아무래도 아기 그 자신도 뮤턴트이다보니 항생제에 대한 반응이 남달랐던 거야. 일반적인 수면제 역할을 했을 거라고 해. 그게 좀 더 과해졌으면 진짜 항생제로 죽었을지도 몰랐겠지만 에릭은 그것도 모르고 움직이지도 않는 배를 보며 죽었다고만 생각했어. 실상 아기를 죽인 건 허리 총상에 의한 충격이었음. 배와 가까웠던 탓도 있고 항생제로 태아가 약해졌던 탓도 있음. 에릭은 보름간 의식이 없었어. 그 시간동안 아자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조금이라도 덜 충격 받을까 고민했는데, 눈을 뜬 에릭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눈만 깜빡일 뿐이었음. 너무 울어서 온 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것처럼 영혼조차 퍼석해보였고 눈에는 물기마저 없었어. 아자젤은 그 텅 빈 눈을 보다 못해 이마를 짚으며 병실을 나옴.

그는 마지막 뒷정리를 하러 잠시 러시아에 들렀다 에릭이 머물렀던 모스크바의 집까지 가게 됨. 이미 집안은 몇 차례 뒤집힌 듯 물건들이 여기저기 깨지고 흩어져 있었어. 여기저기 군홧발이 난무했고 먼지가 자욱하게 앉아있어. 쓸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리려는데 침대 가에 떨어진 작은 수첩을 하나 발견함. 수첩을 뒤져보니 에릭의 필체였고 독일어로 써있어. 아마 동네 갱들이 물건을 뒤지다가 수첩을 발견했지만 읽지 못해 버리고 간 것 같음. 먼지를 털어 코트 저 안쪽 주머니에 넣어놓고 집을 나온 후 은행으로 가 에릭의 구좌를 정지시켰어. 그날 저녁, 수소문으로 독일어를 배운 여자를 하나 잡아다 앉혀놓고 에릭의 수첩을 던져주고 해석을 시켰어. 잔뜩 떨던 여자는 더듬거리며 수첩의 글을 해석했고 다리를 꼰 채 잠잠히 듣고 있던 아자젤은 자신의 온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기 전에 여자를 쫒아냈음. 안녕 아가. 오늘은 날이 추워. 모처럼 하늘이 맑아 파파는 파란 하늘을 보며 네 파파를 생각했단다. 이런, 찰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써 있는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음. 날씨이야기, 먹은 음식 이야기, 찰스와 아기이야기. 그중에는 아기의 이름을 지은 흔적도 있었고 보고 싶은 찰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어. 여자의 목소리로 전해 들은 에릭의 한 달은 너무나 행복해보였어. 비록 실제로 읽는 사람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지만 들리는 어투는 매우 다정했음. 행복한 모습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수첩에 글을 적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어. 아자젤은 여태껏 자신 같은 냉혈한은 없다고 생각했음. 첫아이를 잃고 넋을 놓은 모습을 보고는 소중한 것 하나 지키지 못한 약해빠진 녀석이라고 비난했고, 눈보라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모습은 조금 짠하다고 생각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음. 타인에게 관심 갖는 법도 몰라서 이제껏 에릭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 생각도 없었는데, 수첩에는 에릭 렌셔라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왔던 인생 중에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지 너무나 절절하게 써대서, 자기가 왜 울고 있는지도 모른 채 후회했어. 왜 후회하고 또 무엇에 대해 후회하는지 모르지만 왠지 그에게 평생을 걸쳐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어.


에릭이 정신을 차리고 이틀이 지났을 때 쇼우가 찾아왔어. “수고했다. 역시 넌 내 최고의 말이야.” 뻣뻣해진 브루넷의 머리를 다정스런 손길로 쓰다듬었어. 옆에 서 있던 아자젤은 에릭이 언제 폭발할지 몰라 불안에 차 있었는데 의외로 얌전히 누워서 그 손길을 받고 있었어. 그냥 너무 지쳐서 이젠 화낼 의지도 없겠구나 싶었는데 병실에 있는 철제도구들이 달그락거려. 너무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아. 앞에서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저 남자를 죽이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 머릿속이 분노로 곤죽이 되어 죽을 것 같아. 두 눈이 시뻘개졌어.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마치 피눈물로 보이는 것 같아. 손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어서 눈앞의 원수를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도 비참해. 한참동안 쇼우를 쏘아보던 눈이 천천히 체념한 듯 감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후엔 기계적으로 움직였어.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가끔은 쇼우에게 안기고. 일부러 의식을 하지 않으려는 듯 배는 절대 쳐다보지 않았음. 쇼우는 기쁜 표정으로 다시 근육으로 단단해진 에릭의 아랫배를 종종 버릇처럼 쓰다듬어. 그럴 때 마다 에릭은 넘치는 살의를 참기 위해서, 주먹을 꽉 틀어쥔 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곤 했음. 목을 매려 한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쇼우가 행하는 무자비할 정도로-실상은 평소보다 배는 달콤한 행위였지만 에릭에겐 매우-비참한 강간뿐이어서 목숨을 끊지도 못했음. 또 실패하면 다시 당할게 뻔 하니 그냥 살자 하고 체념해버렸음. 자살이 실패한 후 1년여동안 에릭은 웃음이 늘었어. 늘 안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고 실없는 농담에도 큰소리로 웃어댔어. 립타이드에게 장난을 걸고 엔젤의 치마를 보고 dead sexy하다고 칭찬도 해주며 넉살도 부렸음. 헬파이어 클럽은 그의 기괴한 행동이 괴로웠지만 참아야지 어째. 딱 보기에도 에릭은 저런 행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보였으니까. 

아자젤은 창가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에릭을 보며 주머니에 있는 수첩을 만지작거렸음. 돌려주려 했지만 선뜻 줄 수가 없어서 항상 실패했지. 오늘은 전해주고 말리라 다짐을 했어. “저기.. 매그니토.” “응? 아아.” 아자젤이 뭐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에릭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매달렸어. 그냥 수첩을 전해주려 했던 것뿐인데 매달려서는 온몸을 부벼대는 통에 하려던 말도 못하고 입만 뻥끗거렸지. 에릭은 그가 쩔쩔매는걸 보고 실실 웃었어.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입이 열리지가 않아 결국 그날도 수첩은 돌려주지 못했어. 

그들은 에릭이 웃는걸 보고 그래도 극복할 방법을 찾았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우였지.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립타이드는 엔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들어. 엔젤은 임무를 전해주러 에릭의 방에 갔다가 바닥에 퍼져있는 피 웅덩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어. 그동안도 딱히 제정신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지만 멍한 얼굴로 팔뚝에 칼날을 꽂아 넣고 있는걸 보고 있자니 이젠 진지하게 치료가 필요해 보였어. 하지만 에릭에 한해서는 쇼우의 명 없이는 병원도 갈 수가 없었지. 관통당한 팔을 흔들고 있던 에릭을 침대에 눕히고 급하게 붕대로 지혈을 했어.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라. “내가 왜 누워야 해?” 말똥말똥 쳐다보며 하는 말에 아자젤은 에릭을 그냥 기절시켰음. 그 편이 속 시원하니까. 립타이드가 놀란 엔젤을 진정시키려 데리고 나가고 뒷처리는 아자젤이 했음.(뒷처리담당일세) 어느새 잠으로 이어진 건지 새근새근 잘만 자는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어. 항상 웃고 있는 평소와는 달리 잠든 얼굴은 평온하지 못했어. 그 불쌍한 표정에 한숨을 한번 쉰 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조그만 사내아이가 방 문에 붙어서 안쪽을 쳐다보고 있었어. “여긴 오지 말라고 했지 않나.” 한두번 들어본 게 아닌듯이 냉랭한 그의 목소리에도 눈길한번 주지 않고 침대위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어. “...빨리 처리하고 나와.” 아자젤은 꼬마에게 주의를 한번 주고 등을 돌려 걸어갔음. 새까만 머리에 어울리는 까만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며 눈치를 보다 쪼르르 방 안으로 들어갔어. 침대 위로 낑낑대며 올라가 잠든 에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눈가를 발견하곤 손으로 닦아줘. 자면서 우는 에릭이 불쌍해 눈썹을 팔자로 휘며 쳐다보는 얼굴이 누군가와 많이 닮았어.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붕대가 감긴 팔을 작은 손으로 잡고 힘을 한번 빡 준 후에 후다닥 달려나갔음. 아자젤은 달려나가는 꼬마의 뒷통수를 보다 방 안으로 들어가 벌써 피로 물들어 질척이는 붕대를 가만히 풀었어. 뼈가 보일정도로 심하게 패여있던 왼팔은 원 상태로 돌아가 있었음. 아자젤은 놀란 모습도 보이지 않고 붕대를 버린 후에 팔에 남은 핏자국을 닦아주고 침대를 정돈해주고 유유히 나갔음. 아자젤이 나가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에릭이 눈을 떴어. 부서질듯한 통증이 느껴지던 왼 팔이 흉터하나 남지 않고 깨끗해. 그리고 이 저택안에 우리 이외에 어린애가 있던가 하는 짧은 생각을 끝으로 다시 잠이 들었어.


이즈음에서 헬파이어클럽은 미국에서는 절대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이자 미 정부의 최대 협력조직이 되었음. 이전에는 그저 이상한 능력을 가진 테러집단일 뿐이었지만 대표적으로 에릭의 위력을 본 이후로 우리 쟤네 함부로 건드리지 말자.. 라고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봐. 에릭을 맘대로 부리는 쇼우라는 인물은 그럼 대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가늠도 안 되고 위력을 보고 싶지도 않아. 1년전에 에릭이 저질렀던 핵개발 저지사건으로 미국은 웃고 소련은 울었음. KGB에서도 뒤늦게 매그니토란 인물과 헬파이어 클럽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접촉을 시도했으나 에릭은 공황상태로 잠수요 쇼우는 코웃음을 칠뿐이었음. 소련에서도 발을 동동 구르며 뮤턴트들을 모아서 부대를 만들어보려 했으나 대외적으로는 뮤턴트들이 인간을 불신했고, 대내적으로는 쇼우가 방해했기 때문에 무산됐어. 그러다 미 정부와-정확히는 CIA- 헬파이어 사이가 좀 어색해지는 일이 생기는데 헬파이어네 꼬맹이 때문이었음. 

꼬마는 돌아오는 9월이 되면 4살이 됨. 4살이 될 때까지 이름도 없어서 꼬마를 돌봐주던 가정부가 대충 soney 써니라고 부르고 있었어. 한국말로 하면 아들램 정도. 쇼우는 써니를 볼때마다 my son 이라고만 했지 도통 이름을 지어줄 생각을 안했음. 그런 건 낳은 엄마가 지어줘야지^^ 라고 떠넘겼지만 에릭은 아이의 존재 자체도 부정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줄 일도 없었어. 써니가 태어나자마자 쇼우는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런저런 실험을 해봤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강한 뮤턴트가 아닌거 같아서 매우 실망했어. 도중에 죽어버린 에릭과 찰스의 아이가 보여줬던 실험결과들과 자신의 아들을 비교해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지. 그래서 아예 관심을 끊어버렸어. 그런 무관심속에 아이는 뮤턴트로서의 능력이 발현됐다는 것도 모른 채 세 살 생일을 넘겼음. 써니는 다른 사람들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자젤을 좋아했어. 빨갛잖아. 그리고 자신을 챙겨주는 엔젤을 잘 따랐음. “아니 어쩜 자기 아들한테 이름도 안 지어 줄 수가 있는거야? 쇼우님도 너무하시지.” 엔젤은 언제나 써니를 끌어안으며 투덜거렸어.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외따로 떨어지고 돈만 받고 일할 뿐인 가정부 밑에서 감정공유도 제대로 못한 채 컸기 때문에 엔젤이 왜 저런 불평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갔어. 자기는 이름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평소에 불렀던 대로 써니로 불러주면 될 것 같은데 엔젤은 그게 아닌가봐.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질문거리들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엔젤을 만나러 가는데 엔젤이 파랗게 질려서 립타이드와 함께 2층에서 내려와. 무슨 일인가 싶어 올라가봤더니 평소에 가정부가 절대 접근하지 말라고 타일렀던 방 문이 활짝 열려있고 아자젤이 계속 왔다갔다 해. 저 방으로 가면 안된다는 얘기만 들었지 뭐가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해. 써니는 푸른수염의 열쇠를 받아 든 아내가 된 것만 같았어. 저 방으로 가면 아버님께 크게 혼난다고 립타이드가 그랬어. 언젠가 봤던 아버님은 써니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이 너무 섬뜩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 사람에게 혼나다니 머리가 곤두설 정도로 무서웠지만 3살난 아이의 호기심은 푸른수염의 경고보다 강했음. 몰래 안만 엿보고 온다는 게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계속 보게 되었어. 가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무서운 괴물이나 귀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음. 써니는 괴물의 존재를 그 어떤 매체로도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기괴한 무언가가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음. 상상과는 다르게 내부는 여느 방과 다르지 않게 깨끗했음. 오히려 좋았으면 좋았지 전혀 기괴하지 않았어. 고급스런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손때가 전혀 타지 않은 책들과 흩어져있는 체스판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는 누군가를 아자젤이 돌보고 있었어. 처음 보는 사람이야. 아자젤과 오래도록 안 사람인 것 같은데 써니는 저 사람을 처음 봤어. 써니의 존재를 발견한 아자젤이 핀잔을 줬지. 에릭이 깨어있었으면 무조건 못 들어가게 했을 텐데 지금은 정신을 잃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써니를 들여보냈음. 게다가 아이의 능력으로 에릭의 팔을 치료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써니는 피투성이가 된 에릭의 팔을 잡고 시간을 돌렸어. 팔은 구멍이 뚫리기 전 시간의 상태로 돌아갔고 아자젤의 발소리가 들리자 방을 뛰쳐나갔음.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관심이 갔어. 써니의 세 살 인생 중 관심인물 베스트 세 번째 안에 들어간거임. 별 특징도 없고 그저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만 봤을 뿐인데 자꾸만 보고 싶었어. 잘 때도 그 남자 생각 밥 먹을 때도 그 남자 생각을 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러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지자 몰래 그의 방에 가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물어볼 작정이었어. 몰래 그의 방으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아자젤이 써니를 불러 세워. 들켰구나 싶었는데 잠시 같이 갈 곳이 있다며 써니의 손을 잡고 텔레포트를 했음. 그곳은 자비에 스쿨이었어.

엠마는 아자젤의 손을 꼭 잡고 멀뚱하게 서 있는 써니를 뚫어져라 쳐다봤음. 그녀는 단지 학교로 데려올 어린 뮤턴트를 찾기 위해 세리브로를 썼다가 헬파이어클럽이 요즘 뭘 하길래 이리 잠잠하지 싶어 몰래 그 중에서 제일 만만한 아자젤의 위치를 탐색했어. 그랬는데 아자젤 옆에 웬 애가 달라붙어있더라고. 처음 봤을 땐 아자젤의 아이인가 싶어 놀랐는데 보면 볼수록 아자젤이 아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살짝 껴 있는 것만 같음. 쇼우? 아냐 그건 쇼우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좀 더 다른 사람에 가까웠어. 헬파이어클럽에 애가 있는 것도 신기해서 다짜고짜 아자젤의 머릿속으로 그 아이를 데리고 이리 좀 와보라 했지. 아자젤은 깜짝 놀랐음. 몇 년간 소식 없던 엠마가 갑자기 자기를 부르는 데에도 돌랐고 장소가 자비에 스쿨이라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음. “저기 미안한데 엠마, 나 거기 어딘지 몰라;” [좌표 말해줄테니 와.] “그거..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거야?” [그럼 물론이지. 돌려보낼 때 기억을 지울 거거든.] 아자젤은 꼬리를 흔들며 찜찜한 기색을 감출 새도 없어 오만상을 다 쓴 채 써니를 데리고 텔레포트 했음. 써니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봤어. 고개를 갸우뚱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살짝 우울해 보이는 꼬마의 얼굴 위로 마이애미의 까만 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채 보았던 그 남자의 얼굴이 넘실거리듯 떠오르는 거 같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대답을 요하는 말투에 아자젤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써니를 레이븐 손에 들려 내보내. 여자라고는 엔젤과 가정부밖에 본 적이 없는지라 금발에 말간 얼굴을 한 레이븐이 신기해 계속 쳐다봤어. “왜? 누나가 예뻐서?” “네. 신기해요. 노란 머리카락 처음 봤어요.” “그래? 그럼 엄마가 예뻐? 누나가 예뻐?” 나름 장난을 건다고 해봤지만 써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듬. “나 엄마 없어요.” 레이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할 때 방 안에선 자초지종을 들은 엠마의 눈썹이 꿈틀거렸어. “그래서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좀 전에 직접 봤잖아.” 쇼우와 에릭의 아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그래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어. “그럼 이름이 뭔데?” “아.” 아자젤은 말문이 막혔어. 써니라고 부르기는 하는데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그 아이, 이름이 없어.” “뭐라고?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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