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좀 끼얹어 자비에스쿨의 교장으로 취임한 엠마는 레이븐을 도와 학교를 꾸려 가는데 정신이 없음. 자기를 구해준 겸 잠시 머물다 떠나려 했는데 찰스 없이 부랑부랑하게 있는 엑스베이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던거지. 이거 하나 손대주고 나가야지 저거 하나 손대주고 가아지 하다보니 어느새 교장이 되어있네. 특히나 오빠를 잃고도 씩씩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레이븐을 보고 있자니 딱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 계속 뒤를 봐주게 됐어.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에릭을 비롯한 헬파이어클럽도 미국내에선 잠잠해서 쇼우에게 복수를 하겠단 생각은 잠시 접고 간만의 평화를 맛보았지. 그리고 이제 긴장을 풀게 된 엠마는 본격적으로 에릭의 과거를 본 후유증을 겪음. 찰스처럼 직접적인 감정까지 공유할 수 는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그의 과거가 괴로운 건 사실이야. 악몽으로 깨어나는 날이 빈번해져. 마이애미 해안위에서 마주쳤을 때 쇼우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괴로운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었을 때에는 단지 어머나 세상에 하는 단편적인 감상이 다였음. 하지만 그의 인생이 찰스를 만남으로 인해 전구처럼 반짝거렸다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걸 보는 것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어. 특히나 산달이 채 되지 못한 태아가 꿀렁거리며 나오던 장면이 다시 떠오를 때면 엠마는 안색이 매우 파리해졌음. 한동안 갓난아기는 쳐다도 못 볼 정도였어.

반대편에선 아자젤이 다른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지. 러시아에서 데리고 온 에릭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발견했을 때 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음. 하혈이 심했는지 바지는 온통 피로 젖어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허리 쪽 총상은 겨우 동여매놓은 천쪼가리로 겨우 지혈을 했을 뿐이었음. 아이는 죽었을 꺼라 꺼내야 한다고 하니 배를 움켜잡고 버티는 통에 한참을 신경전을 치렀어. 울다 지쳐 혼절한 틈을 타 의사에게 데려다주고, 소식을 기다리는 쇼우에게 간단한 승전보만을 알렸지. 물론 아기의 소식도 함께. 기뻐하는 쇼우의 표정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어. 소련에 데려다 놓고 떠나려던 자신을 원망스레 쳐다보던 에릭의 눈이 자꾸만 생각나서. 

서로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까 에릭은 겁이 났어. 홀몸이었으면 이까짓 것 세 달이 뭐야. 한 달도 안 걸릴 테지만 이 상황에서 이런 일을 시키는 쇼우의 의도가 어떤 건지 뻔히 보였거든. 그래서 막 사라지려는 아자젤을 붙잡았음. “날 데려가줘. 지금은 할 수 없어! 안돼!” 쇼우에게 일을 미뤄달라고 말을 해야 하니까 날 다시 데려가 달라고 말했지만 아자젤은 일부러 좀 거세게 뿌리쳤어. “남자의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되면 사리분별도 판단할 줄 모르는가?”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계속 모진 말을 했지. 공과 사는 구별하라고 타박을 주곤 유황냄새를 내뿜으며 사라졌음. 에릭은 러시아의 추운 겨울 숲 한 가운데 서서 배를 붙잡고 덜덜 떨었어. 이제 막 세 달째로 들어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배를 바라보며 어찌하면 좋을까 끊임없이 생각했음. 이대로 도망가도 좋을 것 같아. 그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진귀한 것들을 다 갖다 준 다해도 마다할 수 있는 보물이 있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자신과 찰스를 닮은 이 아이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아들이건 딸이건 그 역시도 상관없어. 바로 앞에 있는 군부대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 도망쳤어. 계속계속 걸어서 작은 집을 하나 발견했음. 드넓은 숲속에 달랑 한 채 있는 집 굴뚝에선 연기도 나고 있지 않았음. 아마 사냥꾼의 일터 인가봐. 잔뜩 주변을 경계하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더니 커다란 순록이 거꾸로 매달려 있을 뿐 아무도 없었어. 날이 잘 선 칼 하나와 쇠꼬챙이에 꿰어진 순록을 통째로 훔쳐 달아났어. 다시 숲속으로 몸을 숨길 때 즈음 저 뒤에서 러시아말로 오늘 사냥이 엿 같았다며 욕을 지껄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어. 주인이 돌아왔나보지. 에릭은 순전히 능력을 써서 모든 걸 다 훔쳐왔기 때문에 증거가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곧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주인의 고함소리를 듣고 왔음. 주인은 귀신이 들지 않았으면 그 큰 순록이 사라질리 없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에릭은 나무 뒤에 숨어서 킬킬대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어. 운이 좋게 동굴 하나를 발견했어. 가죽도 있고 식량도 넉넉하게 있겠다 싶어 마음이 풍족해졌지. 밤이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달려들었지만 칼 하나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어. 하지만 러시아의 추위는 상상 이상이라 더 이상 동굴 속에서 불 하나만 쬐며 버틸 수가 없지. 그때 보았던 사냥꾼의 일터 즈음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음. 마을 사람들은 추위에 떨고 있는 -매우 불쌍해 보이는- 에릭을 잘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줌. 너무나 오래간만에 찾아온 몸과 마음의 평안이라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점점 부푸는 배를 무시할 수 없었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자가 아이를 가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게 분명해. 짧은 시간이나마 정들었던 마을사람들을 뒤로한 채 모스크바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 두꺼운 모포를 뒤집어쓰고 덜컹거리는 짐마차 속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봤어. 숨을 크게 들이마쉬자 마른 짚단의 향이 시큰하게 코를 찔렀어. 혹시나 하는 두려움도 일었지만 큰 도시 속에 녹아들면 제아무리 헬파이어 클럽이라도 자기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어.

아직 살아있는 숨은 계좌를 이용해 돈을 인출해서 한동안 거주할 집과 식량을 사들였어. 급하게 마련한 집은 좁고 구석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 위험한 골목이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자체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서 오히려 편했지. 거의 한달 가량을 집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뱃속의 아기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미약하게나마 태동이 느껴지는 시기라 아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면 열렬하게 반응을 해줬어. 한달이 다 되어가자 식량도 점점 바닥이 났고 어쩐지 쇼우가 조용한 게 불안해져서 모스크바를 떠나야 할 것 같았어. 물론 그동안 쇼우가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지. 소련으로부터 별다른 뉴스거리가 없자 에릭이 도망쳤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직시했어. 그렇게나 원하던 찰스의 아이를 가졌으니까 쇼우의 명을 듣지 않아도 사실 상관없잖아. 에릭에게 있어선 쇼우로부터 달아나서 무사히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거지. 쇼우는 CIA로부터 [매그니토]에 관한 기밀자료를 빼내 헬파이어클럽에 대한 이야기는 싹 제거한 채로 소련에 던져줬어. 지금 미국의 요주 테러범 매그니토가 러시아 한복판 어딘가에 있을 테니 조심하라고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줬음. 러시아 전역의 경계가 강화되었고 수도인 모스크바는 평소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어. 에릭의 집근처 할렘가도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지고 있었음. 소식을 뒤늦게 들은 에릭은 간단한 짐만 챙기고 집을 나서려 했는데 수색요원이 한발 빨랐어.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지옥에서 울리는 소리마냥 두려웠음. 무거운 몸을 끌고 반대편 방 창문으로 겨우 빠져나갔지. 분명 불은 켜져 있는데 아무 인기척이 없자 이상해진 요원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어. 에릭은 도망친 뒤였음. 몸이 무거워져서 달리는 게 버거웠어. 두꺼운 코트로 몸을 가리고 있어서 불룩 나온 배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음.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모스크바를 떠나려 했어. 도로 마다 검문소가 있었고 초조해하던 에릭은 검문소에 다다르기 직전에 택시에서 내렸음. 생각 없이 한 행동은 결국 화를 부르고 말았는데 검문소 직전에 멈춰선 택시를 수상히 여기던 경찰이 다가왔어. 택시에서 내리는 승객을 유심히 바라보던 경찰은 손에 들려있는 사진속의 남자가 승객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을 깨닫자 곧바로 본부에 무전을 치고 에릭을 불러 세우려 했어.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해서 고개를 내리니 촘촘히 박힌 벨트의 쇠장식이 허리를 꽉 죄고 있었음. 허리춤에 찬 권총과 무전기가 하늘로 솟았고 곧 분해되어 바닥으로 떨어졌어. 이 광경을 목격한 다른 경찰들이 에릭에게 총을 겨누며 달려왔지만 그들의 무기 또한 바닥에 분해된 것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어. 무기가 사라진 경찰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잔뜩 겁먹은 에릭은 자기가 타고 왔던 택시를 탈취해 도망쳤어. 불법유턴에 역주행으로 시속 200을 밟으며 미친듯이 도망갔음. 심장은 터질듯이 두근거렸고 능력남발로 식은땀을 뻘뻘 흘림. 경찰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어 대태러 특수부대가 긴급하게 파견되었지만 도착해서 본 것은 긴 타이어 자국을 따라 모락모락 나는 연기뿐이었음. 

차에 기름이 떨어지자 능력으로 억지로 끌고 가 모스크바 외곽에서 차를 버리고 달렸어. 지친 몸을 이끌고 외진 숲속으로 들어가 주저앉았음. 하늘엔 헬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여기저기서 자신을 찾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옴. 무거운 몸으로 몇 시간을 내달렸으니 일어날 힘도 없어. 속이 메스껍고 머리도 어지러워. 왜 이렇게 힘들까. 나는 왜 내 맘대로 인생을 살 수 없을까. 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을까. 나는 왜 항상 이렇게 쫓겨야 할까. 왜 항상 혼자여야 할까 머리를 감싸 쥐며 자괴하다 뱃속의 아기가 힘차게 움직이는 걸 느끼곤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음. 왜 혼자여야 할까 라고 생각했던 즈음에서 이리 신나게 발길질을 해대니 안 웃을 수 있을리가.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나를 잊지 말라는 듯 열심히 배를 발로 찼지. 웃음소리를 찾아 부대원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헬기의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숲속에서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주저앉아있는 에릭을 비췄음. 모든 총구가 그를 겨누고 말았어.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창백하게 웃고 있던 에릭은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어. 그 시각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있던 쇼우에겐 러시아의 특수부대 하나가 전멸했다는 짧은 소식이 들려왔음.

소련 정부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어. 제아무리 철을 다루는 돌연변이라고 해봤자 바늘 같은 것만 만지는 일개 테러리스트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 뮤턴트란 존재를 너무 얕잡아 봤어. 급파한지 하루도 안되서 거의 전멸했단 소리를 듣자 매우 당황해 허둥지둥 대비책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러지도 못하지. 겨우 목숨이 붙어있는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손짓 하나로 헬기를 우그러뜨리고 무기들을 분해해 버려서 쓸 수가 없었다고. 철을 조종할 수 있다던 보고서가 진짜였을 줄은 몰랐어. 그저 양키동무들 기름진 것만 먹더니 헛것을 봐대는구나야ㅋ 하고 비웃었는데. 현대식 무기들로는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판단했음. 그런데 어쩌겠어 무기들이 다 철로 되어있는걸. 결국은 대륙의 기상, 인해전술로 밀고가. 하루에 만여명씩 상대해 보라며 무지막지한 투입이 이뤄졌음. 에릭이 숨어있던 모스크바 근교의 숲은 쑥대밭이 되었고 하루에 삼백 이상씩 죽어나갔음. 갑작스런 공세에 놀란 에릭은 꼼짝도 못하고 식량도 없이 보름을 버텼어. 그나마 겨울이라 끊임없이 눈이 내려 눈을 먹으며 수분을 보충 할 수는 있었음. 에릭은 매우 신경이 곤두서있어. 피곤하고 지친데다 배도 고프고, 불안하게도 아랫배가 간간히 아파와. 아이는 여전히 뱃속에서 힘차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지만 안심할 수 없어. 방금 날아온 미사일을 신경질적으로 되돌려보내. 이대로 있다간 수천억년전에 생성됐을 이 산의 맨 밑 지층이 파괴될 때까지 폭탄을 투여할 기세임.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거같음. 지금 당장 이 산 밑에 새카맣게 몰려있는 군인들부터 처리하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겠지.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태동도 심해졌어. 아이가 빨리 밥 달라고 투정부리는 것 같아 귀엽기도 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더 크지. 조금만 참아 아가. 파파랑 같이 살아나가자. 에릭은 조금 무리하게 능력을 써서 하얀 눈밭을 전부 피바다로 만든 후 시체들에게서 식량을 몇 개 구해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먹고는 다시금 군인들이 몰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다급하게 산에서 내려감.

대륙은 위대하고 위대해. 그 광활한 대지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어. 그걸 증명하듯 아무리 죽여도 인간이 끝없이 몰려왔어. 쉬지도 못하는데 배는 땡겨오고 정말 죽을 맛이었음. 괜히 도망갔나 싶기도 해. 그냥 눈앞에 있던 부대들을 빨리 처리했으면 지금쯤 이런 고생은 안 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자 그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겼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직 기간은 한 달 즈음 남아있었고 일을 빨리 끝내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서 데리러 와줄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나마 에릭이나 되야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지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진작에 죽었을지도 모름. 다시 한 번 자신의 남은 체력을 믿으며 목적지로 향해. 뒤에는 군인들을 줄줄이 매달고.

에릭은 그곳이 별 다를 것 없는 부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실은 그게 아니었음. 소련의 핵개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미 양국 다 핵은 보유하고 있지만 핵의 성능으로 기 싸움을 하고 있었거든. 미국 정부에서 가만 보니 이 소련놈들이 이번에 연구하는 핵의 위력이 차르봄바를 넘어설 거란 얘기를 들었어. 그런 미친 폭탄을 또 만든단 말야? 미국은 손사래를 치며 당장 그 개발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소련은 당연히 콧방귀만 뀌었지. 물론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냉전시대의 광기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음. 해서 미국은 직접 쇼우와 거래를 함. 정부는 매그니토를 보낼 것을 요청했지. 오 이런 장관 나으리. 매그니토는 내가 매우 아끼는 아이이므로 이런 험한 일에 쓰이는걸 바라지 않습니다. 라며 허울좋게 거절은 했지만 나쁘지만은 않아. 미 정부에서도 헬파이어 클럽과 에릭의 힘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잘 하면 꼴도 보기 싫은 찰스의 아이를 떨굴수도 있을 테니까. 정부의 끊임없는 러브콜에 힘입어 눈물을 머금은 척 하며 에릭을 그 황량한 시베리아 한복판에 떨군거지. 이제 에릭은 두 달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어. 쇼우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바보같은 짓이었다고 자신을 질책하며 일을 마무리 하려 하지. 갑자기 허벅지가 뜨끔해. 총알이 스쳐지나간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너무나도 지쳐서 적들이 인근에 깔린 걸 눈치 채지 못했어.

피는 쏟아지는데 너무 지쳐서 고통에도 둔감해졌는지 그다지 아픈 것 같지도 않음. 다리를 질질 끌며 동굴처럼 보이는 기지 입구 안으로 들어가. 기지는 개미지옥처럼 지하로 깊숙이 파여 있고 뱅글뱅글 돌아내려가게 되어있음. 바깥에서 그를 쫒던 부대에서 무전을 쳤는지 기지 안은 우왕좌왕했고 숨어드는 것도 힘에 부쳐 그냥 대놓고 부수기로 함. 폭탄을 터뜨려 다 묻어버릴 작정이었어. 에릭은 병사들에게서 능력으로 수류탄 떼어내 무심하게 휙휙 던졌고 자신들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것들을 보며 다들 도망가기 바빴음. 손짓 하나로 안전핀을 뽑아버리고 귀를 막음. 비어있던 가운데 공간으로 지반이 무너지며 사람과 시설들을 전부 빨아먹듯이 삼켜버렸음. 주변은 사람의 터진 살덩어리들과 구겨진 기계들이 엉켜있었고 화약냄새와 피냄새가 섞여 아주 역했음. 평소에도 자주 맡던 냄새였지만 어째선지 속이 부글거려 끅끅 숨을 참으면 밖으로 나왔어. 기지 입구로 빠져나오자마자 정신없이 구토를 했음. 주변을 둘러보니 눈으로 덮혀 있어 새하얗기만 해. 하늘을 봐도 하얘. 조금전까지 있던 군인들도 안보여. 아무도 없나봐. 몸에 힘이 쭈욱 빠지며 눈앞이 핑 돌아. 도망가려고 발을 내딛는데 다리가 움직이는지도 모르겠어. 몸이 기우는 것 같은데 주변이 모두 하얘서 땅을 딛고 있는지 공중을 나는지도 모르겠어. 떨리는 손을 들어 배를 짚어봤어. 아까 폭발할 때 많이 놀란 것 같던데 괜찮아? 에릭은 아기의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음. 에릭이 누운채로 움직임이 없자 그제서야 숨어있던 군인들이 하나둘 그에게 총을 겨누며 천천히 걸어 나왔어. 가까이 다가간 그 부대의 중대장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음.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강추위에 식량도 없이 다 헤진 겨울 정장에 코트 하나만 입고 보름 이상을 버틴 에릭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 이런 거지꼴을 한 사내 녀석 하나를 상대로 특수연대 두개를 잃었어. 그나마 이것도 에릭이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대 두 개로 끝난 거였지만 중대장은 그걸 모르지. 그 앞에서 쇠는 소용없다는 걸 터득한 이들은 혼절한 에릭을 줄로 끌고 갔음.

얼굴도 창백하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의무실로 데려갔어. 옷을 벗기는데 간호사가 흠칫 놀라. 배가 심하게 부풀어 있으니까. 이걸 왜 여태 몰랐나 싶을 정도야. 중대장은 다시 혀를 내두름. 이렇게 큰 종양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버틸 수 있었단 말인가? 뮤턴트란 대체 어떤 존재지 라는 멍청한 의문을 가짐. 임신했다는 걸 모르니 악성 종양이라고 생각해버린 나머지 항생제를 멋대로 투여하고 영양제를 주입한 후 깨어날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몸의 피로가 상당했는지 사흘이 지나서 겨우 눈을 떴음. 복부 쪽의 째질 듯 한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지만 열이 펄펄 끓어 이게 어느 부위에서 느껴지는 고통인지 유추할 정신도 없었음. 손은 양쪽 벽에 줄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배를 더듬어보지도 못해. 아기는? 내 아기는 어딨어? 여긴 어디야? 내 배는 무사해? 독일어로 내뱉는 말을 알아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음. 이제 정신도 차렸겠다 그동안 이를 득득 갈고 있던 심문관중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는 에릭을 앉혀놓고 무작정 뺨을 갈겨대기 시작했음. 시끄러운 러시아말이 머리를 울리고 쑤시는 몸과 열로 인해 눈두덩이가 뜨거워.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 심문관은 에릭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를 너무 많이 잃은 나머지 그가 눈을 뜨자마자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둘렀어. 뺨 세례가 멈추자 그제서야 정신이 듬. 심문관이 끌려나가고 에릭은 배에서 격렬하게 통증이 느껴지는 것을 알았어. 고통 속에 몸부림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의관이 들어와 항생제를 몇개 투여해. 경악스러움에 주사바늘이 꽂힌 팔을 내두르며 러시아말로 소리침. 무슨 짓이야! 내 몸에 뭘 넣는 거야! 군의관은 에릭을 진정시키며 지금 네 뱃속의 종양을 어느 정도 죽여야 심문을 오래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을 해. 에릭은 숨을 멈춤. 정신을 잃어서 몰랐지만 붙잡힌 날로부터 태동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완벽하게 오해를 하고 말았어. 사흘 동안 조금이라도 종양의 크기를 줄여볼까 싶어 독한 항생제를 시간 맞춰 투여하고 말았던 거야. 소 같은 눈망울을 크게 뜨고 경악스런 표정으로 굳어버린 에릭을 보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지만 혹시 고통에 발작을 할까 싶어 진정제까지 넣어줬어. 너무 큰 충격에 제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걸 다 맞고 있던 에릭은 그제서야 비통함에 눈물을 뚝뚝 흘렸음. 그리고 잦아드는 정신 속에서 제발 이 아이좀 살려달라고 신에게 빌었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부터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존재였음. 제발 신이시여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날 놓지 말아주세요. 내 생명인 이 아이를 살려주세요. 

다시 눈을 떴을 땐 의무실이었고 시간상으론 반나절이 지나있었음. 해가 지며 발갛게 노을이 일고 있었어. 멍하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무심결에 배에 손을 얹었음. 둥글게 부푼 배가 이제는 무기질의 물체같이 느껴졌어. 생명의 반응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둥근 배는 여전히 양수로 가득 차 있어서 단단했음. 슬픔에 반응한 눈은 눈물을 한줄기 내보냈어.

그날 이후로 에릭은 무기력하게 의무실 침대에 누워 울기만 할 뿐이었음. 종양이 너무 커 다가오는 죽음의 문턱이 어지간히도 두려운가보다 하고 아량이라도 펼칠 요령으로 손목의 밧줄도 풀어버렸어. 군의관은 멍한 눈으로 훌쩍이는 에릭의 옆에 서서 링겔의 잔량을 체크하며 흘깃 그의 배를 보았음. 닷새가 지나도 종양으로 생각되는 것이 줄어들지 않았기에 이상함을 느껴. 자세히 진찰해보기 위해 옷을 들추고 배를 눌러보려 손을 대자 동시에 우악스런 손아귀가 느껴졌어. 방금 전까지 영혼이 비어버린 듯한 흐릿함이 아닌 눈이 마주친 이의 전신을 태울듯한 매서운 눈빛이 군의관을 또렷이 바라보고 있음. 군의관은 공포감에 소리도 못 지르고 붙잡힌 손목을 빼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에릭은 손을 놔주지 않았음. “Nicht, beruhren.” 짧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전신의 털이 곤두섰고, 이상하리만큼 번들거리는 눈은 살의로 가득 차 있어. 의무실의 철제도구들이 덜거덕 거리더니 이젠 건물 전체가 들썩거림.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고 군의관은 이 남자를 묶어두지 않은 자신의 방심을 저주했어. 묶어봤자 철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에릭은 남자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어. 군의관은 서랍 속에서 튕겨 나온 여러 종류의 메스들이 공중에서 저를 향하고 있는 것과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마른 남자의 조화가 묘하게 진풍경이라는 미친 생각을 했음. 에릭은 하얗게 질린 군의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어. “너지? 네가 나한테 주사를 놓은 거지?”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톤 낮은 독일어는 누가 들어도 죽이게 섹시했지만 공포로 굳어버린 상대에겐 의미가 없었음. 창문으로 의무실 안의 상황을 보고 들어오려는 자들을 전부 죽이고 군의관의 손을 들어 자신의 배에 얹었음. “넌 이게 내 생명을 갉아먹는 병균덩어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냐. 이건, 이 아이는 나야. 살아있었어. 내 삶이었어..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공중에서 파르르 떨던 메스가 하나씩 군의관에게 날아가 꽂혔음. 하나 두 개 꽂힐 때마다 비명이 메아리 쳐.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네 삶을 빼앗을 거야.” 에릭은 군의관을 죽이는데 온 의식을 쏟고 있어서 다른 적들이 들어오는 걸 차마 알아채지 못했음. 뒤에서 날아온 총알이 어깨를 스치는 걸 느끼곤 급하게 능력을 써 그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죽이고 의무실을 빠져나갔어.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 있던 에릭이 형형한 눈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본부는 비상이 걸렸고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하나 둘 죽어나가고 있었음.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철제구조물들이 빠져나와 공중에서 넘실대자 모두는 공격할 의지를 상실하고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어. 커다란 철근을 휘어 막 공격을 하려는 찰나 배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에릭은 너무 놀라 공중에 떠있던 모든 철제들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배를 감싸 안아. 살아있었어? 놀라움과 기쁨으로 머릿속이 패닉이 되었는데 커다란 소리가 나며 오른쪽 허리가 뜨끔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신참으로 보이는 군인 한명이 덜덜 떨며 자신의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어. 옆구리에서 피가 꿀렁이며 나오는 걸 무심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다리사이로 무언가가 울컥하고 흘러내려가는 느낌이 나. 입고 있는 바지가 검붉게 젖어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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