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정부청사 앞 횡단보도에 서서 일을 시작했음. 꽤 간단했어. 건물을 뽑아서 거꾸로 들고 털기만 해도 그 안에서 인간들이 우수수 떨어졌거든. 꽤 높이 들어 올렸기 때문에 바닥에 떨어진 인간들은 대부분 죽었어.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 사지를 바르르 떨며 눈을 까뒤집고 있었으니까. 여태 자기가 죽였던 사람들은 나치의 잔당들일 뿐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상당히 악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죄책감도 가질 필요도 없어. 하지만 이 사람들은 어때? 그냥 일반인들이야. 이 중에는 뮤턴트의 정체를 알고 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뮤턴트의 존재조차 모르는 일반인들일 뿐이야. 그 중에 하나는 죽어가면서 에릭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어. 눈이 마주쳤지. 저도 모르게 건물을 놓칠 뻔 했지만 그만둘 수도 없었어. 경찰이 출동할 때 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쇼우의 명이 있었으니까. 멀리서부터 소방차와 경찰차의 사이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어.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광경을 처음 접한 경찰들은 넋을 놓고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올린 채 식은땀을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한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눴어. 도저히 일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특수상황이라 상부에 보고하자 생포하거나 그러지 못할 시엔 사살하라는 명이 떨어졌지. 생포하려 덤볐던 경찰 너덧명이 장풍을 맞은 것처럼 공중으로 튕겨 오르자 사살명령이 떨어졌어. 그들은 에릭에게 총을 난사함. 하지만 총을 쏘자마자 모두들 후회를 했어. 앞으로 나가야 할 총알들이 방향을 틀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제각기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는 총알들을 피하려고 할 때 검붉은 연기가 나타나 그 남자를 데리고 사라지자 총알들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공중에 떠 있던 건물도 바닥으로 쿵 내려앉아 분진과 핏물이 사방으로 흩날렸음. 

쇼우는 예상 못했던 에릭의 큰 능력에 굉장히 흡족했어. 자신이 알게 해준 분노의 힘으로도 이 큰 건물을 들어올릴 수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너무도 쉽게 건물의 철근들을 움직였으니. 에릭은 이미 찰스와 rage and serenity를 습득한 상태였음. 그러니 본인 입장에서는 이상할것도 없었지. 이미 죽었지만 찰스는 에릭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큰 존재였고 어머니와의 추억 이후로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생에서 가장 행복했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니까. 그리고 그 날 한번의 공식 일정으로 에릭은 코드네임 [매그니토]로서 미국정부의 위험인물 1순위를 기록함.

매그니토라는 코드명은 모이라가 제출한거였어. 해변씬까지 안 간 상태였기 때문에 찰스는 모이라의 기억을 지울 생각도 못했고 지울 일도 없었어. 당연히 모이라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고 레이븐이 각자의 코드명을 지어주던 것도 물론 기억하고 있었음. 찰스의 장례까지 치루고 다시 CIA로 돌아와서 찰스를 기억하며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어. 그러던중 그녀에게 단독사건이 하나 들어왔어. 자연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묘했기 때문에 뮤턴트들과 실제적으로 접촉하며 이런 기현상들을 많이 목격한 모이라에게 몫이 돌아갔던 거였어. 신원미상의 남자가 정부청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홀연히 사라진 사건. 혹시나 하며 사건파일을 훑어보던 모이라는 굳어버렸지. 현장에 있던 경찰들이 증거물로 제출한 사진속의-흔들려서 흐릿하지만- 익숙한 인상과 총알을 다루는 등 그 능력들을 종합해 봤을 때, 신원미상의 남자는 몇 년 전 찰스가 죽고 행방불명 된 에릭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 오 에릭..탄식을 내뱉으며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어. 죽어가던 찰스의 신음소리와 비통했던 에릭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진동했지. 그길로 그녀는 자비에스쿨로 가 레이븐을 만났어. 레이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이라를 맞아. 서로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었고 별로 좋은 일로 온 것 같지 않았으니 딱히 좋을 건 없었어. "무슨 일로 온 거죠?" "도움이 필요해요 레이븐. 에릭이 나타났어요." 레이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이라가 내민 서류를 급하게 훑어봤어. "맞아, 이건 에릭이야.. 에릭 세상에.." 레이븐의 탄식 소리에 알렉스와 션, 행크도 모여들었고 표정이 곧 좋지 않았어. 그들도 모이라의 방문을 그다지 반기진 않았으니까. 레이븐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다 시피 한 알렉스는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어. "어.. 이건." "..이건? 뭐죠 알렉스? 무엇을 본거죠?" "이거. 에릭 곁으로 무슨 연기가 일렁이고 있잖아." 그의 말대로 에릭 곁에는 검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는 순간이 포착되어있었어. 행크가 한숨을 쉬듯 말했지. "헬파이어 클럽의 그녀석?" 쇼우가 자신을 쳐내고 찰스를 죽인 후, 에릭을 붙든 채로 함께 사라진 검붉은 연기의 정체. 행크는 그날 아자젤을 본 적이 있었어. 그리고 에릭이 아직 그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 유추했지. 찰스를 죽인 자들과 손을 잡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모두의 몸을 덮쳤어.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었어. 에릭은 찰스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으니까 혹여 아이가 인질이 된건 아닐까 하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거라곤 추측뿐이었으니 그 답답함이 이루말할 수가 없었어. 레이븐은 각기 흥분한 그들을 진정시키고 모이라에게 하나 부탁을 하지. "엠마였던가, 혹 그녀가 아직 붙잡혀 있다면 넘겨주세요. 우리에겐 그녀가 필요하니까요."


반나절 동안 있었던 일들은 에릭을 아주 괴롭게 했지.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건 사람들의 표정이었어. 건물을 들어올릴 때 쳐다보던 사람들의 표정.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들의 표정. 그건 모두 괴물을 본 듯한 표정이었어. 그들을 충분히 이해해. 그들의 반응은 이미 익숙함.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라 칭했으니. 보고를 받은 쇼우도 아주 흡족해 했지. 굉장해 에릭. 완벽하게 괴물이 되었어. 말을 듣자마다 뛰쳐나온 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어. 머릿속에서 울리는 한 목소리 때문이야. 에릭. 넌 괴물이 아냐. 네 능력은 다른 사람은 갖지 못한 너만의 축복이고, 넌 불행한 사람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주 행복한 사람이야. 과거로 힘들어 할 때 마다 찰스는 그를 끌어안고 속삭여줬어. 방으로 돌아온 에릭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어.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고 시선을 차단한 채 찰스가 해줬던 그 말만 떠올리며 중얼거렸어.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지라 웅얼거림에 불과한 소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웅얼거림은 점차 또렷해졌어. "나는 괴물이 아냐, 행복한 사람이야. 나는 괴물이 아냐. 아냐 찰스.. 나, 난.. 괴물이 아냐." 그날은 하루 종일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엠마는 그때까지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특수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어. 그녀의 형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인간들 덕분이지. 인간이니 인간의 형을 적용해야 한다와 인간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로. 그렇게 시간을 소모한 게 벌써 2년이 넘었어. 쇼우도 엔젤을 얻은 뒤엔 엠마를 외면했으니 완벽하게 버림받았다고 볼 수 있지. 짙은 고독과 절망감, 배신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구치소의 문이 열렸어.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이야. 자기를 꺼내준 고마운 인물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녀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지. "교수의 여동생? 하나도 안 닮았는걸." "당연하지. 친동생이 아니거든." "어머, 미안해라."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엠마."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다니 교양이 없어." "세리브로로 에릭을 찾아줘." "세리브로?" 엠마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너무 설명 없이 부탁만 덩그러니 한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을 해줬지. 사정을 듣고 난 그녀는 이상했어. 교수를 놔두고 왜 하필 나에게? 수상함을 느낀 나머지 레이븐의 머릿속을 살짝 읽었어. 오 맙소사. 쇼우가 찰스를 죽이던 장면에서 그녀는 레이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어. 레이븐은 자신의 머릿속이 읽힌게 매우 불쾌했지. 하지만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차마 화를 낼 순 없었어. "우리를 도와줘." 엠마는 레이븐의 부탁을 받아들였어. 더 이상 이곳에 있기도 싫었거니와 이들을 도와 자신을 버린 쇼우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거든. 그 헬멧만 없다면 말이지.


쇼우는 에릭에게 붙은 매그니토라는 코드네임이 맘에 들었어. 누가 지었는지 아주 작명센스가 뛰어나다며 칭찬을 했지. 엔젤은 진상을 알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 쇼우는 에릭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괴로워하건말건 신나게 그 능력을 이용해먹었어. 이제는 아예 대놓고 그 어딘가의 천사코스하는 도둑소녀처럼 경고장까지 날림. 그때마다 인간들은 갖은 최신 무기를 들고 방어를 했지만 에릭의 능력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지. 엠마는 레이븐들을 도와 세리브로를 이용해 그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했지만 번번이 놓치고 말았어. 아자젤의 능력으로 매번 위치가 바뀌어버리니 추측도 불가능해. 모두 답답해하던 찰나 그들이 한번 링컨동상 앞에서 마주쳤어. 에릭은 링컨동상에서 시선을 거두고 광장을 향해 내려오면서 찰스와 체스를 두었던 때를 생각했어. 손을 들어 올리니 인간들이 하나 둘 공중으로 떠올랐음. 평화롭던 광장은 삽시간에 비명소리로 가득차. 마침 차를 타고 다른곳으로 이동하고 있던 레이븐과 엠마가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놀라 광장을 보니 사람들이 두둥실 떠올라있음. 에릭이란걸 직감하고 둘은 동시에 광장 안으로 내달렸어. "그만둬 에릭!" 너무나 오래간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손을 멈췄어. 레이븐과 엠마는 달려오느라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며 에릭을 설득하려 했어. “이건 아니야. 에릭. 이런 방식은 옳지 않아. 왜 이러는거야? 설마 단독적인 행동이야? 우리가 도와줄게!” 레이븐이 주의를 끄는동안 엠마가 에릭의 속을 읽었어. 그 순간 엠마는 그와의 접속을 끊을 생각도 못한 채 숨을 들이마쉬며 주저앉았어. 에릭의 인상이 단번에 험악해지며 손에 쥔 인간들을 공중에서 부수고 있었지. "에릭!!" 에릭은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레이븐을 외면한 채 파르르 떨며 주저앉아 있은 엠마를 향해 피를 토하듯 절규했어. "날 읽었다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지 여자! 방해하지 마! 다시 한 번 날 방해하면 죽여 버리겠어!" 그의 손아귀에 잡힌 모든 인간들의 비명이 끊겼어. "그리고 레이븐. 찰스 흉내내지마." "뭐라고?" 레이븐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에릭은 예의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어. 찰스 흉내를 내지 말라니. 유산을 상속받은 그의 여동생으로서 당연히 유지를 이어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어. 그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기 전에 뒤에서 엠마가 신음하고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주었지. 엠마는 고개를 내저었어. “그는 살아있는 아이가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야.” 짧은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었어. 저택에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레이븐은 기함을 할 수 밖에. 


쇼우는 에릭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올수록 상을 주는 의미로 그를 안았어. 에릭은 끔찍하게 싫지만 거부할수 없었음. 쇼우는 체내사정을 선호했기 때문에 다시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매일 에릭을 괴롭혔어. 어쩌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느끼는 날은 겁먹은 얼굴로 임신테스트를 했어. 물론 임신은 아니어서 안도했지만. 아자젤은 항상 그의 곁에서 불안정한 모습을 지켜봤어. 같이 일만 하는 사이라지만 상대방이 저토록 불안해하면 누가 보기 좋겠어. 그건 립타이드도 마찬가지였고 엔젤도 마찬가지였음. 에릭이 너무나도 싫어하는 날엔 어쩌다 한번씩 숨겨주기도 했어. 항상 그렇게 부랑부랑 울망울망 하던 표정이 어느날 활짝 밝아졌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립타이드가 이유를 묻자 에릭은 아직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거리며 말을 했지. 이번 임무만 마치면 드디어 찰스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어째 영 믿음이 가지 않는 약속이었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줬지. 에릭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거든. 그 미소가 너무도 화사해 립타이드는 어째서 찰스가 같은 남자인 에릭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어.

임무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으므로 쉽게 끝마치고 왔어. 에릭은 매우 들떠 있었고 쇼우는 흔쾌히 찰스의 배양액 하나를 넘겨줬지. 단번에 임신에 성공했어. 에릭은 기묘한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뚝뚝 떨궜어. 수도꼭지를 틀은 것 마냥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 거의 3년만이야. 첫 아이를 잃은 지 3년 만에 -쇼우와의 아이는 자식으로 치지도 않고- 다시 찰스의 아이를 가졌어. 아직 인간의 형태도 갖추지 못했는데 너무나도 아이가 보고 싶고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매일 밤 아이의 이름을 뭘로 지을까 생각하며 행복에 겨워 잠이 들었지. 어느날 눈을 뜨자마자 그는 쇼우에게 불려갔어. 쇼우는 웃으며 러시아에서 해야 하는 3개월의 장기임무를 전했어. 민간인 테러수준이 아닌 러시아의 군 기지를 헤집어야 하는,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임무였지. 절망스러워. 가슴에 누가 무거운 돌을 얹은 것 같이 아파. 말도 안 돼. 뭐라 항의를 하려 입을 벌릴 새도 없이 눈앞에 불이 번쩍했어. 맞은 왼쪽 뺨이 불에 데인 듯 아파. “토를 달지 마라. 너는 따를 수 밖에 없어 에릭. 그렇지? 내 착한 아이야.” 에릭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감았어.

찰스의 아이를 갖게 해준다 약속을 했으니 지키기는 해야 하지. 그런데 막상 행복해 하는 에릭을 보자 심사가 뒤틀려. 속이 배배 꼬여 또아리를 텄어.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강하디 강한 정신계 뮤턴트 찰스의 아이라면 견딜 수 있겠지. 쇼우는 아자젤을 시켜 에릭을 러시아 한가운데에 던져놨어. 그리고 정확히 3개월 후 임무가 끝나는 날. 다시 데려온 에릭의 눈은 죽어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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