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과 아자젤을 번갈아가며 보던 엠마는 에릭의 목에 꽂혀있는 과도를 보고 안색이 새파래. 깔끔한 카펫이 에릭이 토해내는 피로 붉어져가자 질겁을 하며 텔레파시로 행크에게 의료도구를 가져오게 하고 레이븐에게는 마이클을 데려오게 해. 다행히 시간은 오밤중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잠자리에 들었고 레이븐은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에서 몰래 마이클을 데려왔어. 자다 깬 마이클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부비며 레이븐의 손에 이끌려갔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으응. 잠시 교장선생님을 뵈러 가는거야." 교장선생님이 왜 찾을까 고민하는 새에 어느새 교장실 앞에 다다랐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레이븐이 마이클과 눈높이를 맞춰 앉아 아이의 눈에 손을 덮고 조심스럽게 설명했음. "마이클, 지금부터 아주 잠깐 동안 앞이 안보일거야. 온 건물의 불을 다 꺼놨거든. 교장실 안에 아주 아픈 사람이 있어서 마이클이 능력을 써줘야 하는데 되도록 보지 않는 게 좋을것 같거든. 선생님 말 알아들었지?"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븐은 손을 놓았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마이클은 이 까만 어둠이 무서워서 레이븐의 바짓자락을 꽉 잡았음. 불을 껐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지. 자비에성의 불은 한 톨도 꺼지지 않았음. 엠마의 능력으로 마이클의 시신경을 차단했을 뿐. 엄마가 목에 칼을 꽂아 넣고 피를 토하는 모습을 어린애에게 보여줄 수가 없잖아. 비록 엄마인줄은 모른다 하더라도 말야. 레이븐이 심호흡을 하며 교장실을 열자 훅 피비린내가 끼쳐왔어. 마이클은 짙은 피비린내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더더욱 레이븐을 꽉 잡았고, 레이븐은 불안해하는 마이클의 손을 잡고 점점 죽어가는 에릭에게 인도했어. 식식대며 겨우 숨을 쉬던 사람이 마이클을 발견하자 눈빛이 달라져서 아이를 향해 손을 허우적대. 행크와 아자젤이 그의 몸을 봉쇄하고 나서야 마이클이 능력을 쓸 수 있었어. 


닷새 동안 마이클은 사물에 직접 닿지 않고도 능력을 쓸 수 있게 됐어. 첫날은 헬파이어클럽과 떨어진 적이 처음이라 낯설고 쓸쓸해서 반나절을 울었는데 달래다 지친 션이 마이클을 태우고 능력으로 하늘을 날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어. 아직 어린 애라 그런지 그런 재미난 것 하나만으로 션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나머지 반나절동안은 션에게 찰싹 달라붙어 다녔어. 다음날부터 마이클의 맞춤형 교육을 위한 본격적인 테스트에 들어갔는데 결과를 살펴보던 레이븐이 매우 화를 냈지. 마이클은 조금은 이상하다 싶은 걸 잘 모르고 있었어. 예를 들면 인형을 본적이 없다거나,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다거나. "아니 이 사람들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헬파이어들은 마이클의 교육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이에게 기본적인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채로 학교에 보낸거였음. 행크나 알렉스, 특히 션도 그녀의 분노에 동참했지. 이곳에 온 이상 온 세상의 사랑과 지식을 모두 전해주고 말리라 하는 숭고한 사명이 불타오르는 듯 했음. 아무것도 몰라서인지 아이는 배우는 게 빨랐어. 아직은 글을 읽기 어린 나이라 글 보다는 노래들을 많이 들려주고 알려줬어. 그 짧은 5일동안 스스로 능력도 조절할 줄 알게 되었음. 안정적인 곳에 있으니 아이도 마음이 안정이 된 듯 아무도 가르쳐 준적이 없는데 원거리에서도 능력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능력을 잘만 계발하면 쇼우가 그토록 원하던 강한 뮤턴트가 될 수 있는데 그 멍청한 늙은이는 대체 무슨 실험을 했길래 이 대단한 아이를 쓰레기라 치부한 걸까. 엠마는 그의 사람볼줄 모름에 혀를 찼지. 


"자, 마이클. 내가 하나둘셋 할테니 셋 하는 순간에 능력을 쓰는거야. 알았지?" 아자젤이 마이클을 다독였고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였어. 하나둘 셋 하는 순간에 목에 꼽힌 과도를 뽑았고 여러사람의 비명소리와 피가 공중으로 솟구치는 동시에 마이클이 손을 뻗었어.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진즉에 도망갔을 테지만 마이클은 달라. 떨고는 있지만 한 곳에 가만히 서서 다친 누군가를 위해 능력을 썼어. 에릭은 그 와중에도 마이클을 죽이기 위해 끅끅 숨을 쉬며 엠마의 테이블에 있던 페이퍼나이프를 옮기기 위해 애를 쓰다 아이의 한마디에 나이프를 놓치고 말았어. "얼른.. 나으세요..." 자기도 무서워서 떨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위로하고 있어. 어째선지 에릭에게는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어. 온 몸에 멍이 들도록 때렸던 사람을 걱정하며 나으라고 하는 모습에. 지금 마이클이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지. 시선이 마주친냥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레이븐은 그 모습이 기특해 뒤에서 마이클을 꼭 끌어안아줬어. 이런 착한 아이가 그 잔인한 쇼우의 아들이라니 믿기지 않았지. 오래 걸렸지만 마이클이 능력을 쓸수록 거칠었던 숨소리는 점차 안정되어갔고 피가 나오던 구멍도 메워져갔어. 모든 상처가 메꿔지자 아자젤이 마이클의 두 손을 잡아 내려줬어. "그만. 됐다 마이클. 다 나았어." "다 나았어요?" "그래. 수고했다." 머리를 헤집는 손길에 헤죽 웃고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어. 행크가 사다준 하늘색 곰돌이 잠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음. 이렇게 능력을 많이 오래도록 써본적은 처음인지라 기진맥진 했던거지. 레이븐이 급하게 마이클을 데리고 나갔고, 아자젤은 에릭이 또 날뛸까봐 긴장했어. 하지만 에릭은 행크가 들쳐 업고 의무실로 데려가기 전까지 마이클이 나간 문 쪽을 하염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어. 

레이븐은 땀에 절은 마이클을 수건으로 씻겨주고 잠옷을 갈아입혀 침대에 눕혔어. 자는 얼굴을 한번 쓸어주고 교장실로 돌아가 피에 절은 카펫을 걷어내는걸 도왔음. 정말 징글맞은 집착이야. 어떻게 애 하나 죽이겠다고 자기 목에 칼을 꽂아넣을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해하지 못하는게 정상이기는 하지만. 엠마는 혹시나 소리를 들었을지 모를 아이들을 위해 자비에성을 한바퀴 훑었어. 다행히 깨어난 아이들은 없었음.


에릭은 행크에게 업혀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 의무실 침대에 눕혀졌어. 다 메워졌지만 혹시 모를 세균감염을 위해 상처부위를 소독하고 피를 닦아낸 후 링거를 놔줬어. 피를 많이 쏟아서 약간의 수혈도 필요했음. 링거줄을 조절하던 행크는 흘끗거리며 에릭을 바라봤어. 거진 5년만에 보는건데 그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마치 다른사람 같아. 그때는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혀지지가 않았어. 오히려 살은 더 찐거같은데 얼굴이 푸석하고 전체적으로.. 여튼 이상해. 이 사람이 이렇게 자기 관리에 소홀할 사람이 아닌데. "에릭씨. 저..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행크는 자신의 바보같은 질문에 머리를 쳤고 에릭은 질문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래 솔직히..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무슨일이 안생겼으면 그게 더 이상한거잖아. 나 왜이렇게 바보같지;; 스스로를 자책하는동안 에릭의 눈은 행크를 향해있었고, 눈이 마주친 행크는 놀라 의료도구를 바닥에 떨어뜨렸음. 와장창 소리가 크게 울리자 허둥지둥 도구들을 주워담는데 에릭이 입을 열었어. "마이클?" "에, 에? 아, 그 아이요? 네 마이클이에요." 깜짝이야... 오래간만에 봐놓고 하는 소리가 애 이름 물어보는거라니 너무하잖아. "누가 지어준 이름이지?" "그 글쎄요. 저희는 그저 그쪽 분들이 전해주는 얘기만 들어서요. 그 빨간 아저씨가 지어준게 아닐까요;;" "마이클.." "네, 흔하고 좋은 이름이에요. 그래도 어, 그, 천사의 이름이니까요." "천사?" "네, 대천사장 미카엘이고 히브리어로 ‘하느님과 같은 자는 누군가’ 라는 뜻을 담고 있죠." 그런 옆집에 사는 금발 남자애가 갖고 있을법한 흔해빠진 이름 치고는 굉장한 뜻을 갖고 있었어. "아..미하엘.." "네, 네?" "내 고향에서는 미하엘이라고 불러." "아..네." "미하엘.. 천사.. 하하." 천사같은 존재, 천사같은 아이였던가. 그 아이가 그리 빛이 나던가. 

아자젤이 의무실에 도착했을 땐 에릭은 눈을 감고 감았어. "잠들었나?" "그 그랬나; 잠든것같진 않은데요?" "잠들어 버리면 곤란한데." 그 말에 눈을 반짝 뜨고 아자젤을 바라봤어. 뭔가 할 말이 있는것 같은 눈치였음. "나 오래간만에 내 방에서 자고싶어." "안 자고 있었군. 그런데 네 방?" "그래, 내 방." 이곳은 원래 내가 살던 곳이니까.

행크의 부축을 거부하고 혼자 가겠다 했어. 휘청이며 어두운 복도를 천천히 걸었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져. 이미 머릿속에서 마이클에 대한 생각은 지워졌어. 그는 이 성에 잠시나마 이렇게 돌아온 게 너무도 감격스러워 하며 벽을 하나하나 짚어봤어. 맙소사. 방까지 그대로였어. 마지막으로 이 방에서 잠이 들었던 날, 이제 이곳에 정착하겠다며 사둔 액자 두 개가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어. ‘정착’이란 말을 들은 찰스는 물론 행복해하며 에릭을 두 팔 가득 안고 조금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 방까지 쫒아온 행크와 아자젤은 액자를 쓰다듬고 있는 에릭을 보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걸 조금 머뭇거려. 방 안을 조금 휘휘 둘러보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그들을 슥 지나가 찰스의 방으로 향했어. 비척비척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행크가 따라가려 했지만 아자젤이 혼자있게 놔두는게 좋겠다고 저지하고 돌아갔어. 뭐 하룻밤정도는 괜찮겠지. 쇼우님도 모르실테고.

찰스의 방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어. 레이븐이 버릇처럼 켜놓는 벽난로와 전등들이 주인없는 방의 을씨년스러움을 덜어주고 있었음. 먼지만 살짝 앉아있다 뿐이지 테이블 위의 체스판과 책상위에 놓인 두꺼운 전공서적까지 그대로였어. 너무 그대로라 지난 5년간의 일은 모두 꿈인것 처럼만 느껴졌지. 사실 에릭은 방문을 열자마자 펑펑 울게 될까봐 좀 겁을 먹었는데 오히려 자기 방에 있을 때 보다 차분해졌음. 어째서일까. 찰스 너의 죽음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걸까.


다음날 날이 밝고 아이들이 우루루 뛰는 소리에 아자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어. 아뿔사. 학생들이 움직이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불이 푹신해서 그런가 늦잠을 자버렸어. 옷도 제대로 못입고 머리는 까치집을 하고 나왔는데 마침 레이븐과 마이클이 그 방 앞 복도를 지나가고 있다가 딱 마주쳤음. 레이븐과 눈이 마주친 아자젤은 굳었고 마이클은 머리가 웃기다며 까르르 웃었어. 마이클은 웃고나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는걸 느끼지. 왜 아자젤이 여기 있는걸까? 누가 다쳤길래? 그가 급하게 데려올 사람은 헬파이어들 말고는 없을텐데 아자젤은 허둥지둥 옷만 챙겨들어서 에릭이 잠들어있을 방으로 달려가. 마이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레이븐과 함께 주방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가 깜짝 놀라. 그곳엔 에릭이 있었어.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긴장된 공기가 레이븐에게 훅 끼쳐왔어. 마이클은 뒷걸음을 치다 레이븐이 붙잡을 새도 없이 달아나버렸고 에릭은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음. 어제는 빨리 나으라고 위로까지 해준 주제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에릭으로써는 알 수가 없었지. 심경의 변화는 아니지만 말임. 웃기는 녀석일세. 치료를 해줬다지만 저녀석이 찰스의 성에 있는것도 불쾌하고 방금의 일도 좀 괘씸하니 혼이라도 내줄까 ㅎㅎ 싶은 심정으로 나이프를 집어들어 주방을 나가려 하자 레이븐이 앞을 가로막지.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상관하지마." "나이프 내려놔. 내가 허가 못해! 지금 난 이곳의 주인이고 저 아이의 선생님이야! 당장 내려놔!"

뭐라는걸까. 찰스가 이 곳의 주인이 아니란다. 찰스가, 이곳은 찰스의 것인데. 나이프를 집은 손을 들어올려 방해물-레이븐-을 향해 힘껏 내리치려는 순간 레이븐이 잔상처럼 일렁이기 시작해. 내리찍으려던 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들이 서 있는 주방의 모습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어. 주방이란 공간은 맞지만 그곳에 놓여진 물건이라던가 옛날 복식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음. 눈 앞의 레이븐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낮과 밤이 시시각각 변하자 주방을 나와 복도로 향했어. 방금전까지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흩어지고 메이드 복장을 한 여자가 에릭을 보더니 놀라 들고있던 바구니를 놓치자 다시 주변의 공간이 일렁였어. 에릭이 이곳에 있을거라 생각 못한 마이클이 겁을 먹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능력을, 그야말로 방출하는 바람에 시간에 균열이 생겨버렸어. 에릭이 서 있는 복도는 시시각각 이 성에 살았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 자비에 성의 옛 주인으로 보이는, 초상화에서 보았던 사람들도 종종 나타났음. 그 사람들 사이에서 마이클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다시 도망갔어. 어째서 레이븐같은 다른사람들이 부재한 이 곳에 에릭과 마이클만 있는걸까. 마이클은 에릭이 너무 두려워. 그에 대한 생각이 너무 강해 일그러지는 공간 밖으로 밀어낼 생각을 못했던거임.

여튼 에릭은 열심히 마이클을 쫒았어. 이 기괴한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그 아이를 찾아야 했음.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찰스의 서재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것을 목격했음. 잠궈봤자 에릭 앞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지. 능력으로 문고리를 부수고 서재 안으로 들어갔어. 서재는 빛 하나 보이지 않을정도로 어두웠고 마이클도 보이지 않았음. 마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했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어 발 밑이 존재하는것을 깨닫고 천천히 안으로들어갔음. 어두운 공간이 파르르 떨리는게 느껴져. 그만큼 마이클이 떨고있는 거였는데 에릭은 재밌어 함. 이런 능력을 갖고 있었을 줄이야. 시간만 움직일줄 아는게 아니었어? 키들키들 웃으며 점점 진동이 심해지는쪽으로 다가갔더니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게 느껴져. 손을 내밀어 그 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더니 파득거리며 놀라 웅크림을 풀고 고개를 번쩍 들었어. 에릭과 똑같이 생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겨있음. 에릭은 아이의 멱을 잡아올려 목 옆에 나이프를 들이밀었음. 그러자 어두웠던 공간이 일렁이며 가장 오래된 복식을 한 사람에서부터 이 곳을 사용했던 사람들이 테잎을 감듯이 보여졌음.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에릭은 입술을 훑으며 마이클을 바라봤어. "재밌는걸? 정말 재밌어. 그렇지 미하엘?" "미, 미하엘..이요?" "그래. 미하엘. 네 이름이잖아." 왜 그것도 모르냐는, 친근하지만 채근하는 투로 말했음. 쭈욱 내려간 팔자눈썹에서 기시감이 느껴질 찰나 에릭이 나이프를 아이의 눈 앞에 들이밀었어. 다정하게 웃고있는게 거짓말인듯이. "이제 술래잡기는 끝내자." 마이클이 무서운 나머지 눈을 질끈 감자 그들이 있던 공간에 환하게 밝아졌어. 아이가 놀라는 바람에 일그러지던 시공간이 어느 한 시점에서 멈춰버렸어. 서재는 들어오는 햇살로 따끈했고 귓가에는 새소리가 들려왔어. 고요한 가운데 펜이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다 멈추고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음. 성가신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고 에릭은 숨을 멈췄어.


"맙소사 에릭.. 지금.. 뭐하는 짓이야?"


눈을 크게 뜬 채 놀란 표정을 짓고있는 찰스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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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고 눈을 떴어. 분명 아자젤을 잡고 하소연 한 기억은 있는데 그 앞과 뒤가 통으로 편집된 것처럼 새카매. 내가 왜 울고 있었지? 한참을 머리를 굴려도 기억이 나질 않는 듯 했어. 문을 보기 전 까지는. 아직도 떨어져 있는 한쪽 문을 보자 떠올랐어. 아이의 비명소리와 팔이 아플 때까지 그 아이를 때렸던걸. 왜 때렸더라. 아 그래. 그 아이는 쇼우의 자식이었어. 쇼우의 새끼는 죽어도 싸잖아. 안 그래? 에릭은 키득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어. 마저 죽이러 가야지. 방문을 수리하러 왔던 관리인을 잡아채 웃으며 목을 졸랐어. "꼬마의 방은 어디야?" 관리인은 켁켁거리며 3층에 있는 문 하나 달린 방이라고 말해줬어. 고맙다고 말하고선 관리인을 던져버리고 3층으로 올라갔음. 방문을 열었지만 마이클이 있을 리가 없지. 짐 하나 없이 휑한 방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어. 하하 어디로 숨은 건가. 이번에 찾으면 때리는 걸로 끝내지 않을 거야. 낄낄대며 저택을 휘젓는 에릭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음. 다른 관리인들은 모두 놀라 숨어버렸어. 단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뿐인데 그 살기에 억눌려 두려운 나머지 우는 사람도 있었음. 오래간만의 사냥감이야. 나치사냥을 하던 시절들의 감각이 떠올라. 지금처럼 능력이 크질 못해서 몸으로 직접 뛰어들던 때가 더 많았던 시절들. 아이 하나 죽이는데 능력을 쓸 필요도 없잖아. 한 손으로 발버둥치는 손을 결박하고, 한 손으로 목을 누르면 끝이야. 히틀러에게 충성하던 배나온 아저씨들이 아닌, 아이 특유의 보드랍고 통통한 느낌이 그의 손 아래에 짓눌릴 거야. 부드러운 머릿결과 한 품에 안겨오던, 작은 몸을 가진 그 아이를. 그렇게 마이클의 감촉이 생각났어. 웃음을 멈추고 걸음을 멈췄어. 울던 까만 눈망울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의문으로 가득 찬 그 검고 우울한 눈망울이 아주 익숙해. 에릭은 미간을 찌푸렸어.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다시 마이클의 방으로 달려갔어. 혹시나 사진첩이 있을까 싶어 뒤져보려 했지만 방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어. 신경질적으로 방을 나서려 할 때 책장 밑에 흘리고 간 아이의 사진이 있었음. 주워들어서는 사진속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 이상해. 이 애는 쇼우의 아들이야. 그를 닮아야 하는데 왜 나를 닮은 거지? 우리 엄마를 죽이고, 찰스를 죽이고, 내 아이들을 죽인 슈미트 박사의 새끼잖아. 그런데 왜? 사진속의 아이는 에릭을 닮았어. 그것도 아주 많이. 왜 이걸 몰랐을까. 말도 안돼. 이 아이는 날 닮아선 안 돼. 불안한 듯 눈을 굴리던 에릭은 손안의 사진을 구겨 쥔 채 헬파이어클럽을 찾았어. 안 돼. 안 돼.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저택 안을 뛰어다니다 밖으로 나왔어. 푸른 풀밭과 저택 주변을 감싸 안은 숲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푸른 정원에서 주변을 샅샅이 훑어봐도 아무도 없어. 전 지구에 저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고독감에 떨면서 귀를 틀어막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해. 헬파이어들이 저택에 당도하자마자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와. “왜 그래 매그니토! 무슨 일이야!” “그 꼬마 어디 있어?” “그 애는 왜 찾아?” “나 물어볼게 있어. 그 애를 낳은 사람이 누군지 물어봐야 돼.” “뭐...?” “이상해. 이상하단말야. 이걸 봐.” 에릭은 떨리는 손으로 꼬깃하게 구겨진 사진을 펴서 립타이드에게 내밀어. 방금 전까지 에릭이 보고 있던 마이클의 사진이야. “이거 왜 나랑 닮았어? 쇼우의 아들이잖아. 왜 나를 닮았냐고!” “무, 무슨.. 진정해. 일단 들어가자.” “나, 나한테 이상한 기억이 있어. 내가 말야, 꼭 그 영감의 아이를 가졌던 것 같은 기억이. 이상하지 않아?” “에릭 제발..” “꼭 내가! 내가 이걸 낳은 것 같잖아!!” 에릭은 마이클을 낳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었어. 누가 봐도 없을 수 없는 일인데 너무나 당연하게 없는 일로 치부하고 있었어. 에릭에겐 마이클이란 아이의 존재가 있어서는 안 돼. 찰스의 아이는 자기 탓으로-정말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음-다 죽여 놓은 주제에 쇼우의 아이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현실이야. “일단은 진정하고.. 진정해.” 아자젤은 몸도 못 가누는 에릭을 데리고 그의 방으로 텔레포트를 해. 침대 위로 던져놓고 진정제를 놓아 강제로 재워버림. 에릭은 가물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아자젤을 봐. 점점 약기운이 도는지 눈물로 벌겋게 부은 눈이 풀려감. “한숨 자.” “나.. 일어난 지 얼마 안됐는데..” “...그래도 자. 더 자둬.” “그런데.. 아자젤.” “응.” “그 애가 불쌍해...” 그러고선 잠에 빠져들었음. 고른 숨을 쉬는 모습을 보며 아자젤은 벽을 주먹으로 내려쳤어. 제정신이 아니니 아주 오락가락하지? 엊그저껜 죽여야된다 난리를 치더니 오늘은 불쌍하다고? 미친놈이야. 이 녀석은 진짜 미쳤다고.


에릭? 에릭 일어나봐. “음..” “에릭.” 부드러운 목소리에 눈을 떴어. 방안의 모든 커튼을 다 걷어 놔 눈이 부실정도로 환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남자는 빛에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어. 아. 꿈이로구나. “찰스.” “이제 일어났어?” 찰스가 웃고 있어. 그런데 그 얼굴이 흐릿해. 사진 한 장 가지지 못한 채로 5년이 흘렀어. 이상하도록 목소리는 선명한데 얼굴이 기억나질 않아. 꿈속인데도. 찰스는 당황하는 에릭의 두 손을 꼭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에릭의 혼란을 달래주듯 머리를 쓰다듬어줌. “..널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냐.” “알아.” “보고 싶어” 가만히 손을 뻗어 찰스의 얼굴을 더듬어봤어. 이 감촉은 맞아. 너무나 사랑하는 그가 맞는데 얼굴이 보이지가 않아. 보고 싶어.. 눈물이 차올라서 슬쩍 눈을 감았다 떴음. 눈앞의 찰스는 사라지고 익숙한 천장만이 보였어. 찰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던 손을 쥐었다 폈어. 꿈이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한 잔인한 꿈이었음. 찰스가 죽었는데 나는 왜 살아있는 걸까. 심장이 조각나는 것 같이 아파서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 빨리 이 고통을 가라앉혀야 해. 쇼우를, 그의 자식을 죽이면 괜찮아질 거야. 그 자식 앞에서 아들을 죽인 다음 네놈을 고통스럽게 죽여 줄 테다. 하지만 마이클은 이미 자비에 스쿨로 떠난 지 닷새가 되었어. 에릭은 그 말을 전해준 관리인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 그 꼬마를 어디로 보냈다고? 쇼우의 피를 이어받은 놈이 자비에 스쿨에 있을 수는 없어. 그렇게 되면 그곳이 더러워지니까. 당장 아자젤을 찾아가 스쿨로 텔레포트 하라고 으르렁거렸지. 아자젤은 입이 싼 그 관리인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다짐했음. 이미 죽었지만. 아자젤은 그럴수 없다며 끝까지 버텼고 에릭은 데려가 달라고 계속 실랑이를 벌였음. 한참을 싸우다 에릭이 소리를 지르는 것을 신호로 저택안의 온 철제물건들이 날아와 그들의 주위를 감쌌어. 광기로 눈을 번뜩이며 칼 같은 날카로운 물건들을 움직여 아자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음. 아자젤은 공중의 칼날들을 훑어보며 피식 웃었어. “제정신이 아닌 널 죽여 봤자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건 나뿐이지. 마이클이 그리 보고 싶으면 스스로의 목이라도 따는게 어때? 죽은 채로는 데려다 줄 수 있는데 말야.” 에이 설마 진짜 하겠어 꺼져 병진아^^ 라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그걸 실행에 옮기려는 행동에 질겁해 그의 목으로 날아가는 칼을 꼬리로 잡아챘어.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지 샐샐 웃고만 있는 모습에 눈에 불꽃이 튀어 눕혀놓고 마구 때렸어. 

이제는 지난 1년간 아무 일 없이 잘 지낸 게 신기할 정도야. 간절하게 원했던 아이를 잔인한 방법으로 잃고 나서도 씩씩하게 일을 했고 웃고 다녔던 게 오히려 미쳐보였어. 속으로 얼마나 눌러 담고 있었을지 상상도 안가. 그랬던 것이 마이클의 존재를 인지하면서부터 둑이 터진 것처럼 밀려나와 단숨에 에릭을 망가뜨렸어. 차라리 되도 않는 농담을 하면서 웃던 때가 나아. 맞아서 얌전해진 에릭의 멱살을 잡고 체념한 듯 말했어. “네 소원대로 데려다 줄게. 하지만 내 능력 말고, 정식으로 방문요청을 한 후에 데려다줄거다. 그리고 마이클은 손대지 마.” “싫다.” “말 들어.” 단호한 말투에 인상을 쓰며 바라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멈칫하고는 샐쭉 웃었어. “아자젤. 뒤를 봐.” 아차. 아직 쇠붙이들이 주변에 떠있던걸 잊고 있었어. 혹시 나를 공격할 셈인가? 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자신에게 깔린 에릭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왔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과도 하나가 에릭의 목을 깊게 찌르고 있었음. 피가 목을 타고 바닥을 적셔가. “이런 머저리 같은..!” 과출혈이 우려돼 함부로 뽑아낼 수도 없는 부위였어. “이러면.. 안 데려갈 수 없지?” 그래도 뚫린 입이라고 웃으며 지껄이고 있어. 낭패야. 이대로 가 마이클의 능력으로 상처를 치료받은 후에 그 자리에서 아이를 죽일 가능성도 없지 않아. 하지만 이내 몸을 바르르 떨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지라 다른 생각을 할 여력도 없이 곧바로 자비에스쿨로 가. 단번에 교장실로 텔레포트한 아자젤은 너무나 놀라 멀뚱한 채로 앉아있는 엠마에게 마이클을 데려오라고 소리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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