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호가 자처해서 건물에 남겠다고 했고 형배나 창우들은 행동에 들어갔음. 경찰이건 형배들이건 판호가 미리 뿌려놓은 떡밥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서로가 뒤엉켜 싸우던 도중 판호가 형배를 찾는다는 전갈이 들어왔음. 본진이 위험하니 좀 도와달라고. 형배는 일부러 곧바로 가지 않았음. 눈앞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라도. 경찰들 틈을 빠져나와 창우와 둘이 본 건물로 향했음. 낌새를 눈치 채고 가지 말라고 말리는 창우를 무시하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음. 올라가는 내내 건물 안은 너무 조용했고 캄캄했음. 판호가 어떤 의도로 불렀는지는 오늘 일로 명백히 알았어. 배신. 형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꼭대기에 있는 작은형님의 방문을 열었음. 시큼한 비린내가 진동했고 불을 켜자 핏물이 흥건히 고인 의자에 작은형님이 시체가 되어 앉아있었음. 누가 봐도 판호의 짓이야. 형배는 자신의 경솔함에 혀를 찼지. 좀 더 주의 깊게 지켜봤어야 되는데, 안일하게 생각해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음. 형배는 창우에게 뒷수습을 맡기고 판호를 찾으러 나감. 열대야로 누구하나 쉽게 잠들지 못하는 더운 여름밤. 형배는 골목길 가로등 불빛을 눈에 담으며 미친 듯이 뛰어. 이미 땀은 온 몸을 적시고 맞아서 흐르는 피와 함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음. 판호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뛰었어.
“김판호 이 시발년아 어데 숨었노! 퍼뜩 안 쳐나오나!”
너무 더워 몸에서 수증기가 증발하는 느낌도 들면서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르게 뛰면서 온 혈관에 피가 빠르게 도는 걸 느낌. 꼭 약 먹은 사람처럼 눈앞이 뱅글 도는데도 미친 듯이 온 부산바닥을 헤집고 다녔음. 그런데 김판호는 없어. 마지막으로 아직 뒤져보지 않은 해운대 뒷골목 길로 들어섰어. 아니나 다를까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옴. 판호가 기분 좋으면 부르던 노랫소리. 소리를 따라 걷다가 멈췄음. 판호는 막다른 곳 앞에 쭈그리고 앉아 노래를 부르다 형배를 보고는 웃었음.
“이제 왔나? 내 너 기다리다 더워 디지는 줄 알았다.”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다가오는데 가로등에 비춰진 판호는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음. 살이 쪄 보통 사람보다 땀을 배로 흘리는 채로. 형배는 이미 작은형님과의 사정을 알고 있지만 한번 물어보기로 했어.
“작은행님.. 니가 그랬나?”
“알면서 묻나?”
“와 그랬노?”
“그것도 알면서 묻나?”
“니가 지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판호는 그 말에 활짝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음.
“우예 알았노? 자. 직이봐라. 얼른. 품안에서 사시미 꺼내가 여 배때기 좀 푹푹 찔러봐라. 내 지금 죽고 싶어 환장했다. 빨리 죽여봐라!”
판호가 달려들었고 형배가 달려들었음. 두 사람은 뒤엉켜 개처럼 싸워댐. 팔다리가 길고 힘이 좋은 판호가 우세였다 점차 뒷심이 센 형배가 일방적으로 판호를 엎어놓고 패기 시작함.
“야 이 씨발년아! 니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아무리 죽일 정도로 미워도 저래 사람을 회 떠놓는 게 어데 있드노! 니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판호는 두 눈이 시뻘게진 채로 악을 질러댐.
“니가 내 맴을 우예 안다꼬 주뎅일 씨부리노! 니는 내한테 그럼 안 되는 거 아니가? 내가 와 이 지랄이 됐는데! 내라고 좋아서 이라는 줄 아나! 눈만 감으면 뱃속이 꿈틀댄다. 죽은 아가 망령이 되가 내를 이래 괴롭혀대는데 내가 제정신이길 바라는 기가?”
“...”
“그라니까는 내 좀 죽여도 행배야. 퍼뜩 내 좀 죽여도..”
형배가 눈물에 넘어가 어쩌지를 못하고 있는 사이에 판호는 품에서 칼을 꺼내 형배를 찌르려고 덤벼듬. 형배는 아차 하는 사이에 팔뚝이 베였고 판호를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듬. 화가 나 칼을 목에다 내리찍으려다 좋다는 듯이 웃고 있는 면상을 보니 찌르기가 싫어졌음. 그대로 방향을 바꿔 왼쪽 얼굴에 칼날을 박아 넣고 천천히 그으면서 비명 지르는 판호의 귓가 너머로 나직이 속삭여줬음.
“이런 개 같은 년이 있나. 내가 그동안 니 아 뱄었던 거 생각해서 오냐오냐 해줬더니만 이래 기어오르나? 내는 니를 절대 안 죽일끼다. 내 머할라꼬 니 좋은일 시키노? 즐대 그럴 일 없을기다. 대신 이 얼굴의 흉 보면서 내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라. 알긋제?”
판호는 얼굴을 부여잡고 형배를 노려봤음.
“내를 직이라꼬! 최행배!”
형배는 판호를 두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감. 본진으로 돌아가니 창우들이 떡이 된 작은형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피 웅덩이를 치우고 있음. 창우가 형배의 팔에 난 상처를 보고 놀람. 판호 찾으러 간다더니 상처를 달고 와서.
“..행님. 판호 행님은예?”
형배는 애들한테 이제 김판호는 남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어서 뒷수습이나 하라 함. 내가 처리했으니 건들지 말라고. 그리고 얼마안가 형배는 패싸움 건을 빌미로 잡혀 들어감. 판호는 살인죄가 적용돼서 큰 형을 받을 뻔 했지만 정신 상태를 참작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음. 형배가 들어가 있는 동안 판호는 힘을 키워 본 조직의 구역을 야금야금 먹어감. 큰형님은 뒷방 노인네나 다름없었고 실질적 보스인 작은형님은 죽었고. 그 다음인 형배는 옥살이를 하고 있고. 형배는 옥 안에서 창우를 통해 이런 이야기들을 다 듣고는 입술을 깨물었음. 조직이 거의 와해되어 간다고 했음. 김판호 이 정신 나간 새끼를 왜 살려뒀을까. 나가자마자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함.
일년 조금 넘게 살다 나왔는데 판호는 그새 부산바닥에서 유명한 놈이 되어있었음. 게다가 지도 꼴에 사내라고 옆에 여자하나를 턱 끼고 있는데 아주 같잖아 보여. 형배는 판호를 짓누르는 것 보다 우선 조직을 정비해야 했음. 그나마 창우가 뒷정리를 해놔서 일은 수월했음. 김판호가 기집아랑 사랑놀음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구역을 재정비 하고 슬슬 힘을 키웠음.
판호는 형배가 나왔단 소리를 들었음. 어찌 할 거냐는 동생의 물음에 그냥 가만히 놔둬보라고 지시했고 형배는 그 기대에 부흥해 열심히 커갔지. 이제는 직접적으로 판호네와 비등해졌음. 지켜보고 있던 여사장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지.
니 점마 이대로 놔둬도 괘안나?“
“괘안소 누나. 내 김판호다.”
판호는 그제야 활동을 재개해. 그리고 한 구역을 두고 두 조직이 충돌을 했음. 판호는 멀찍이 서서 형배를 지켜봤음. 꼴에 나이 좀 들어서 콧수염까지 길렀다고 누나 저것좀 보라고 웃었음. 형배는 매우 불쾌했지. 저년이 지 주제도 모르고 딴 년 앞에서 헤실 거려. 씹던 담배필터를 바닥에 뱉어버리고 철수하자며 돌아갔음. 이전까지 판호를 향해 부글대던 마음은 이제 아주 들끓고 있음. 하루 종일 다른 여자 앞에서 웃고 있던 모습만 떠올라. 그럴 때면 손에 닿는 대로 집어던졌음. 이전 같은 달큼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얼른 잡아다가 조져버려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함. 형배는 일단 판호를 먹으려면 힘을 더 키워야함을 느꼈음. 그래서 손을 더 벌려 야쿠자와 연을 맺음. 야쿠자와 거래를 튼 형배는 날로 자본이 늘어서 부산바닥에서 거의 돈으로 원톱이 되어가고 있었음. 판호는 그걸 보면서 자기자리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기보단 재밌어했음. 불안해하는 건 여사장 몫.
“봐라 누나야. 행배가 내 쫒아온다.”
“니는 이게 재밌나? 이 정신 나간 새끼야.”
여사장은 형배가 바로 앞까지 치고 들어와 숨통이 막힘.
“내가 니를 어떻게 사람 맹그러 놨는데. 또 망가지고 싶나?”
“망가지긴 누가 망가진다 그라노? 내는 멀쩡하다.”
여사장이랑 판호가 만 난건 그때. 판호가 형배를 배신하고 바닥에 피 흘리며 구르고 있을 때. 높으신 분의 사생아였던,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거친 남자들 틈에서 자라온 걸걸한 아가씨가 봤던 온몸에 피칠갑 한 남자. 혼이 빠진 것 같은 판호를 주워왔던 더운 여름밤. 이젠 거의 10년 전 일인데 여사장은 한 톨도 잊혀지지 않아. 판호는 형배를 죽이지 못했고, 사랑하는 아기는 죽었는데 자기는 살아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마음을 닫아버려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었음. 어린 여사장은 그런 판호가 가여웠어. 데려와서 치료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 줬음. 그때의 판호는 누가 봐도 매우 뚱뚱했지만 생긴 게 나쁜 편은 아니라서 꽤 맘에 들었어. 그래서 한번 품어보려 했다가 아랫배를 쥐어뜯으며 뒹구는 걸 봤음. 남자구실도 못해먹어서 이걸 해결해주느라 아주 힘들었어. 그나마 정상적으로 남자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되었음. 앞으로는 이제 멀쩡히 구실을 잘 함. 물론 그 사실을 알자마자 먹은 건 여사장. 여사장은 판호를 좀 좋아했음. 그러다 곧 정신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고 바로 포기했지. 지금은 그냥 누나동생 하는 사이. 하지만 판호가 이렇게까지 부산을 쥐어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여사장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 판호는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땐 말을 좀 나긋하게 할 줄 아는 그야말로 부산깡패였음. 여사장과 둘이 있을 땐 어리광이 엄청나고. 여사장은 이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는데 저놈의 최형배가 하나둘 침범해오고 있어. 게다가 형배는 판호가 형배네 전 보스를 죽이고 나온 전적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판호를 데려가 죽사발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음. 여사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과 판호를 지키고 싶어.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추측할 뿐이었음. 분위기가 좋지 않아 형배네도 판호네도 몸을 사리고 있던 가을밤에 형배가 혼자 판호네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음.
판호네 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집 앞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음. 판호는 일이 끝나고 여사장이랑 쇼핑을 하고 오느라 양 손에 쇼핑백 한가득. 무겁다며 투덜대는 판호와 남자가 그것도 못 드냐며 놀리는 여사장이 집 앞까지 왔는데 자기들을 무섭게 노려보는 형배가 보여. 여사장은 찔끔했는데 판호는 반갑다고 다가감.
"행배 니 윽수로 오랜만이대! 이기 얼마만이고?"
깨방정을 떨면서 다가오는 판호에 형배는 매우 어처구니가 없음.
"반갑나? 정신 나간 새끼. 그래 우리가 만난 지 좀 됐지. 근데 니 도로 뚱띠 된거 같다."
하면서 배를 바라봄. 판호는 씩씩대면서 누나는 그 녀석들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라 함. 여사장이 말리지만 막무가내. 사위가 고요해지고 판호랑 형배만 남았음.
"그래. 내 뚱띠 됐다. 보태준거 있나?"
"니 뱃살은 보태줬지. 판호야. 내 밑에서 울던 년이 사내랍시고 딴 년이랑 붙어먹으니 좋드나?"
판호는 여전히 웃고 있는데 묘하게 표정이 일그러짐.
"와? 내는 딴 년이랑 붙어 먹으믄 안되나?"
"안된다기보다는.. 니가 어떤 년인지 알믄 그년이 실망할거아이가? 응? 서방 밑에서 좋다고 울던 게. 내 새끼까지 뱄던 년이 누구 서방질이나 하고 다니고. 그년은 좋겠네. 자기 대신 아 낳아줄 서방도 데리고 있고."
형배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눈에 불이 붙은 판호가 형배의 멱살을 틀어쥠. 안 그래도 키가 크고 힘이 좋아 형배를 들어 올려 벽에 박아버림. 어두운 가로등 사이로 핏발이 선 판호의 눈은 눈물이 고여서 반짝거리는데 형배는 손을 들어 그 눈을 만져보고 싶었음. 무심결에 손을 들어 만져보려는데 판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더니 이를 드러내서 물어버림. 뜯어낼 기세로 물어뜯어서 형배는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고 안에서 지켜보던 여사장 밑 기타등등이 튀어나와 두 사람을 간신히 떼놓음. 판호네 녀석들이 피가 철철 흐르는 형배의 목을 지혈시켰고 판호는 낄낄대면서 웃는데 얼굴은 눈물범벅임. 형배는 그걸 보고 소름이 돋아서 굳어있는데 화가 난 여사장이 형배에게 소리를 지름.
"시발놈아! 니 야한테 머라 캤는데 이 모양이고!"
"니 년은 알거 없다."
형배는 자기들의 일에 여사장이 끼어든 게 매우 못마땅함. 여사장은 화가 났지만 일단은 판호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음. 인제 막 덜덜 떨기 시작하는 애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꽉 끌어안고 다독여줬음. 한품에 다 들어오지 않는 큰 덩치지만 온몸으로 끌어안고 떨림이 멈출 때까지 속삭여줬음.
"니 괜찮다. 괜찮다. 니는 잘못된 거 하나도 없으니까는 울지 마라. 저딴 새끼 말 듣지 마라."
형배는 판호 옆에 있던 년 때문에 아주 기분이 상했음. 창우가 목에 웬 상처냐고 난리를 쳤지만 무시하고 집으로 갔음. 형배는 목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판호를 곱씹었음. 솔직히 형배도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음. 판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도 다 알고 있고 왜 판호가 정신이 나갔는지 그 이유도 알고 있기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는데, 곁에 있는 여사장을 보고 오기가 생겨서 그렇게 말했던 거임. 벌개져서 그렁그렁하던 눈이 생각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음. 하지만 아련한 마음은 거기까지. 어쨌던지간에 판호는 조직을 무너뜨릴 뻔 한 놈임. 명분은 그것으로도 충분했고 진작 쳤어도 되는 거지만 그냥 무작정 힘을 불렸어. 불리고 불려 이제는 판호네 보다 힘이 세졌음. 그리고 한 조직의 두목이 다른 조직의 두목에게 목을 물어 뜯겼다는 게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명분을 주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