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판호는 안정을 찾았고 여사장에게 덜 기대게 됨. 정신적으로 삼십대 초반의 평범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는거. 여사장은 내심 섭섭해 했지만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기뻐했음.

“판호야. 인자 누나 가슴 안만지나?”

“미칬나? 내를 변태로 만들라꼬.”

이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음. 2년 가까이. 그동안 형배와 판호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음. 옛날처럼 살짜쿵 어리광도 부리고. 밤일도 하고. 사과하고 처음 밤일 치룰 때 고생을 함. 여전히 두려워하며 우는 판호를 어르고 달래느라고.

퇴원하고 나서도 한동안 형배네 있으면서 몸을 추슬렀고 어느 정도 지나자 다시 독립을 하게 되었음.

“니 내랑 같이 살자.”

“싫다. 부부도 아니고 남사시럽구로.”

여사장은 뒷 세계에서 발을 떼고 슬 시집이나 갈까 생각중. 형배는 자기가 잠깐 맡고 있던 판호네 애들을 돌려주고 내보냄. 두 사람은 얼마간 그냥 그렇게 투닥거리며 살고 있었는데 판호가 형배 애를 덜컥 가져버림. 판호는 기쁘기도 했는데 걱정도 됨. 형배에겐 일단 말하지 않기로 하고 애한테 해가 될까봐 병원 약부터 끊음. 형배는 판호가 근래 들어 평소답지 않게 좀 차분해졌단 느낌이 듬. 다리도 꼬지 않고 편하게 앉아있는걸 보고 위화감이 들어 슬쩍 떠봤음.

“니 문일 있나?”

“내? 아, 아무 일 없다.”

뭔가 숨기는 느낌임. 근데 말을 안하니 어째. 별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감. 근데 문제는 병원 약을 끊으니 슬슬 판호가 다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하려함. 밑의 동생들은 형님 애는 포기하고 약 챙겨 드셔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음. 결국에는 형배가 애를 떼러 올 거라면서 난리를 치다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춤. 동생놈들은 판호의 임신 소식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을 형배에게 알림.

형배는 난리가 났음. 제정신도 아닌 사람이 연락도 없이 어디로 갔단 말이야. 혹시 여사장에게 가봤지만 오지 않았다고. 미치고 팔짝 뜀. 어딜 뒤져도 나오질 않음. 그때 판호는 여사장 집에 숨어있었음.

“누나야 행배가 내더러 아 띠란다. 또 띠란다 내 한테 으찌 이랄 수 있노?”

“아이다. 최사장은 그런 말 한적 없다. 최사장은 아를 놓길 원한다. 판호야. 행배한테 돌아가라. 응?”

“안 된다 누나야. 내 좀 숨겨도. 행배 안보이게 좀.”

여사장은 판호를 세달 가량 데리고 있었음. 판호는 이제는 여사장도 믿지 못해. 약을 먹다가 안먹으니 증세는 더 심해졌음.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러다 반짝 정신이 돌아오면 여사장 품에 안겨서 잠을 잠. 산달이 가까워올 무렵이 되지 판호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멀쩡히 행동함. 여사장은 미심쩍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판호가 형배에게 돌아가겠다고 함.

“행배한테 돌아간다꼬?”

“응. 그래도 아 낳을 땐 애 아부지도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라믄 최사장 불러주께.”

판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쇼파에 얌전히 앉아있었음. 여사장은 형배에게 연락을 함. 그간 내가 데리고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속여서 미안하다고. 판호가 그간 너를 많이 기피했던 거니까 이해해 달라 하면서 사정을 말하고 데리러 오라고 얘기함. 전화를 끊고 판호가 앉아있던 쇼파로 갔는데 판호 없어. 으아니 이놈이 어디 갔냐면서 온 집안을 다 뒤지는데 없어. 현관을 보니까 열려있어. 형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잠깐 돌아왔던 정신이 다시 가출해서 판호를 밖으로 이끌었음. 신발도 대충 구겨 신고 밖으로 휘적휘적 나와서 정처 없이 걸었음. 형배는 얼마 전까지 멀쩡하게 만나던 판호가 임신한 채로 사라졌단 얘기를 듣고 어이가 없음. 그 원인이 자기라는 것도.

“니 방금 머라캤노? 판호가 임신했다꼬?”

“미리 알려드리지 못해 지송함더. 약 끊으신 후부터는 형배행님 이름만 나와도 막 경기를 해가..”

그 중요한 걸 왜 말하지 않고 혼자 떠안으려는지 너무 화가 났음. 그 말을 전해주는 녀석을 대신 팰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격한 분노는 심한 걱정이 되었음.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판호와 재결합(?)하고 나서 병원비며 뭐며 들어갈 돈이 많아서 사업도 많이 벌려놓았고 관리하려면 꽤나 공을 들여야 하는데 이 모든 게 전혀 잡히질 않아. 눈앞이 캄캄해졌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니들이 알아서 찾아오라 큰소리는 쳤지만 눈앞에 결재 서류에 싸인도 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함. 어딜 간거지. 홀몸도 아닌데 어디 추운 곳에 있기라도 하면. 혹 다른 구역으로 잘못 들어가 나쁜 짓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펜을 입에 물고 잘근거리며 씹다가 책상위로 떨어뜨리고는 창우를 불렀음.

“창우야. 내 으짜면 좋노?”

창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판호한테 내는 여전히 죽일 놈 씨벌 놈인갑다. 판호 금마는 대체.. 와 아직도 내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데? 아 지우라 캤던게 내 의지가? 씨발년이.. 병원에 데려가 고쳐줘도 저 지랄이가..”

형배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음.

“창우야 판호 좀 찾아주라. 내 진짜 아무것도 몬 하겠다.”

최형배가 울먹이는 소리로 부탁을 하다니. 창우는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는 형배의 어깨가 유달리 힘이 없어 보여 안아서 토닥여주고 싶을 지경임.

“걱정 마이소. 꼭 찾아 드리겠십니더.”

하지만 여사장에게서 판호 여기 있다며 연락이 올 때까지 털끝도 찾지 못했음. 연락을 받은 직 후 형배는 안도와 걱정과 화남의 감정이 뒤섞였음. 다리까지 풀려서 주저앉았어.

“김판호 이 좆같은 년 몸만 풀어봐라. 직여 버릴테니까.”

차를 끌고 여사장의 집으로 갔는데 집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아무도 없음. 불길함에 집을 다 뒤집어 보려던 때에 여사장이 헐레벌떡 들어옴.

“판호.. 최사장 니 오는 길에 판호 못 봤나? 판호..멀쩡했는데.. 니 온단 소리 듣고 나갔는갑다.. 으짜노 판호 지금 배가 남산만해가 어데 막 돌아댕기믄 안되는데.”

여사장은 주저앉아 울었고 형배는 멍해짐. 뭐지. 뭘까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 판호 말대로 그때 죽였던 아이가 원혼이 되어 자꾸만 들어붙어 이리되는 걸까.

판호는 걸어걸어 인적이 드문 어느 산골로 들어갔음. 얼마 안 있으면 예정일이라 그런지 몸이 무거웠고 숨쉬기가 힘들어. 그래도 이 애를 살리려면 형배에게서 멀어져야 돼. 형배는 형배 나름으로 필사적으로 판호를 찾음. 얼마 있지 않아 판호를 봤다는 사람을 만났어. 저기 산 쪽으로 들어갔다고. 형배는 듣자마자 욕지거리를 하면서 산으로 뛰어갔음.

“판호야! 김판호!”

형배는 산속으로 판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 들어갔어. 힘들어서 쪼그리고 앉아있던 판호는 형배의 목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뛰었음. 꺾어 신었던 신발이 벗겨졌고 발에 상처가 나도 달렸음.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숨을 헐떡이면서 숲을 헤치고. 형배는 위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나무들을 헤치며 달려감.

“판호야. 멈춰라마! 판호야!”

판호는 뛰다가 너무 힘들어 주저앉았음. 몸이 너무 무거워서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형배가 다가와. 판호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며 저리 가라고 팔을 휘둘렀음.

“안 된다! 이 아 만큼은 안 된다 행배야 살려주라 제발.. 내 이래 빈다. 응?”

하얗게 질려서 떠는 꼴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 죽겠어.

“내가 아를 와 죽이냐꼬!! 내는 우리 아 안 직인다 판호야. 안 직인다꼬. 내도 아빠 되는 거 좋다. 그때일은 내가 잘못했다. 백번천번 잘못했다. 그라니까 이리 내려와라. 판호야 쫌! 니 안 내려오믄 니도 아도 다 죽는다!”

판호는 형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형배가 점점 다가올수록 다가오지 말라면서 거품을 물고 몸을 뒤트는데 형배가 놀라 판호의 몸을 못 뒤틀게 꽉 끌어안고 데리고 내려옴. 서둘러 차에 태우고는 인근 병원으로 달렸어. 못 본 새에 커진 배며 젖이 올라 몽글해진 가슴을 감상할 새가 없었음. 온몸에 나 있는 긁힌 상처들에 가슴이 아려서 목이 메어왔음. 병원 간판이 보이자 더더욱 뒤채며 울부짖기 시작했어. 안 된다 우리 아 직이믄 내도 죽는다 안 된다고 쉰 목으로 소리를 질러대서 병원은 문턱도 밟아보자 못하고 판호네 집으로 실어갔음. 판호는 익숙한 자기 집이라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음. 형배는 물러났고 여사장을 불렀어. 형배의 보살핌은 거부하니까. 여사장이 올 동안 창우가 데리고 있었는데 힘들어서 침대에 축 늘어진 채로 창우를 이리저리 살펴봄.

“니 누고?”

창우는 잠깐 움찔했지만 다시 열심히 상처에 약을 발라줌.

“행님 지 몬 알아 보십니꺼? 지 창웁니더.”

창우는 갸웃거리는 판호에 내심 서운했음. 그래도 예전엔 한솥밥을 먹었고 판호가 잘 챙겨주기도 했는데. 창우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예전, 조직생활이 생경해서 많이 버벅이던 창우를 웃으면서 많이 챙겨주곤 했음. 창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도 별로 관심 없는 쑥맥이었던지라 막연히 판호가 자기 인생의 첫사랑이라고 여기고 있었음. 그러다 형배와 키스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고 마음을 완전히 접었던 거. 지금은 그다지 미련도 없이 여자랑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판호가 자기를 모를 리 없고 지금 왜 몰라보는지 알고 있는데 너무 섭섭한 거.

“행님. 참말로 느무하시네예. 행님 안 계실동안 이 집도 지가 다 싹 치우고 그랬는데.”

창우가 툴툴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판호는 슬슬 잠이 들었음. 여사장이 도착하고 엉망이 된 판호의 꼴을 보면서 너무 속상해 했음. 형배는 잠든 판호를 보는 것을 끝으로 판호가 출산 할 때까지 일체 접근을 하지 않았음. 찾았으니 됐어. 돌봐줄 사람도 있고 애도 무사히 낳았으니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 싶음. 형배도 지쳤어. 판호가 사라졌던 몇 달 동안에도 감정소모를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판호가 자기를 계속 거부하는 것도 힘들고. 솔직히 이제 괜찮을 거라 믿었어. 판호를 괴롭혔던 원인중 하나를 찾아서 사과도 시켰고 병원에서 치료도 받게 했는데, 그놈의 약 좀 안 먹었다고 말짱 도루묵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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