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딸이었어. 판호는 마음이 안정되자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형배는 떠나고 없었지. 아이를 낳으려 진통을 하면서 계속 형배를 찾았지만 오지 않았음. 그나마 창우가 아이의 얼굴을 보러 와주지 않았으면 서러울 뻔했음. 그렇게 원했던 아이였고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음. 판호는 아이를 안고 울었어. 형배를 이해해.
“창우야. 행배테.. 아 이름 좀 받아온나.”
형배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창우가 그 부탁을 잊을 무렵에 이름을 건넸음.
“혜민이라 캐라. 슬기로울 혜. 하늘 민. 우리 충렬공파 40대손인기라.”
판호는 한자로 애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네받았음.
“혜민이라 캅니더. 출생신고 하시믄 호적에 올리시겠답니더.”
창우는 판호가 아무 말 없이 쪽지를 보고 있는 걸 지켜봤음. 그러다 이내 애가 울자 판호가 좀 당황하면서 창우를 쳐다봄.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 창우는 목례를 하고 나온 후에 창문을 통해 살짝 안을 쳐다봤음. 판호가 아기를 어르며 가슴팍을 젖힌 채 젖을 먹이고 있음. 문신도 하지 않아서 뽀얀 가슴에 아기가 입을 묻고 오물거림. 창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는데 곧 자기 행동을 타박하며 돌아감.
형배는 아이를 호적에 올려두고 창우가 갖고 온 사진을 받아들었음. 아이 사진.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때 찍은, 아직 사람 같지도 않은 모습. 혼자 집에 있을 때 술을 마시면서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음. 이게 뭐라고. 이 사람 같지도 않은 게 뭐라고. 이 아기란 것 때문에 자신과 판호는 이 오랜 시간동안 상처가 아물지를 못해서 겉도는 건지 모르겠어.
아이를 낳았다고 별로 달라진 것도 없었음. 단지 판호가 다행스럽게 정신이 돌아와서 이제 약을 꼬박 먹는다는 것 정도. 판호는 아이를 낳고서 얼마간은 쓸쓸해했음. 뭔가 허전하기도 했고 형배도 곁에 없고. 여사장이 계속 붙어 있어줘서 고맙기도 했지만 허전함은 가시질 않았음.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않은 게 애가 두 시간에 한번 씩 젖을 달라고 울어 제끼니 쉴 수가 있어야지. 여사장은 판호가 애 젖 물리다 말고 쇼파에 기대서 기절해버린 걸 보면서 혀를 쯧쯧 차. 그리고 애를 안아들어 침대에 누였음.
“편히 자라. 이기 머꼬. 쇼파에 고꾸라져서는.”
그렇게 좀 자는가 싶더니 애가 또 울어. 판호는 재깍 일어나서 젖을 물리는데 눈도 못 뜨고 졸고 있어. 여사장은 한숨을 쉬며 방을 나갔음.
그래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혜민이는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랐음. 판호는 이제는 아주 혜민이라면 껌뻑 죽어. 인제 두 달 밖에 안 된 애가 눈웃음 살살 치는 거 보면서 판호는 설레발을 침.
“누나야 이 봐라 이기. 요년이 아주 요물이데. 크면 남자 여럿 울릴 거 같지 않나? 행배 닮아가 이쁘장해서는.. 아. 성격은 안 닮았음 좋겠다..”
그렇게 애 데리고 꽁냥거리다가 한 번도 보러오지 않는 형배를 욕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음.
혜민이의 1차 접종일이 되어 강상무랑 둘이서 접종 맞추러 가던 길이었음. 큰 병원이라 강상무는 접수하러 간다고 가고 판호는 혜민이를 안고 벤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다가와. 판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주춤거리며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어. 눈앞에는 덕수들이 다가오고 있음. 이 사람들은 형배에게 당했던 게 아주 억울해 미치겠던 거야. 판호가 꼰질러서 그렇게 된 줄 알고 판호를 손봐주러 찾아온 거임. 애 때문에 꼼짝 못할 때를 기다리면서. 그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판호는 그 사람들의 얼굴만 봐도 꼼짝을 못해. 무서워서. 혼자만 있었으면 그대로 끌려갔을 테지만 지금 자기 품엔 애가 있음. 후들대는 몸을 질타하면서 뛰쳐나갔어. 당연히 덕수들도 쫓아오지. 접수하고 온 강상무는 저 멀리 도망가는 판호의 머릿꼭찌만 볼 수 있었음. 차를 몰고 뒤쫓아가봤는데 금세 사라져서 찾을 수가 없어. 판호는 애를 안고 달리느라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었고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을 흘끗 이며 쳐다보다가 앞에 경사 심한 내리막길이 있는 걸 못보고 그대로 굴렀음.
그날 새벽 즈음. 창우는 강상무에게서 온 전화소리에 잠에서 깼음.
“이 미친 새끼가 이 시간에 전화질이고?”
“야 박창우. 거기 우리 행님.. 있나?”
“문 지랄이고? 늬 행님이 와 이 시간에 여가 있겠나? 근데 뭔 소리고? 판호 행님 거기 없나?”
강상무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사실대로 말했음. 창우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지. 형님을 어떻게 모시는 거냐고. 바로 전화를 끊고 찾으러 나가려고 채비를 했어. 형배에게도 연락을 넣었는데 내버려 두래. 또 정신 나가서 헤매고 있는 걸 거라고. 창우는 끊고 나서 이 매정한 새끼 좋아서 난리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리 매정하게 구냐고 투덜댔음. 근데 형배는 그 전화를 받고나서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와. 눈이 말똥말똥해짐.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흘러. 또 사라졌대. 애 놔두고 어딜 간 거야. 그동안 약 잘 먹고 있었는데 왜 또? 하는 의문이 들었지. 순전 오해. 형배는 숨이 막혀와 일어나서 담배를 하나 물려고 라이터를 들었음. 행님! 하고 밑에서 지키던 녀석이 하나 뛰어올라와. 표정이 이상해. “무신일이고?”
“해, 행님. 밑에 지금 파..판호 행님이.. 와 계시는데 뭐, 모르겠심더. 무슨 꾸러미 같은 거를 품에 안고 있는데.”
여기까지만 듣고 밑으로 내려갔음.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가자 판호가 엉망이 된 몰골로 엉거주춤 서 있음. 뭔가를 안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형배를 발견하자 쪼르르 걸어오는데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지 질질 끌면서 형배에게 걸어오면서 품에 있는 걸 내밀어.
“행배야. 이, 이 일을 으짜노? 혜민이가 이상타. 내, 내가 막 젖도 물려보고 했는데 아가 묵질 않는다. 으짜면 좋노?”
그제서야 내미는 걸 봤는데 강보에 쌓인 딸이었음. 판호가 구부정하게 내미는데 애가 축 쳐져있는 게 뭔가 이상해. 강보를 걷어서 확인을 해봤는데 숨을 안 쉬어. 고개를 들어보니 판호는 잔뜩 기대를 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형배는 딸의 시신을 옆에 선 놈에게 맡기고 판호를 집 안으로 이끔.
“아는 잠깐 놔두고 니부터 보자.”
밝은데서 보니까 더 가관임. 옷이 피로 젖어있고 팔이랑 다리는 부러졌는지 좀 이상하게 틀어져 있는데다가 손톱은 다 갈라져있고. 형배는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음.
“니 꼴이 이게 므꼬! 와이래 됐는데!?”
“그, 그.. 더, 덕수행님..이 막 쫓아와가.. 내 무서워서 도망가다가.. 넘어졌는데.. 갑자기 혜민이가 숨을 안 쉬어서.. 응.. 내, 내 으짜지? 혜민이 잘못됐으면 으짜지? 내 그라믄 몬산다. 응? 행배야 우리 혜민이 우짜노?”
형배는 입술을 꽉 깨물었음. 조금 전 창우에게 연락이 왔던 게 생각났고, 창우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니 강상무에게 전해 들었다 했음. 그 즉시 강상무를 불러와 정황을 듣고선 당장 덕수들을 잡아오라고 함. 그리고 죽은 딸을 건네받아 품에 안아들고 불안해하는 판호에게 갔음. 진정 시키는 게 우선이었음.
판호가 발을 헛디뎌 구른 곳은 부산답게 굉장히 가파른 곳이었음. 처음 바닥으로 몸이 부딪칠 때 퍽 소리가 나면서 한 바퀴 크게 구른 이후로는 계속해서 굴러 내려갔음. 손으로 바닥을 긁어도 멈추지 않을 만큼 심하게 굴렀어. 굴러간 자리에는 핏자국이 간간히 남았음. 와중에도 품속의 아기는 살리겠다고 떨어지지 않게 꽉 끌어안았는데 오히려 역효과였음. 혜민이는 커다란 판호의 품에 눌려서 중간쯤 굴렀을 땐 이미 질식해 죽어있었음. 덕수들은 판호가 굴러가는 걸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음. 끝까지 다 굴러가고 푹 퍼져있는 판호를 보고나서도 한참을 멍하게 보고 있었음. 움직이지도 않아. 그들은 판호가 죽은 줄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쳤음.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상황이 이리 되어 놀란 거. 주택가도 아닌데다가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서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어.
덕수들이 도망가고 한참 뒤에 몸을 움찔 튕기면서 상체를 일으켰음. 온 몸이 너무 아파서 어딜 다쳤는지도 모르겠는데 애가 걱정돼. 강보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음. 막판에 놓쳤나봐. 머리가 울리고 눈앞이 어질한데도 혜민이를 주우러 열심히 기었음. 애가 조용한 것도 이상하고.
“혜민아.. 이 가스나 와이리.. 멀리있노.”
겨우 손이 닿아 품에 끌어다 안았는데 애가 축 늘어짐.
“아야. 엄마다. 혜민아. 니 자나? 응? 야가 와 이리 힘이 없노? 우리 아 와 이라노?”
늑골에도 금이 가서 아플 만도 한데도 자꾸만 늘어지는 애를 꽉 끌어안고 등을 도닥여줌.
“이래 깊게 자나?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다. 가시나야. 니 나중에 나쁜 놈이 업어가믄 으짤라꼬..”
판호는 고통과 불안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혜민이를 얼렀음. 혹시 배고파서 움직이지 않나 싶어 주변을 슥슥 둘러보다가 구석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음. 그러다 또 한 번 넘어지고 겨우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서는 웃옷을 젖히고 벌어진 아이의 입에 젖을 갖다 댔어. 물려줬는데도 빨지를 않으니 속이 불에 타는 것 같이 답답해짐.
“와.. 와이라노.. 엄마 속 태우지 마라. 으짜지. 으짜지 우리 혜민이..”
그때 머릿속으로 형배가 떠올랐음. 어린 판호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만능에 뭐든지 다 아는 사람이라 학습되어 있었음. 실제로 판호네 아빠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형배도 아빠가 됐으니 뭐든지 다 알거라 생각함. 아이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는 알고 있지만 사실을 회피하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했음. 그래서 그 몸을 끌고 새벽녘에 형배네 집으로 갔음. 가다가 멈춰서 쉬기도 하면서. 중간중간 혜민이를 들춰봤는데 아직도 늘어져있어.
“아.. 야가 와이라지? 이상하네.
점점 더해지는 절망감으로 다리를 더욱 빨리 움직였어. 그래봤자 질질 끌고 가는 거지만. 형배네 집 앞 현관이 보이자 얼른 다가가 문을 두드렸음.
“행배야! 행배야아!”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놈 하나가 판호의 얼굴을 알아보고 문을 열어줬다가 엉망진창인걸 보고 깜놀함. 보고 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게, 판호가 아기를 꼭 안고 질질 들어오는 걸 바라보기만 했음. 모두들 멍하게 판호만 보고 있었음. 그러다 한 놈이 정신 차리고 형배한테 보고를 한 거.
판호는 죽은 애를 건네받아 안고 어르면서 계속 어쩌냐며 형배를 바라봄. 형배는 판호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에 심히 부담을 느꼈음.
“니는 아빠잖아. 행배야. 우리 아 좀 움직이게 해봐라.”
판호 품에 있는 애를 빼앗듯이 받아들어 옆에 놓고 판호를 꼭 껴안아줌.
“일단 병원부터 가자. 가서 니 몸 좀 치료하고 한숨 자자.”
“머고 니? 니 와 우리 아는 내팽기치는데? 내 지금 아 땜에 온기다. 내가 니 뭐 이쁘다고 왔겠노? 니가 아빠니까는 아 좀 낫게 해달라고 온긴데!”
“그래 씨발년아. 지금 그래 해줄라 하는 거 아이가! 아 낫게 하고 싶으면 내 말 들어라!”
그제야 좀 얌전해져서 애를 빼앗아 다른 녀석에게 건네주고 병원으로 데려갔음. 의사는 상태가 이리 안 좋은데 병원으로 바로 데려오지 않고 뭐했냐며 화를 냈음.
치료를 다 받고나니 반나절이 지났음. 다리가 좋지 않게 부러져 자칫 잘못하면 약간 절을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자 매우 심란해져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었음. 여기저기 붕대감고 누워있는 판호를 보니 절로 인상이 찡그려짐. 열이 올라 상기된 볼을 쓰다듬어주면서 아직도 불안해하는 판호를 다독여줘.
“괘안나? 몸은 좀 어떠나?”
“아프다.. 아파 죽겠다.”
“한숨 푹 자면 나을끼다. 판호야. 아무 생각 말고 다 잊자. 잊고 자자. 니 그래야 산다.”
“혜민이는? 혜민이는 어떻다고 하노? 아 괜찮다고 하나?”
“자라. 눈 감고.”
“혜민이는?”
“자라니까는.”
“...아 죽었나?”
형배는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눈에 손을 덮어줌.
“자는기다. 잊어야 된다. 니 탓 아니니까는 눈 감고 자라.”
판호는 지금 멀쩡히 제 정신. 아기가 잘못됐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형배한테 확인이라도 해달라고 자꾸 물어보는 건데 형배는 애 얘기는 꺼내지도 않아. 자꾸만 자기를 달래줘.
“참말로 우리 혜민이.. 죽었나..? 죽은기가?”
손바닥 아래로 축축하게 물이 묻어나기 시작했음. 판호는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울어. “우리 아 죽었나? 그렇나 행배야?”
“그래. 죽었다.”
“우리 혜민이.. 으짜노.. 내가 직있다아...”
몸을 떨어가며 우는 판호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조심스럽게 키스를 해주며 두 사람은 혜민이가 죽었다는 걸 받아들어야만 했음.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형배는 문득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남. 혜민이가 좀 더 자라면 판호와 화해를 하고 아버지 묘소에 혜민이를 데려가 보여드리려 했는데. 그 작은 행복마저도 누릴 수가 없게 되어서 속이 쓰림.
혜민이의 화장이 결정되었고, 판호는 팔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도 부득불 화장하는 걸 보겠다고 해서 형배가 휠체어에 앉혀 데려감. 아이는 정말 작은 관에 담겨있어서 형배가 먼저 울컥했음. 판호는 관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면서부터 대성통곡.
“우리 혜민이 뜨거워서 우짤꼬.. 아가, 혜민아, 엄마 여 두고 어데 가노!”
울다울다 지친 판호가 갑자기 축 쳐졌음. 형배는 놀라서 판호를 벤치에 눕혀놓고 훌쩍이면서 뻣뻣하게 굳어가는 몸을 주물러줬음. 한참 뒤에 정신을 차린 판호는 계속 형배 품에 안겨 울면서 서로를 도닥였음.
판호는 눈만 뜨면 울었어. 우리 혜민이 우리 혜민이 하면서 눈이 부어터지도록 울었음. 형배는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음. 음식만 입에 들어가면 토해내는걸 치워주고 자다가 깨서 우는 걸 안아주고. 형배도 정말 힘든데 자기가 뿌린 절망은 스스로 거둘 거라며 이를 악물고 버팀. 십여 년 전 그 순간에 지켜주지 못했던 업보.
상처는 나아가지만 판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갔고 진단분야만 달라진 채 여전히 입원해있었음. 반년이 지났을 무렵 형배는 그동안 잊고 있던 일을 처리하러 동사무소로 갔음. 혜민이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려고. 태어난 지 세달 만에 제 엄마한테 눌러 죽은 불쌍한 녀석.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기위해 부검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형배가 거절했음.
“그 쪼끄만 거 배 갈라서 뭐에 씁니꺼.”
서류작성은 간단했고 절차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음. 얼마 되지 않아 접수가 완료되었고 동사무소 직원이 건네주는 봉투 하나를 받아 밖으로 나왔어. 문 앞에 서서 서류를 꺼내 글자 하나하나를 곱씹었음. 호적에 올라왔던 혜민이의 이름 옆에 사망 이라고 한자로 큼지막하게 적혀있어. 태어난 날로부터 며칠을 살았나 계산을 해보다 눈물이 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훌쩍였어. 백일에서 딱 하루 모자란 99일을 살았음. 하루만 더 살았으면 태어나 백일을 무사히 살았다는 기념으로 조촐한 파티라도 열어줬을 텐데. 그 작은 손을 꼬물거리며 아빠를 보고 웃어줬을지도 모르는 딸애를 살아생전 한번 도 못 봤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후회됐어. 울음을 참느라 눈이 새빨개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이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계속 매만져봤음. 동사무소를 오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막 태어나서 찍은 빨간 원숭이 같던 그 사진과 죽어서 축 늘어져있던 모습이 자꾸만 번갈아가며 떠오름. 아이를 잃고 괴로워하던 판호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어. 자기는 잠깐 본 것 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뱃속에 품어서 키웠던 사람이면 오죽할까. 울어서 부어버린 눈을 판호가 볼까싶어 선글라스를 낀 채로 병실에 들어갔음. 어딜 다녀왔길래 멋들어지게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냐고 웃으며 농담하는 판호에게 아주 좋은데 다녀왔다고 맞받아치며 웃었음. 하지만 판호의 건강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음.
창우는 일이 터지고 꼬박 반년동안 뿔뿔이 흩어진 덕수들을 찾아 다녔음. 아내는 뭔 놈의 출장이 이리 잦냐며 투덜거렸음. 임신 중이라 혼자 놔두는 것도 미안하고 예민한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다녀오면 꼭 선물을 사왔음. 그동안 찾은 사람들은 세 명. 찾는 즉시 배에 사시미를 꽂아서 비틀어버렸어. 시체는 다리에 돌을 매달아서 저수지에 버렸음. 시체가 바닥으로 가라앉는걸 보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데 속이 씁쓸해. 그냥 묻어 버릴걸 옛정이 뭐라고. 형배는 창우를 탓하지 않았음. 자기였어도 묻는 척 하면서 살려 보내줬을 게 뻔 하거든. 그냥 건조한 눈으로 네 좋을 대로 처리하라고 언질만 해줬을 뿐. 아이를 잃고서 약해져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아프고 슬프고 그냥 막 감정이 이상해. 지금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있어서 거기에 감정을 이입한 탓도 있는 듯 함. 만약에 이 상황이 나였으면. 내가 저렇게 끔찍하게 아이를 잃었으면 저 사람들보다 더 아프게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혜민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약간 자기 딸 같은 느낌도 있었는데. 그 예쁜 아이가 이놈들 때문에 죽었어. 살려달라고 비는 놈들의 뱃가죽을 단번에 뚫어서 칼을 휘휘 돌려 내장을 다 토막 내놓는 걸로도 성이 안찼음.
“행님들은 와 내 말을 안 들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깁니꺼? 내가 얌전히 살라캤제?”
이 일에 연루된 놈들을 다 죽이고 덕수 하나가 남았어. 이놈은 아주 꽁꽁 싸매고 도망 다니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음. 니놈은 잡히면 내장 끊어놓는 걸로 안 끝날 테니 각오하라고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음. 아내가 또 출장이냐며 툴툴거리면서 서운해 하는걸 달래주고 있는데 아랫놈들에게서 연락이 왔어. 덕수가 죽었대. 소재지를 파악해서 연신 주시하고 있었는데 차에 치여서 죽었다고. 창우는 허탈해서 전화를 받으면서 웃었어. 아내가 뭐가 그리 웃기냐고 묻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음. 그냥 출장이 취소됐으니 너랑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게 좋아서 웃었노라고. 형배는 덕수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간 멍하게 있다가 수고했다며 창우를 물렸음.
씨발놈. 참 편하게도 디졌네 씨발.
손에 든 담배 심지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한 번도 빨지 못하고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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