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인
전하가 보위에 오른지 2년이 되었을 때, 느닷없이 술이 고프다 해서 무휼이 열심히 대작을 하고 있었음. 너한잔 나한잔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전하가 빤히 무휼을 쳐다보았고 무휼은 뚫어질듯 쳐다보는 그 눈빛이 난감해서 소신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사옵니까? 하고 물었는데 대뜸 들려오는 말이 너말야. 혼인은 안 하나?
무휼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마시던 술을 뿜어 전하의 얼굴에 모두 끼얹고 말았음. 급하게 일어나 죽을죄를 지었다며 오체투지를 하려는 걸 겨우 말려 다시 앉혀놓고 술을 따라주면서 다시 말해. 아니 자네. 나이도 많은데 여태 혼자인거 같아서말임. 생각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ㅎㅎ 실은 너 때문이지. 너. 내 앞에 앉아있는 전하 너. 내 좋은 규수 하나 소개시켜주겠네. 전하; 소신은, 사양 말게. 예. 그렇게 해서 뒤늦은 장가를 갈 첫 단계로 발을 내딛음.
무휼은 33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간다는게 매우 부끄러웠지만 전하의 명이니 어째. 가야지. 조선에서는 나이많은 노총각 노쳐녀들끼리 연결시켜주기도 했다는데. 하물며 전하의 사람이 아직까지 혼인도 안했다는게 말이 안되는거지. 전하의 입장에서는. 그데 다 당신때문인데 ㅇㅇ. 여튼 무휼이 장가를 가겠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음. 노총각이라 할지라도 전하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데다가 최측근이니 조금이라도 연이 닿을까 싶은 사람들에 의해 혼담스케쥴이 넘쳐날 지경. 게다가 잘생겼잖아.'_` 맞지? 자.. 잘생겼지? 내 눈에 콩깍지인건 아니겠지'_` 평소 무휼을 흠모하던 이들도 많음. 그래서 무휼이 혼인한다니까 아버지를 졸라서 들어온 혼담도 적지 않지. 그런데 무휼은 다 맘에 안들어. 전하 저 그냥 안하면 안될까요 ㅠ 하면서 징징 짰는데 전하는 안됨 하고 단칼에 잘라버리심. 그러던 때 궁에서 큰 행사가 있어 문무백관들의 가족들도 궁에 들어와 구경하고 있었음. 이 장면은.. 절대 내가 해품달을 봐서 그런게 아냐'_' 무휼은 여전히 전하 바로 옆에 서서 호위를 하고 있었는데 꽃분홍의 옷을 입고 있는 고운 규수가 눈에 들어옴. 처음엔 그저 옷 색이 튀고 예뻐서 쳐다봤는데 보면 볼 수록 너무 고와. 무휼은 계속 흘끗거리며 그 규수를 바라보았고, 전하께서는 무휼이 자꾸 다른데를 쳐다봐서 어쭈? 이자식이 감히 나 말고 딴델봐! 하는 마음에 혼내줄까 싶었는데, 무휼의 시선을 쫓으니 곱고 어린 규수에게 꽂혀있어.
그날 이후로 무휼은 종종 멍하게 있는때가 많았음. 전하를 옆에 두고도 초점이 풀려있는가 하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일도 많아져서 전하는 짜증이 났음. 3보이내에서 터덜터덜 쫓아오는 무휼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리심. 전하 앞이라 방정떨며 감싸지도 못하고 아파서 눈이 벌개진 무휼은 머리위로 물음표를 계속 띄웠고, 전하는 한심스럽다는듯 쳐다보고는 다시 갈길을 가셨지. 그런날이 지속되자 결국은 전하가 뚜쟁이가 되기로 하셨음. 그날 왔던 사람들을 모두 조사한 결과, 문제의 처자는 호조참판댁(그때 당시는 참판) 외동따님이라는걸 알게되었음. 늦게 본 자식인데다 아이가 참 예뻐서 부모 외에도 예뻐하는 사람이 많더라는 얘기까지 들으셨음. 얘의 외모는 대충.. 해품달에서 연우 아역이 18살이 되었을때정도? 애가 너무 예뻐서 그만.. 둘의 나이차가 심상치 않았지만 무휼이 저리 앓고 있으니 어째. 전하께서 둘을 이어주려 하시는것도 모른채, 무휼은 처음 해보는 마음앓이에 매우 심란한 상태임. 여태껏 입신양명을 위해, 그리고 그 후로는 두 왕을 보필하기 위해 주변을 둘려볼 새가 없었어. 그래서 혼인을 해야겠단 생각도 못한채로 보낸게 서른해가 훌쩍 넘어버렸음. 그동안 대쉬해오는 여인들도 꽤 있었지만 모두 무시했었지. 아니 근데 첫눈에 반한 상대가 너무 어려. 만약 이게 현대였으면 무휼은 꼼짝없이 은팔찌를 찼겠지. 그 여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한데 전하가 부르셔. 우울해하는 속도 모르고 전하께서 너무 환하게 웃으셔서 조금 맘이 상함. 어찌그리 웃으시냐 물었는데 전하께서 무휼 너의 평생 베필을 찾았노라며 여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첩을 내놓으심. 무휼은 보자마자 크게 딸꾹질을 함. 이럴수가 이 여인은! 꿈에서도 나와서 자길 괴롭혔던 그 여인임. 그림첩을 보고 전하를 보고 계속 번갈아가면서 보다가 믿기지 않아서 다시 여쭤봄. 이 여인이 무엇이라 하셨사옵니까? 네 평생 베필감이라 하였다. 순간 무휼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전하라는것도 잊고 함박웃음을 지음. 전하는 여태 무휼과 함께 있으면서 이렇게 웃는건 처음보셔서 놀랐어. 감상이라면 일단.. 좀 무서워! 항상 딱딱한 얼굴만 보다가 이렇게 웃는걸 보는데 적응도 안되고 어색해. 그런데 보면 볼수록 참 예쁘네. 안그래도 평소에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웃으면서 눈꼬리가 사악 휘니까 예뻐보여. 그리 좋으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ㅎㅎㅎ녀석 ㅎㅎㅎ 전하도 참 기분이 좋으셨음.
그리고 호조참판은 딸과 무휼과의 혼담이 오가는 동안 좋긴 한데 한숨을 푹 쉬어. 무휼이 나이가 많아서 근심이 어림. 늦은 나이에 본 딸이라 하나 엄연히 조선시대지 말임. 서른에 본 딸이라, 무휼과 장인어른의 나이차는 무휼과 딸의 나이차이랑 같음. 장인은 슈ㅣ발 이게 뭐하는 짓이여 내 귀한 딸을 저런 도둑놈에게'_` 하는 생각도 들지만 무휼이 워낙 잘나서 좋기도 함. 딸은 처음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님 아직도 혼인 안하셨음? 하면서 놀라하다가 곧 좋아했지. 무휼의 성정이라던가 이런저런 얘기는 이미 많이 들었거든.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혼인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여인은 아버지에게 무휼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졸라. 보통 혼인하는 당일 날 만나게 마련인데 어찌 이러느냐 정숙해 보이지 않는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그 뜻이 꿋꿋해. 무휼은 장인 될 사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부터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함. 검을 두고 나가는가 하면 전하 앞에서 돌부리에 걸려 엎어질 때도 있고 허당짓은 있는 대로 다 함. 전하는 그런 무휼을 놀려대며 비웃었고 곁에서 모든걸 지켜보던 내금위장은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크게 혼냈어. 하지만 눈물이 쏙빠지게 혼이 나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결국 부부가 될 두 사람은 경치 좋은 전각에서 미리 만나게 됨. 무휼은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고 눈앞에 놓인 술만 연거푸 마셔댔어. 손도 꼬물락 거리고 눈도 둘곳을 몰라 이리저리 쳐다보고. 그 모습을 보고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푸흡 하고 웃었고, 웃음소리에 놀란 무휼이 고개를 번쩍 들어 여인을 쳐다봤음. 여인은 곱게 웃으며 무휼을 마주보았어. 어찌 그리 다른 곳만 바라보고 계십니까? 소녀와 혼인하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담 소녀만 보셔야지요. 빨갛고 예쁜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꿀을 바른 듯해서 무휼은 넋을 놔버림. 여인은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해서 혼인하자 한 건가 궁금했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고. 그래서 만나자 한건데 이건 뭐 술만 계속 마시고 있으니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멀리서만 지켜봐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반듯하고 우직하게 생겼어. 키도 크고. 보면 볼 수록 맘에 들었지. 그러나 그날 무휼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나 너무 외로운 사람이라고 그대가 내 부인이 되어준다면 난 행복할거라고 취중프로포즈를 해버림. 다음날 술이 깬 후 부인될 사람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면서 집에 가 하이킥을 하는 바람에 이불이 몇 개 버려질 뻔 함.
혼인날이 다가올수록 무휼은 업무에 집중을 못했고, 짜증이 난 전하는 결국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려줬음. 혼인날까지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영겁의 세월만 같이 느껴졌고 기다리다 지쳐 참판댁을 몰래 기웃거리기도 했음. 여인은 알아챘지만 일부러 모른척 했고 일부러 그림자라도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방안의 불을 환히 밝히기도 함.
기다리고 기다리던 혼인날이 밝아옴. 무휼은 너무 떨려 이틀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채로 혼인식 준비를 했음. 무휼과 무휼이 부리는 노비 두엇을 제외하면 조용한 집에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를정도로 시끌벅적해짐. 무휼은 새신랑 차림으로 혹시 준비가 소홀하진 않았나 집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살피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깔깔 웃으며 자기 흉을 보고 있는거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더니 예쁘장한 청년 하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입담을 과시하고 있음. 인기척을 느낀 청년은 뒤를 돌아봤는데 무휼이 전하! 하고 오체투지를 할 기세라 얼른 입을 틀어막고 구석으로 숨어들어감. 무휼은 전하가 입에서 손을 떼자마자 작게 소리침. 전하 이곳엔 어인 일이시옵니까! 그냥 와 봤느니라. 궁을 비우신 것이옵니까?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잠시 쉬러 나왔네. 다시 돌아갈 것이니 걱정 말라. 전하! 어허. 그만해두시게. 자네가 부끄러워 하는 꼴이 보고 싶어서 온것일세. 순간 껄껄 웃고 마는 고운 청년의 멱살을 쥐어잡을 뻔 함. 하지만 곧 다른쪽에서 무휼을 찾는 소리가 들려와 어금니를 깨물고 전하 두고보자며 돌아갔음. 전하는 또 깔깔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봄.
혼인식은 무사히 치러졌음. 무휼은 새색시가 보이자 또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식이 끝날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전하는 또 그걸 보면서 야유를 함. 늦은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다 돌아갔고, 신방에는 연지곤지 찍은 고운 새색시가 얼굴에 홍조를 띄었고 무휼은 또 연거푸 술만 들이켰음. 부, 부인. 많이 피로하셨을 터인데 오늘은 그냥 잡시다. 하고 옷갈아입는걸 도와주면서 잠시 호흡곤란이 왔으나, 무휼도 그간 긴장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림.
얼마 후 다시 궁으로 복귀한 무휼은 자기가 지나갈때마다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전하의 입을 통해 궁 내에 소문이 퍼진 차였음. 내 무휼의 혼인을 구경하고 왔는데 평소엔 그리 목석같은 자가 여인 앞에 서자 민들레가 되어 그 여인의 숨소리에 따라 흔들리더라. 사건의 진상을 정득룡에게 전해들은 무휼은 다시한번 어금니를 앙 다물었음.
전하는 얼굴이 환하게 핀 무휼을 보더니 격하게 웃음을 참으심. 그리 좋더냐? 아주 얼굴에 꽃이 피었구나. 무휼은 부끄러움에 몸둘바를 모름. 전하. 그만좀 놀리시옵소서; 재밌는데 어찌하란 말이냐. 전하는 한동안 무휼을 어찌나 놀리던지, 곁에 있던 다른이들이 그만좀 하시라고 말리기까지 했음.
무휼의 무뚝뚝한 얼굴에 미소가 늘었음. 처음엔 무섭다고 생각했던 얼굴도 언제나 웃고 있는것을 보니 익숙해져서인가 아주 보기 좋았음. 전하는 뚜쟁이로 나서기를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심. 무휼은 언제나 사택으로 돌아가면 부인부터 찾았고 하루종일 무얼 하고 지내셨냐며 하루를 물었음. 이렇게 깨알을 볶으며 사는데 애가 안생겨. 무휼이 부인을 너무 신주단지로 모셔서 이런저런 짓을 안해. 아니 못해. 부인은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함. 이놈의 서방이라는 사람은 자기를 잠자리 대상으로 안보고 있는것이 분명해. 아니 이사람이 혼인을 했으면 자식 여럿 낳고 알콩달콩 살아야지. 그래서 각잡고 유혹좀 해봤는데 이남자가 도망가. 뭐하자는거지.. 결국은 참다 못한 부인이 덮덮해서 잠자리를 몇 번 가졌는데 애가 쉽게 들어서지 않아서 근심. 무휼은 부인에게 자식이 중요한게 아니니 너무 근심하지 마시라 했는데 부인 입장에서는 그게 아냐. 무휼이 나이도 있고 하니 빨리 낳아서 빨리 키워야지.
무휼은 부인과 잠자리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질 확률은 더 없었지. 애를 낳으면 여인의 수명이 줄어든다 어쩐다 하는 요상한 이야기만 줏어들어서는 부인 제발 이대로 둘이서만 백년해로 하자는 통에 그냥 포기를 해버렸음. 무휼은 지극정성으로 부인을 사랑했고 부인도 그런 무휼이 좋아 서로 알콩달콩 살았음.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오래간만에 잠자리를 가졌는데, 그날 이후로 부인이 입맛도 없다 그러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음. 무휼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왜그러시느냐고 물었지만 모른대. 아랫배가 뻐근하면서 속이 안좋대. 몸에 좋다는 음식을 가져다 먹여도 족족 토하기 일수였음. 근무중에도 축 쳐져있는 무휼을 보며 전하는 귓방맹이를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시며 물었어. 요즘 고민이 있느냐? 그래서 무휼이 이차저차 설명을 했고 다 듣고 난 전하는 무휼을 때려버렸어. 머리를 부여잡고 영문을 몰라하는 무휼을 한번 걷어차주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음. 너는 바보냐? 부인이 수태를 한 것이잖아! 예? 수태? 그래!
무휼은 집에 가는동안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음. 남들이 보면 정신나간 자라면서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은 느낌.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여전히 안색이 안좋은 부인을 와락 껴안으면서 좋아했어. 부인도 자기가 임신을 한 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무휼의 말을 듣자 활짝 웃었음. 여인이 아이를 자꾸 낳으면 명줄이 줄어든다는 얘기가 걸리긴 했지만 막상 닥치니 너무 기분이 좋아. 한동안 부인이 먹고싶다는 음식을 모조리 구해다 주면서 행복해 했지. 한여름에 밀감이 먹고 싶다 해서 있지도 않은 밀감을 구하느라 전하께 손도 벌렸을 정도. 전하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구해다주셨어. 아주 어렵게. 무휼은 성은이 망극하다며 절을 두 번이나 할 뻔했지만. 전하는 무휼이 행복해 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었어. 항상 날선 도검처럼 날카롭기만 하고 외로워보였던 사내가 사랑을 하면서 매일 웃고, 비록 나사빠진것처럼 굴어 전하께 혼이 날때도 있지만 보는내내 즐거우셨음. 아. 혼인시키기 잘했어.
부인이 몸을 풀던 날도 다른날과 변함이 없었음. 부인은 전날 저녁부터 아이가 나올것 같다며 통증을 호소하고 자리에 누웠음. 무휼은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대로 해가 뜨는걸 지켜봤지. 초산이라 진통이 길었으니,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가 나올 때가 안되었던 거임. 무휼이 곁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불안해하는걸 도닥여주고는 날이 밝았으니 어서 입궐하시라며 내보냈어. 궁으로 가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음. 혹 잘못될거란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어. 어린 부인은 아파서 숨만 좀 거칠어졌다 뿐이지 진통에도 의연했으니까. 전하는 곁을 지켜 선 무휼의 안색이 내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무슨일이 있냐며 물었음. 무휼은 우물쭈물 하다가 겨우 말을 했지. 부인께서.. 아, 아이를 낳고 계십니다. 뭐! 그런데 너는 부인곁을 지키지 않고 입궐을 했단 말이냐! 이런 천하의 썩을놈 어서 돌아가서 곁을 지켜라! 어명이다! 무휼은 허둥지둥 말을 타고 퇴청을 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집에서 부리는 종놈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을 보았어. 종놈은 무휼을 발견하자 아이구 나으리 하고 울면서 다가왔음. 무휼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어. 마님께서 지금 피를. 무휼은 다 듣지도 않고 급하게 말을 몰았음. 집에 가니 종놈들이 통곡을 하고 있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종놈이 다가와. 마님께서 아기씨를 낳으시다 그만.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와 한달음에 방 안으로 들어갔음. 부인은 평소 잠들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워있었어. 다만 땀에 절은 옷과 다리사이에서 비치는 붉은 피가 좀 다를 뿐. 눈만 껌뻑이며 산파를 쳐다봤어. 난산이었대. 아기씨의 정수리가 보이고 있었는데 나오던 도중 뭔가 잘못됐는지 마님이 숨을 놓아버리더래. 무휼은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음. 멍하게 부인의 얼굴만 바라보고있어. 산파는 눈치를 보다가 밖으로 나가 울고있는 종복들을 물렸음. 무휼은 앉은 자리에서 이틀동안 꼼짝도 안하고 죽어서 하얗게 변한 부인만 바라보고 있었음. 삼일째가 되던 날에 겨우 손을 움직여 식어서 차가운 얼굴을 만져보고, 손도 만져보고, 죽은 아이가 들어있는 배도 쓸어보고. 양수가 빠져나간 배는 부피가 작았음. 문득 그게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왔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들이 얼른 무휼을 데리고 가 물이라도 마시라며 달랬고, 장의사들이 안으로 들어가 부인을 관에 넣었음. 삼일장을 이미 이렇게 보냈기 때문에 관은 바로 땅에 묻혔음.
부인이 죽은 이튿날, 소식을 들은 전하는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분명 실의에 빠져 있을 것인데 가보지도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해. 무휼이 다시 입궐한다면 어찌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무휼의 아이에게 이름을 내려주려고 붉은 비단에 써두었던 이름자는 바로 불에 태워졌고 직접 쓰신 교지를 내려보냈음. 무휼에게 한달간의 휴가를 주고 좋은 곳에 부인을 묻을 수 있게 땅을 주셨음. 부인은 전하가 주신 땅에 묻혔어. 무휼은 떼로 뒤덮힌 봉분을 멀거니 쳐다보았음. 그 앞에서 열흘을 멍하게 보냈어. 너무 갑작스럽게 떠났기 때문에 실감이 나질 않아서. 보름즈음 되었을때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단정히 한 후에 처갓댁에 갔음. 인사를 올리고 부인의 소식을 전했어. 장인어른은 이미 알고 있었음. 알고 있었지만 무휼이 와서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지 어찌 이리 늦게 내 딸의 죽음을 전할수 있느냐며 역정을 낼 참이었지만 무휼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 차마 그럴수 없었음. 내 자식이 그 아이 하나 뿐이었는데 이리 잃고 말았으니 속이 끊어지는것 같이 아프구나. 무휼 너는 부모가 없으니 내가 아비가 되어주겠네. 죽은 딸 아이를 대신해 나의 아들이 되어주게.
한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무휼은 내금위의 푸른 철릭을 입고 이른 새벽에 입궐을 했는데 전하는 모르는척 하시는건지 아무 말씀도 없으심. 못내 서운했지만 일은 해야지. 한달이나 추스를 시간도 주셨는데. 그러다 퇴청할때가 되어서야 전하가 따로 부르신대. 들어갔더니 대뜸 어사주를 내려주셔. 그리고 또 아무 말씀도 없으심. 무휼은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아듣곤 어사주를 단숨에 들이킴. 그렇게 서너번 들이키고 물러났어. 취기가 오른 몸은 하늘을 걷는것 같았고 기분이 살짝 좋아졌어. 집에 가는 길엔 콧노래까지 불렀어. 종놈들의 부축을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 요 위에 대자로 누웠음. 여전히 웃으며 흥얼거리다 살풋 잠이 들었는데, 몸을 틀며 버릇처럼 옆자리를 더듬었음. 부이인. 하며 계속 옆자리를 더듬다 눈을 떴음. 모두 잠든 새벽녘은 고요했고 빈 옆자리는 자다 걷어찬 이불만 돌돌 말려있었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 앉아 주변을 둘러봤는데 언제나 둘이 있던 방안엔 저 혼자야. 아무도 손대지 말라 명해서 한달 전 그대로인 방 내부에는 부인이 만들다 만 아기 옷이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있음. 저걸 버려야겠다 싶어서 벌떡 일어나 그 바구니를 밖에 내놨어. 방 안의 온 장을 열어 부인이 쓰던것, 입던것들을 전부 모아서 뒷 산에 땅을 파 내버리곤 묻었어. 그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와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 찌르는것 같이 아프면서 눈가가 따가워. 30분을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나 내다버린 물건들이 있는 곳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해.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져. 어찌나 깊게 묻었던지 파내도 끝이 안나는거 같음. 돌에 걸려 손톱이 부러지고 모래에 긁히고 울며불며 난리를 쳐서 물건들을 죄 다 꺼냈어. 마지막으로 부인이 입었던 옷을 손에 들고는 흙을 털어냈는데 그새 물이 들었는지 하얀 옷이 거뭇해졌음. 무휼은 그 옷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고 말았어.
그 후로 무휼은 다시 웃음을 잃은 채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딱딱해져갔음. 부인이 있던 동안 많이 가까워졌던 전하께 심적으로 많이 기대었어. 전하는 무휼에게 몸을 위탁하셨고 무휼은 전하께 마음을 위탁하는 그런. 그 후로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유해지기는 했으나 날카로운 것 만큼은 변하지 않았음. 부인 또래의 처자들을 보면 항상 눈길이 갔고, 그보다 나이 많은 여인들을 보면서 우리 부인 나이가 드셨으면 저렇게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음. 지극 정성으로 제를 올렸고 혼자 누워있는게 쓸쓸하지 않냐며 매일같이 찾아가 무덤을 돌보았음.
무휼이 이국으로 끌려가던 날. 다른 무엇보다 혼자 남겨질 부인이 걱정되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고, 장인어른은 전하께 어찌 내 아들을 그리 보내실수 있냐며 탄원하고는 딸의 무덤 앞에 가 통곡을 하고 말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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