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휼이란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또래보다 꽤나 덩치가 있어 힘 좋게 생겼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힘은 장사라는 놈이 어찌 붙잡혀서 그런 험한 꼴을 당한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아이를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무휼은 파리한 얼굴로 목검을 들고 있었다.


"..이래가지고 무슨 검을 가르치겠냐?"
"네놈도 내가 음인이라 하여 무시하는 거야?"
"반말이냐? 나보다 한참 어린거 같은데?"


 첫 만남부터 삐걱였다. 몸이 좋지 않아보여 들여보내려 해도 부득불 우기며 목검을 휘두르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미련한 놈. 곰탱이. 퉁퉁 부은 몸으로 검을 들겠다고 징징대는 꼴이란. 결국은 드러누운 채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있었다. 평생의 목표라던 이인겸이 몰락하고 말았으니 다시 검을 들 목표가 필요했다. 그 목표를 이방원이 주겠노라 했다. 새로운 시대가 오면 너를 나의 검으로 쓸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삼한 제일검에게 검을 배워라.


"길태미 어르신은.. 어찌 되었어..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눈치를 보았다.


"아직은 무사하다."
"'아직은'?"
"처분은 윗것들의 몫이지. 나와는 상관 없어."


 말이 없어졌다. 길태미란 자는 실로 제 사람들에겐 다정했던 것인지 하나같이 이런 반응들이다. 신기할 따름이다. 제게 있어 길태미는, 평생을 죽여 마땅한 죄인일 뿐이었다. 


 땅새는 무휼이 몹시 맘에 들지 않았다. 부모형제 다 잃었다고는 하나 이 어린놈은 썩어빠진 고려의 진 면목을 모를 것이다. 이인겸의 도화전에서 끼니 굶을 걱정 없이 배부르게 살지 않았더냐. 당장에 검을 던져버리고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명이라 별 수 없었다. 내일 몸이 낫거든 같은 시간에 나오라 하자 무휼은 고개를 끄덕이곤 얌전히 이불을 뒤집어 썼다.



-


 상투가 잘려나간 자리를 더듬었다. 가장 아끼는 머리장식과 함께 터럭이 잘려나갔다. 이로써 길태미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 길태미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겠노라 그리 맹세했다. 검을 쓰는 자들이 가까이에 있을수록 좋다 하여 이성계의 사람이 되었다. 졸지에 원수아닌 원수의 사람이 되었으니 웃기는 모양새다. 하지만 유를 살려준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나. 하여 상투를 목 대신 바쳤다. 이름을 새로 내려주겠다 했지만 거절했다. 그냥, 이름 없이 사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모든것을 놓은 채로, 그저 시간이 이끄는대로 살아야 할 따름. 이대로 살다 나이먹어 죽어도 나쁘지 않을듯 싶었다. 가별초는 저를 음욕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많이 당황하였는데 이성계장군이 웃으며 직접 술을 내려주었다.


"가별초에 무뢰배란 없소. 그대가 묵는 곳엔 전부 평인(平人) 들로만 배치하여 두었소.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

길태미는 술잔을 한번 높이 들어올려 건배를 대신하곤 술을 천천히 넘겼다. 목이 따갑다. 한 잔만 받들고는 몸이 좋지 않단 핑계로 그 곳을 빠져나왔다. 더벅머리가 되어버려 쓴 두건을 자꾸만 매만졌다. 한번도 잘라본 적 없는 머리카락의 까슬거림이 생소했다. 오늘, 자리에 홍인방은 없었다. 곧 정도전과 역성 혁명을 준비한다니 바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역성 혁명(易姓革命). 성씨(姓氏)를 바꿔 나라를 뒤집는다. 관심이 없다. 사대부들이 신나서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던 말던. 발밑의 돌이 채여 툭툭 차며 걸었다. 이제 막 묵는 곳-감금처-에 들어가 갓을 벗으려는 찰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뿔싸. 노기가 가득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 바쁜 와중에도 어찌 소식이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문이 열리며 홍인방이 들어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의도치 않은 극양의 체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본인은 모르는 듯 했다.


"기운 좀 걷지?"
"이성계 장군의 검이 되기로 했다니요? 전 찬성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그럼 나 이 골방에서 늙어 죽을때까지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제가 당신을 살렸습니다! 그대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일은 절대 허락 못합니다!"
"허락? 내가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그간 봐줬더니 이놈의 방자함이 끝이 없어?!"


 말은 호기롭게 하였으나 몸이 떨렸다. 저놈의 기운. 극양인은 이래서 싫다. 


"그.. 그 빌어먹을.. 기운이나 걷어!"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는 줄 아십니까?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만큼 급박한데 이리 나와 그대와 입씨름을 하고 있어야 하느냔 말입니다!"
"누가 입씨름 하재!? 기운이나.. 거, 걷으란 말이야! 걷.."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저, 저 빌어먹을. 빌어먹을.


"당장 장군께 따지러 가야겠습니다. 결코 그대를 전장으로 다시 보낼 수 없습니다!"
"흐윽.."


 몸이 뒤로 넘어가버렸다. 짙은 극양의 기운에 사지에 경기가 인 듯 떨어댔다. 위로는 숨이 막혀 컥컥대는데 아래로는 액을 흘려댔다. 홍인방은 급작스레 무너지는 몸에 놀라 순식간에 기운을 뿜는걸 멈췄다. 언제 이리 짙은 기운을 뿜고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를 질책하며 길태미의 상태를 살피려 다가가는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이처럼 악을 지르며 말도 없이, 그리 울어댔다. 극양의 기운 때문에 몸이 열리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런 일 당하지 않게 해준다더니. 지켜준다더니.


"너도 똑같아.. 나가!!"


 홍인방은 불에 데인듯 파드득 몸을 떨었다. 시뻘건 눈이 자신을 쏘아보았다. 그 눈에 겁에 질려 쓰러진 몸을 달래줄 생각도 못한 채 밖으로 도망쳤다. 끝내 달래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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