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태미는 문득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눈을 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란 들판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어릴적 선미와 놀던 평택의 들판. 기분이 좋아 몇 걸음 더 걷다 마음에 드는 꽃 앞에 무릎을 꿇고 한 송이를 꺾었다. 왼 손을 들어 꽃의 줄기를 새끼 손가락에 휘휘 감으니 그럴싸한 꽃반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이것을 그리 싫어하셨다. 극음인이다 못해 행실마저 계집이 될것이냐 호통을 치며 꽃반지를 뺏고 목검을 쥐어주셨다. 차라리 검을 배워 네 몸을 지키라 하셨다. 그래도 저승길인데 이깟 꽃반지를 보고 또 호통을 치진 않으시겠지. 태미의 옆엔 어느새 어머니가 와 앉았다. 함께 꽃을 꺾어 반지도 만들고 화관을 만들어 서로의 머리에 씌웠다. 네 모습 참 곱구나. 방긋 웃으신다. 어머니. 어머니도 고우셔요. 고우신 내 어머니.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정신이 드시오?"

잠을 자지 못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홉 뜨니 낯선 천장이 보이며 허리에 격통이 느껴졌다. 깨어난지 한참만에 그의 존재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까치 독사. 그 자가 왜 이 곳에 있는 것인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 보아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물 한 사발을 바싹 마른 입가에 대 줄 뿐이었다.

"사흘안에 기운을 차리셔야 하오. 이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소."
"너는.."
"그저 기운이나 차리시오. 두 번이나 큰일날 뻔 했소. 내가 생각보다 너무 깊게 벤 듯 하여.. 미안하오."

꿈이었구나. 노란 들판도, 어머니와 함께 만들던 화관도. 머리께를 더듬어 보니 덮수룩한 머리털 밖에 없는 것이다. 아. 꿈이구나. 다 꿈이로구나.

서럽게 우는 태미를 보며 까치독사가 급히 다가왔다. 왜 우는 것이냐 물어도 달리 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나는 왜 살아있느냐 되물을 뿐이었다.

"죽었어야 했는데.. 왜 살린 것이야? 이대로 가게 두지 왜.. 붙잡았냔 말이다.."
"나라고 살리고 싶었는 줄 아시오? 이인겸 일당이라면 응당 다 베어 넘겨도 모자를 판이오."
"그럼 왜?"
"..부탁이었소."

처절한 부탁이었소. 그분께서 내게 무릎을 꿇고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소. 결이 고운 비단 옷 무릎이 다 헤질 때 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소.

어쩔 수 없었다. 홍인방 혼자 힘으로는 무리였다. 사대부인 제 신분도 잊은 채로 그렇게, 성姓 도 없는 비천한 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땅새야 도와다오. 땅새야 내 목숨을 구해다오. 그가 죽게 된단다. 그를 살려다오. 누군가의 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땅새는 피를 토하는 인방의 외침에 몸을 일으켰다.

삼한 제일검 길태미. 양인陽人도 아닌 보통의 사내가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싶었으나 곧 검을 섞자마자 알게 되었다. 이 자는 전력을 다 하지 않는다. 진심으로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길태미는 제 어미를 납치하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이를 방관한 죄가 있다. 이대로 검을 크게 내려쳐 죽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칼을 곧게 추켜세우면 인방의 물기 어린 눈이 앞을 가로막았다. 제기랄. 제기랄. 당신은 어르신 때문에 사는거야. 잠시 길태미가 멈칫한 것을 보지 못하고 허리를 갈랐다.

제법 크게 베여 출혈을 멈추는 데만 큰 시간을 들였다. 누군가가 이 곳을 발견하기 전에 떠나야 했다. 목만 축이곤 다시 잠이 든 태미를 뒤로 한 채 밖을 살폈다. 비가 추적이며 내리고 있었다. 이런 습한 날씨에 상처가 덧나지 않아야 할텐데. 밖은 어찌 되었을까. 내 어린 누이 분이는 무얼 하고 있을까. 홍인방 어르신은 언제 오는 것일까.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한 이성계 장군은 조용히 움직이는 인방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길태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도화전. 그 집의 계집종을 다그쳤더니 곱게 단장을 하시고 칼을 찬 채로 나갔다 한다. 검 소리가 들려 밖을 보니 온 몸이 시커먼 검객과 함께 멀리 사라졌다 한다. 본디 길태미란 자는 그대로 당할 인물이 아닐 터. 그가 죽었다는데도 저리 평온한 것을 보아하니, 분명하다. 어느새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는가. 요물. 이인겸은 홍인방을 그리 칭했다.

"응당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가 벌을 받지 아니하면 백성들은 들끓게 되오. 죽이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상대방이 끝까지 믿음을 주지 아니하면 사람은 마음속에 불씨를 얻게 됩니다. 극한의 비참함 까지 말이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행동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길태미를 내 놓으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이지 않겠소."
"죽이지 않고 어찌 처벌을 하신단 말입니까?"
"처음 그대가 우리에게 접근했던 불손한 의도를 알고 있소. 언제 또 변절하여 떠나갈까 지켜만 보고 있었지. 허나 어느 순간 진실로 변했고, 그 이유를 생각을 해 보았소. 길태미였지. 우리가 이인겸을 치면 전리품으로 얻기 위해. 그대도 극양이니 그 자에게 끌림은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극양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저를 그런 소인배들과 한 곳에 두지 마소서!"

끔찍하다. 그 극악 무도한 자들과 한 패로 엮인다는 것이. 이 홍인방이 길태미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지극한 연모다. 극양과 극음의 짐승같은 끌림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필요하오."

그 자의 거취를 알려주시오. 이성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큰 손은 보는 것만으로도 묵직했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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