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근이란 놈이 있다. 홍인방의 가노이며 첫 만남에서부터 눈빛이 좋지 않았기에 그의 행적을 알아보았다. 가히 좋지 않은 놈이었다. 기회만 있으면 주인을 갈아치우는 놈이었다. 흰자위가 누런 눈을 굴리며 이방원의 곁에 어슬렁 거리기에 홍인방에 대한 염탐을 시켰다. 그랬더니 소식을 귀신같이 물어온다. 이 자는 필경 큰 재난이 될 자 이다.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대근이놈의 이야기에 따르면 부상을 입은 길태미는 정도전의 사람인 땅새와 함께 있다. 그들은 평택으로 향할 것이다. 가서 군사라도 일으키려 할 셈인가. 어리석은 자. 이방원은 길태미를 잡기 위해 출정 준비를 하던 중 가별초 소식통에게 한 전갈을 받았다. 일전에 사로잡아놓은 채 잊고 있던 극음인이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직 테도 나지 않는 작은 배였다. 극음인들은 제 자식을 그리 아낀다 들었는데.
이방원은 손수 그가 누워있는 작은 초가에 들렀다. 무릇 범인凡人들의 출입을 통제해 놓은 터라 인적도 드문 곳에 경칩이 우는 소리만 들렸다. 방 문을 열자 조금 전 까지 피를 쏟고 하얗게 질린 채 누워있는 어린 극음인이 있었다. 그는 태아를 잃고도 울지 못하고 있었다. 발개진 눈가만이 그가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알려줄 뿐 이었다.
"네 이름 무엇이냐?"
"무휼..입니다."
"방금 전 큰 일을 치뤘다 들었다. 그래, 몸은 어떠하냐?"
"끔찍한 것이 사라졌으니... 속이 시원할 뿐입니다."
무휼은 거짓에 능하지 못했다.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곧 물이 차오를 것이거늘. 이방원은 안쓰러이 웃으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시절에 휩쓸려 몹쓸 짓을 당하고 아이도 잃게 된 이 어린 극음인은 울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네게 좋은 시절을 주마. 도화전을 벗어났으니 이제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널 검으로 써주마.
무휼은 길태미에게서 검을 배웠다 들었다. 제일검의 제자라. 땅새에게 던져두고 나머지 검을 가르치라 해야겠다. 그에게도 나름의 징벌이 되겠지. 길태미를 도운 죄. 오늘의 해가 지면 길태미를 잡으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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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알고있는 대근을 앞세워 장소를 찾았다. 보상을 원하는 얼굴에 조영규의 철퇴가 날아들었고 곧 머리가 박살나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더러운 놈. 절로 침을 뱉었다. 제 주인을 발고 하고도 보상을 원하다니 천한 것 주제에 어찌 이리 발칙하단 말인가. 이방원은 말의 머리를 돌려 언덕에 다다랐다. 안에서도 살기를 느꼈는지 조용하지만 또한 분주하다. 아직 움직일 수 없는 길태미는 숨어야 했고 땅새는 살기를 튕겨냈다. 안에서 곧바로 튀어나와 문 앞에 선 자들을 순식간에 베어넘겼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해버리는 이들을 뒤로 한 채 앞으로 치고 나오다 곧 저들을 공격하는 이가 이방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칼을 내렸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여 땅만 바라보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목표는 오로지 길태미 뿐.
"듣거라."
우습구나. 천하를 호령하던 너의 꼴이 어찌 이리 되었단 말인가.
"패역한 역도 길태미는 얌전히 나와 오라를 받으라. 백성들을 수탈하고 조정을 농락한 너의 죄는 씻을 수가 없다."
"오라가 밧줄이 아닌 내 목에 드리운 칼이라면 나가겠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네놈을 산 채로 잡아오라는 명이다."
"웃기셔. 네 애비가 날 산채로? 거짓도 적당히 해야 하는거야."
상처입은 짐승 주제에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구차하다. 곧 덫에 걸려 허덕일 것을 알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아들 유를 보고싶지 않나?"
이유는 길태미의 살아있는 약점이다. 세간에 이인겸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어디하나 닮지 않아 사람들의 입방아로 숫하게 오르내렸던 그 아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움막 속에서 길태미가 모습을 보였다. 파리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나오는 꼴이 위태해 보였다.
"유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아무 짓도. 네놈이 얌전히 우리를 따른다면 아무짓도 안 할 것이다."
"설마 손 댔어?!"
검을 잡은 길태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칼을 빼드는 호위들을 물리며 이방원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무사하다지 않았느냐. 이대로 오라를 받아라. 유를 만나게 해 주겠다."
길태미는 손에서 힘을 뺐다. 검이 바닥에 떨궈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밤 이슬을 머금은 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줄에 묶였다. 그 아이 열이 심했는데 정말로 괜찮은 것이냐 물어도 대답하는 이 하나 없었다.
이방원은 다시 말 위에 올라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 땅새를 보았다. 설마 홍인방이 땅새를 이용했을 줄이야. 땅새는 당분간 근신 처리 될 것이다.
"땅새. 근신 기간 동안 네가 맡을 아이가 있다."
"아이라 하시면.."
"무휼이라는 녀석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으나 아직 검이 부족하다. 도맡아라."
무휼이라. 얼마 전 도화전에서 끌려나온 극음인이었다. 제가 온 나라의 죄를 뒤집어 쓴 마냥 조용히 끌려나오는 모양새가 가엾어 보였다. 벙어리인지 말을 걸어도 도통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정말로 벙어리는 아니겠지. 땅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