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타임슬립

from 놈3 2013. 7. 20. 23:41

본인이 태어난 해에서 거진 80여년의 시간이 흘렀더랬다.

더이상 말을 타지 않아도 되고, 더이상 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더랬다.

일본에게서 해방된 조선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40년도 안되는 새에 이렇게 발전을 했더랬다.

 

회색빛의 상자 안에 갖힌채 그렇게 발전을 했더랬다.

 

속이 썩어들어가는걸 그늘 속에 가린 채.

 

 

 

매일같이 최루탄에 노출되어 있으려니 골이 터질 지경이었다.

학교가는 길은 매번 전의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쥐고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완전무장한 전의경들 앞으로 다가갔다.

 

"신촌으로 가야 하는데.."

"조금있으면 여기서 데모가 벌어질 거요. 다른데로 돌아서 가시오."

"나 지금까지 다섯번 퇴짜맞았거든. 길이나 뚫어주고 돌아가라고 하던가."

 

도원의 제법 날카로운 말투가 전의경의 신경을 건들였다. 심상치 않은 전의경의 눈빛에 옆에있던 동기가 도원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신 머리를 조아렸다.

뒤에서 들려오던 총학의 구호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동기 남학생은 도원을 데리고 재빨리 그곳에서 뒷걸음질쳐 나왔다.

 

"오늘은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길 바래야죠. 나같이 소심한 녀석들은 그저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해야지. 

그러고보면 박형은 이런 일에 대해선 항상 침묵이야."

"내가 무슨 토를 달길 원해?"

"아니 뭐, 그런건 아니지만, 워낙에 박형 말도 없고 조용조용해서.. 무슨 생각하면서 사나 궁금하잖아요."

 

나같은거 궁금해 해서 뭐해. 

궁금해 할 수도 있지. 거 사람 뻣뻣해서 못쓰겠어요 박형.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새에 곧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비명소리 구타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총소리.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으면 눈앞에 일본군이 보인다.

 

눈을 뜨면 눈 앞에 전의경이 보인다.

 

 

달라진게 있다면 총칼을 든 적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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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귀한 시대에 살았던 만큼 손에 잡히는 책이라면 무조건 읽고 공부했던 탓에 검정고시를 좋은 성적으로 패스하고 학력고사를 봤다.

대학생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에 명문대라고 하는 대학교를 들어갔다.

 

그저 공부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머릿속에 깃든 사냥꾼으로써의 감각과 기억을 묵혀두고 지금은 오로지 공부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큰 배움터, 大학교라는 곳은 그저 데모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변질됐을 뿐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가면 문앞에 붙어있는 것은 '휴강'이라는 두 글자.

또 휴강이야, 씩씩대며 몸을 돌렸다.

학교안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하긴 이런곳에서 수업하길 바란 내가 바보인건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정문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앞 신촌길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아직도냐..."

 

지겹다는 듯 한숨섞인 말을 내뱉었다.

 

한때나마 독립군이었지만, 이 일에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학생운동이나 독립군이나 나라를 위한다는건 매한가지이긴 하지만, 도원은 썩은 지도자에게까지 얻어맞아가며 살고싶지 않았다. 얻어맞은건 일본군으로 족했다.

내 머리도 많이 굳었구나싶어 자조적인 쓴웃음이 나왔다.

 

"살려주세요!!"

 

어디선가 튀어나온 앳된 여학생이 도원의 다리를 붙들었다. 겁먹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피가 쉼없이 흐르는 두 팔로 도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질 않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 이도저도 못하고 있던 찰나, 희뿌연 최루탄의 연기속에서 곤봉이 튀어나와 여학생의 머리를 갈겼다.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바지를 붙잡던 손에서 힘이 빠지고 여학생은 연기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연기로 목이메이고 눈이 따가웠지만 눈물이 그렁한 채 시뻘겋게 충열된 여학생의 눈이 아직도 발밑에 자리하고 있는것 같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뒤에서 곤봉이 달려드는게 느껴져 몸을 숙였다. 아직 사냥꾼이었던 시절의 행동이 몸에 배어있어 간단하게 상대를 제압했다. 이곳에 더 있으면 위험할거 같아 도망가려던 찰나,

 

 

"어이! 적당이들 하라고! 응? 죽이지 말라잖냐!"

 

즐겁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꽤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봤다.

 

 

칠흙같은 정장차림에 새까만 머리의 남자. 검은 가죽장갑을 낀 남자가 서 있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일그러진 미소가 걸렸다.

 

 

"박도원?"

 

 

 

그는 박창이.

 

박창이가 다가온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한걸음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도망가야돼. 도망가야돼.

굳어버린 몸은 대뇌에서 떨어진 명령을 듣지 못했다.

다시금 둔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등이 아파오면서 몸이 기울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겨우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주민등록번호와 이름, 주소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도 없는 도원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끈질기게 추궁을 해왔지만, 학생운동을 했다는 단서를 찾지 못해 마지못해 무혐의로 풀어주었다.

서를 나오면서, 자신의 뒤를 따라나오는 경관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위대를 때려잡던 무리들 중에서 까만 양복 입은 남자 말야. 혹시 아나?"

 

경관은 잠시 흠칫하더니 어디 새파란 놈이 반말질이야?경찰 이외에 누가 감히 시위대를 때려잡나며 버럭 화를 내고는 빨리 가라고 도원을 떠밀었다.

분명 박창이다. 그 매무새, 그 생김새. 그리고 자신을 알아봤다.

 

-박도원?

 

이름 석자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은연중에 투입된 정치깡패들 아니오?"

"정치깡패?"

"왜 그 있잖우, 예전 이정재같은 놈들.. 아 지금은 종류가 다르려나? 형 이정재는 아시오?"

"..책에서 보긴 했다만."

 

 

암턴 질 나쁜 사람들이오. 왜 찾으려는건지 이유는 모르겠다만 절대 건들지 마오.

동기는 도원의 어깨를 도닥이며 신신당부를 했다.

일본놈들이나 마적단보다 질나쁜 놈들이 어디있겠냐고 속으로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실없게 웃기는. 나 가요."

 

멀어져가는 동기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

 

붉은 석양과 회색 아스팔트 상자의 접점이 그날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음날 들려온 얘기론, 전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동기가 시체로 발견됐다 한다.

오른 손 검지가 잘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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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가 시체로 발견된지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교내에서도 데모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일어난 적도 없으니 그때 이후로 박창이는 본 적이 없었다.

 

"소포요!"

 

집에서 가만히 윈체스터를 다듬던 도원은 뜬금없는 소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용물을 받았다.

발신주소지가 없다.

 

"누가 보낸거요?"

"낸들아나? 확인 싸인좀 해주쇼."

"싸인?"

 

우체부는 도리어 싸인이 뭐냐고 묻는 도원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싸인 몰라? 싸.인."

"글쎄 그러니까 그게 뭐.."

"아 됐고, 그냥 이름이나 적어요."

 

성질 급해보이는 우체부는 서류에 도원의 이름 석자를 받아내고는 휭 사라졌다.

 

"싸인.."

 

그새끼 싸인이 뭔지도 안알려주냐. 내일 학교가서 물어봐야겠다. 

아, 그자식 죽었지.

 

아직 죽었다는게 실감나지 않는것이 씁쓸했다.

 

방안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소포를 굴려봤다.

달각달각.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신자만 적혀있는 소포. 주소를 알려준 사람은 같은 과 녀석들 외엔 없을텐데.

누런 겉봉을 뜯자 곱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가 있었다.

리본을 풀고, 포장지를 뜯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마음에 불안을 품고.

 

"아 씹..."

 

절로 욕이 나왔다.

상자 안엔 그 동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잘린 손가락이 들어있었다.

내다버릴 심산으로 다시 뚜껑을 닫고 포장지를 우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장지 안에서 툭, 쪽지가 떨어졌다.

 

-준비됐나?

 

 

박창이.

고고한척 하던 마적따위가 그깟 깡패가 되어 나타난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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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로 대필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고 버스를 타려 지갑을 열었다.

토큰이 하나도 없었다. 가까운 가판대에 가서 천원을 꺼내 가판대 안으로 밀어넣었다.

 

"토큰 천원어치 주세요."

"예예~."

 

짜르륵. 천원어치의 토큰이 가판대 위로 쏟아졌다. 주인이 성의없게 준 탓에 몇개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도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숙여 떨어진 것을 주웠다. 끼익 하는 쇳소리가 들리며 가판대의 문이 열렸다.

 

"어이쿠야, 죄송합니다. 바닥으로 떨어질줄은 몰랐네요 이거. 주워드릴게요."

 

웃음섞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낙천적인건지 바보인건지. 어떤인간인가 얼굴이나 보자며 허리를 들고 주인을 쳐다봤다.

주인과 도원의 표정이 동시에 경악으로 굳어졌다.

 

"윤태구?"

"어라?박도원이?!"

 

동시에 큰 소리로 외친 덕에 주변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쏠렸다. 태구는 예의 그 커다란 손으로 도원의 어깨를 덥썩 잡고 흔들었다.

 

"이야아아아아! 박도원이! 너도 왔냐? 어? 너도왔어? 우와아아아아! 야 난 나 혼자만 온줄알고 섭섭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네? 엉? 으하하하하하하!"

"윤태구, 그만 흔들어."

"반갑다~!!!! 반갑다고 박도원이!! 몇년만이냐 이게?"

 

계속되는 흔들림에 머리가 띵해진 도원은 그만 태구를 밀쳐내고 말았다. 밀쳐도 꿋꿋하게, 이번엔 끌어안고 얼싸얼싸 둥기둥기.

 

"야야. 도저히 안되겠다. 오늘 장사고 뭐고 때려친다. 한잔 하러가자!"

"뭐? 낮부터?"

"뭐 어때! 잠깐만 기다려라!"

 

태구는 입이 귀에 걸릴것 마냥 샐쭉 웃었다. 뒤뚱거리며 가판을 접기 시작하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도원은 문득 손목시계로 눈을 돌렸다. 아직 1시. 점심때였다.

 

"내가 자주 가는데가 있어. 거기 주모가 진짜 밥을 맛있게 한단말야. 가자가자가자! 응? 가자가자!"

 

우악스런 손길에 이끌렸다. 앞서가는 태구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혼자 쫑알대며 푸하하 웃었다.

하나도 안변했구나. 안도 비슷한 쓴 웃음이 입에 걸렸다.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당주인은 태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지정석-로 안내했다.

주인은 처음보는 말쑥한 남자를 힐끗 보며 물었다.

 

"이 총각은 누구야? 인물 한번 잘났네~."

"오래간만에 만난 내 친구놈이야. 내가 여기 맛좀 보게 해주려고 데려왔어. 오늘은 더 맛있게 해줘야된다?"

"알았소~. 걱정마시오."

 

식탁위가 금새 차려졌다. 내용물이야 별거 없는 김치찌개에 된장류라지만 한번 떠먹어 본 맛은 좋았다.

 

"맛있지? 맛있지?"

"그래. 맛있네."

"흐흐흐 거봐. 너도 좋아할거라고 했잖아. 자~ 한잔 받으시라."

 

소주잔이 오갔다. 한병이 비워지고 두병. 세병.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쉬지않고 털어내었다.

 

"햐~ 나는 정말이지 귀신소굴에 떨어진줄 알았다니까. 새카만 밤이었는데, 갑자기 내앞에 도깨비불이 달려드는거야. 

도깨비 불 피해서 요리조리 도망갔지. 나중에 알고봤더니 고속도로에 떨어진거였더라고 크크크크큭."

 

그 언젠가 귀시장에서 총알을 피하는 태구의 모습이 떠올라 도원이 크게 웃었다.

 

"나 너 그렇게 웃는거 처음본다. 술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아진거냐? 크큭 그래 한잔 더 받아."

 

도원은 술잔을 받으며 한참 생각에 잠겨있었다. 난 어땠더라..

 

"나는.."

"응 그래."

"..모르겠다. 기억이 안나. 근데, 내 말, 내 집.. 다른건 모두 만주에 남겨놓고 왔는데, 총만은 손에 꽉 쥐어져 있더라.

내 윈체스터.. 그것만. 필요도 없는 것만 가지고 와버렸어. 송이.. 송이는 지금쯤 할머니가 되어 있을거야. 올해가 몇년이더라?"

"응? 몇년이더라? 가만..아, 1980년."

"80년.. 킥킥. 거의 50년이나 흘렀네. 환갑 넘었겠다 송이.. 나연이는 몇살일러나."

"킥킥. 취했냐 박도원."

"안취했어."

"취한놈들은 꼭 그런 말을 하지."

"그러냐."

"그래 임마."

"참. 윤태구."

"잉?"

"박창이도 왔다."

 

쨍그랑.

 

"뭐?"

"소주잔 깨졌다.."

"박창이? 그놈도 왔..뛃!"

 

주인이 아까운 소주잔을 깼다며 태구의 머리를 때리는 바람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다.

뭐라뭐라 욕을 들으며 깨지는 태구를 넌지시 바라보던 도원은 멀거니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날카로움 대신 흐리멍텅, 세상에 안주해버린 자신의 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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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후배중에 송이와 꼭 닮은 여학생이 있었다. 그 후배를 볼때마다 만주에 두고 온 송이가 생각나 자연스레 잘 해주게 되었다.

도원은 후배를 점차 '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끼고 아꼈다. 과거의 송이에게 잘해주지 못했던걸 생각해서 더욱 아껴주었다.

그랬던 '송이'가 사라졌다. 그날 같이 있던 후배에 의하면 무서워보이는 남자들이 와서 송이를 끌고갔다고 전한다.

일부러.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그 남자 이름이 '박창이'랬어요."

 

다른 이야기를 더 들을 새도 없었다. 박창이라는 세 글자만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으로 뛰쳐나와도 보이는것은 아스팔드 건물들과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들 뿐이었다.

 

이곳은 만주가 아니었다. 박창이가 있는 곳도 알 수가 없었다. 귀시장에 몇번 들락거리면 정보를 얻을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현대의 사람들은 마적단-깡패들-과 마주치는 일이 적었다.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절규했다.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왜 하필 송이를, 이제 난 편하게 있고 싶은데.

따르르릉- 도원의 근처에 있던 공중전화가 울렸다. 직감으로 좋지 않은 전화라는걸 알았다.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도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렸다. 세상이 고요해지고 전화벨소리만 들리는 듯한 착각까지 일었다.

 

조심스레 전화기에 손을 얹었다. 따르릉-몇번의 울림이 더 있고나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도원도 말이 없었다. 전화에서는 비명소리만이 가득 들려왔다.

 

"송이를 놔줘."

 

도원이 입을 떼자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그 웃음소리가.

 

'송이? 송이라니. 넌 아직도 만주에 살고있나?'

"놔줘. 그앤 나와 아무 상관 없어."

'아무 상관 없으면, 그렇게 끈적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는건가 박도원이는?'

"닥쳐. 난 송이를"

'와라. 여기 종로구에 있는 명월빌딩이다. 네가 온다면 여자는 풀어주마. 널 만나기가 워낙 힘들어서 말이지. 어찌나 튕기시는지.'

"삼류소설이로군."

'따분한 신파가 되기 전에 말야.'

 

전화가 끊기고도 한동안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뚜- 뚜- 끊임없이 이어진다.

박도원과 박창이의 지겹도록 이어지는 관계처럼 연신 들려온다.

 

택시를 타고 빌딩에 도착하자마자 뛰어 올라갔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자 퀘퀘한 담배냄새가 덮쳐왔다.

양쪽에 시커먼 사내들이 버티고 서서 도원을 노려봤지만 그 눈빛을 하나하나 응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송이 어딨어?"

"나는 안찾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무용 의자에 앉은 창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벙찐 얼굴의 윤태구가 있었다.

 

"윤태구. 네가 여긴 웬일이야?"

"어.. 어 박도원이."

 

태구는 웃는것도 우는것도 아닌 얼굴로 도원을 반겼다.

내가 초대했지. 의자에서 빙글 돌며 일어난 창이는 손을 까딱거리며 수하를 불렀다. 짧은 지시로 송이를 풀어주라 이르고 도원과 태구의 어깨를 감쌌다.

 

"오래간만이잖아. 안그래? 예전에는 그렇게 싸웠어도 그리운건 그리운거지. 지금 그 시절에서 넘어온 사람은 우리 셋 뿐이야. 나, 박도원, 윤태구. 동지의식이라도 가져야 되지 않겠어?"

 

창이답지 않은 살가움에 태구는 잔뜩 긴장했다. 손에는 총도 없다. 그리고 이제 손가락 귀신도, 열차강도도 아닌 평범한 가판상인으로 살고 있다. 거슬리지 않는게 최우선이다. 그런데

 

"이딴식의 동지의식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하이고야 이 박도원아. 태구가 울상을 짓는것도 모르는지 도원은 대뜸 거절의사를 밝혔다. 창이는 아직 살가움을 풀지 않고 도원의 어깨를 몇번 더 툭툭 쳤다.

 

"괜찮아. 날 세우지 마. 긴장풀어? 난 그냥 너희들을 손님으로써 맞이하고 싶은거니까."

"네놈의 손님맞이 방식은 참 더럽구나?"

"그게 나답잖아."

 

부드럽게 웃는 눈에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었다. 도원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창이의 손에 이끌려갔다.

 

"에, 에레레? 야! 어디가?"

 

말도없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창이와 도원을 바라보며 연신 어디가냐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언듯봐도 비싸보이는 외제차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셋은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건물들의 간판이 점점 화려해는가 싶더니, 차는 홍등가에서 멈췄다. 내리라는 창이의 말에 도원이 다시금 으르렁댔다.

 

"이게 무슨짓이야?"

"뭐가?"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대낮부터 홍등가? 너 취미 참 많이 변태스러워졌구나? 박창이."

 

운전석에 있던 수하가 발끈하며 주먹을 올리자 창이는 쉬쉬 손을 내저었다.

 

"일단 내려."

 

낮이라 쉬고 있는 창촌 여자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그런 눈길을 대여섯번 더 받은 후에야 가장 어두침침한 건물 안의 큰 룸에 도달했다.

조명이 어두웠다. 커다란 테이블에 주안상이 크게 차려져 있었다. 창이는 도원과 태구에게 턱짓을 하곤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부하들을 모두 내치고 방 안에는 셋만이 남았다. 언젠가의 그때처럼 셋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창이는 크게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근데 여기 되게 비싸보인다.."

 

태구의 말에 창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윤태구가 돈걱정 하는 모습을 다 보는군. 걱정말고 마음껏 마셔."

"..그래도 되냐?"

 

태구는 샐죽하게 웃으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포크를 집어들어 앞에 있는 안주들을 찍어댔다. 조금 전까지의 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먹을것 앞에서 행복해하는 바보에 도원은 한숨을 쉬었다.

송이도 풀려났겠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기왕 이렇게 된거 버텨보자고 마음먹었다. 창이가 자신의 앞에있는 위스키 병을 들어 도원의 잔에 따랐다. 갈색의 음료가 잔에 채워지는것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늘었군."

"누구씨 때문에."

"그 누구가 나는 아니겠지?"

"잘 아네."

 

룸에 있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새벽이 되자 붐비는 홍등가의 소란이 들려오는 듯 했다. 

창이는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넣으며 널부러진 둘을 바라봤다. 

애초부터 뻗은 태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원까지 꼭지가 돌 정도로 취할줄은 몰랐다.

언제나 절제가 몸에 배인 남자였다. 항상 주위를 경계하고 자신을 반듯하게 지킬줄 아는 자였건만. 

윤태구. 그도. 자신의 목표였던 남자가 저리 허무하게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을 줄이야.

술에 취해 빨개진 얼굴로 웅얼거리는 태구와 도원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미친새끼들. 사회와 타협이나 하는 쓰레기가 된 주제에. 이거 버림받은 기분인걸."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불러들여 윤태구를 집으로 보냈다.

 

"아. 쌍칼."

 

부하가 늘어진 도원의 팔을 붙잡자 이내 그를 불렀다.

 

"예?"

"그녀석은 내 방으로 데려와."

"방으로 말씀이십니까? 이녀석이 누군지 알고"

"두번말하게 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창이는 도원의 위스키잔을 만지작거리다 부하가 도원을 업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를 향해 위스키 잔을 들었다.

 

"건배."

 

도원이 마셨던 곳에 입술을 대는 입가가 호곡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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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한장 입은 상태로 둘은 계속해서 몸을 부벼댔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 손이 도원의 몸을 지분거렸다.

농밀한 애무로 취기가 점점 깨고 있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혀가 얽혀들어와 치열을 훑는다.

입안이 얼얼했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까마득해지는 찰나 차가운 손이 몸을 훑었다. 움찔- 열기로 뜨거워진 몸이 흔들렸다.

웬만해선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의 도원은 자신을 제어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번이나 창이의 손길에 소리를 내었다. 부끄럽다는걸 알면서도, 이래선 안된다고 속으로 수없이 외치면서도 몸은 마음과는 다른 반응을 내어주었다.

 

깊은 새벽녘에 시작된 섹스는 해가 어스름히 뜰때 즈음 끝났다. 여태 섹스를 하면서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했던 적이 없었을 만큼 격정적이었다.

창이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도원도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창이의 정액으로 끈적해진 그의 허벅지를 닦아줄때 조차도 말이 없었다.

도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입을때도 담배만 피우면서 뒷통수를 바라보았다.

 

모든 옷가지를 다 입고 방문을 나서는 도원을 향해, 창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없는 셈 치자."

"......"

"일장춘몽. 꿈으로 여겨라."

"그래."

"잘가라."

 

도원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창이의 입에 걸린 비릿한 웃음을 보지 못했다.

 

대충 보이는 곳만 수습 한 후 건물에서 나왔다.

고개를 들어올려 창이가 있을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이는 내다보지 않았다.

가슴 한켠에 알싸하게 퍼지는 감정을 애써 무시한 채 걸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했는데,

 

"선배! 어디갔다 이제온거에요!"

 

헐레벌떡 자신에게 달려온 후배는 격앙되어있었다.

 

송이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어. 

납치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이 나갔나봐요.

이게 다 선배때문이야!

그만해!

송이 이제 어째? 그 어린 애가.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귓가에 확성기를 대놓은마냥 울려댔다. 후배가 멱살을 잡고 흔드는 턱에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송이 어딨어?"

 

병원의 위치를 듣자마자 멱살을 뿌리치고 달렸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본 송이의 모습은 모습이 아닌 몰골이었다. 사람도 아닌 짐승의 몰골.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있었고, 입술은 터져있었으며, 두 눈의 흰자위는 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처럼 새액새액 쉬던 숨소리는 그릉그릉, 짐승의 울음을 닮아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송이야, 하고 불렀다. 송이라는 이름이 불려지자마자 고음의 비명을 질렀다. 눈을 까뒤집고 경기를 일으키자 간호사들이 들어와 도원을 쫒아내고 문을 닫았다.

그나마 병실 문에 나 있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발작하는 송이를 볼 수 있었다.

 

-선배때문이야

 

자신에게 원망스럽게 외쳐댄 후배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이게 다 선배때문이야

 

아냐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송이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와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후배의 비난이 고장난 테잎처럼 반복해서 들려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질끈 씹은 입술이 파랗게 멍울져갔다. 웅웅웅, 막은 귓속에서 또다른 비명이 들려오는 듯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는데, 안색이 파랗게 질린 여간호사가 경련하듯 떨리는 손을 들어 쪽지를 전해줬다.

쪽지를 펴보자마자 눈에 익은 필체가 보였다.

 

-이제 그만 돌아와. 원래의 박도원으로.

 

달아나는 간호사의 구둣소리가 머리에 쾅쾅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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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숙취로인해 깨질것같은 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장사하러 나왔는데 눈앞에 있는 녀석은 어찌 그리도 쌩쌩해서는 연신 졸라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실탄을 구해달라는거냐?"

 

재차 확인하듯 묻는 말에 도원은 대답은 하지 않고 태구의 눈을 지긋이 쏘아봤다.

 

"얌마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실탄을 구해? 말이 되는 소리좀 작작하고 그만 가라. 나 골아프다."

"너 저번에 만물상 하는 친구 하나 있다며?"

"만길이 말이냐? 야 그거야 순 얼굴만 만길이지 애가 행동도 둔하고"

"그 친구 통해서 당장 구해."

"허허~ 이거 또 억지부리네. 야, 하나만 말해두겠는데, 지금은 실탄 가지고 있으면 징역이야 징역. 불.법.무.기.소.지. 너 지금도 그 윈케네인가 뭔가 하는 그 총도 걸리면 넌 바로 끽이야. 나보다 더 배운놈이 그것도 모르냐?"

"징역이던 뭐던 상관없으니까, 구해. 구해만 줘."

"아잇! 진짜 말귀 못알아먹네! 안된다면 안돼!"

"송이가!"

 

급작스레 윽박을 질러대는 도원에 깜짝 놀랐다. 

 

"송이가.. 씨발, 송이가... 그자식때문에.."

 

한참을 도리질을 해댔다.

 

"죽일거야. 박창이 그새끼 죽여버릴거야. 이게 그놈의 의도한 바라면 기꺼이 따라주겠어. 죽인다. 죽여버릴거라고."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라."

"부탁이다 윤태구."

"박도원이가 화내는 모습을 다 보네. 허허이."

 

태구는 입맛을 다시며 뒷머리를 긁었다.

 

 

 

 

*완결만.

 

연막탄의 안개 속에서 도원은 윈체스터를 두 발 쐈다. 산탄총의 소리에 시위대는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전의경들은 진원지를 찾아 헤매이었다. 안개 속에 피 흘린 채 쓰러진 놈은 창이가 아니었다. 그가 쌍칼이라며 데리고 다니던 놈 일 뿐.

 

박창이!!

 

분노의 일갈은 시위대의 비명소리에 먹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분명 봤다. 이 곳에 있다. 박창이는 이 곳에 있다. 죽여버릴 것이다. 송이를 죽이고 내 소중한 것들을 모두 망쳐버린 박창이를. 

 

박창이!!

 

철컥, 귓가에 총을 장전하는 날 선 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꾼 출신의 도원은 짐승같은 몸짓으로 어느 새 총신을 소리가 난 곳으로 돌려놓았다.

 

날 찾았나?

 

그토록 증오하던 박창이가 서 있었다. 조금 전 날렸던 윈체스터의 두발 중 한발은 창이의 팔을 날려버린 채였다. 창이는 쓰게 웃으며 남아있는 한 손으로 도원을 노렸다. 

 

차라리 만주에서 도적질 하던 때가 나았지. 안그래? 그때는 손가락 하나였는데 지금은 팔이 하나 날아갔네.

죽어 박창이.

우리 예쁜 박도원이. 얼굴이 이리 상해버렸네. 내가 크게 잘못했다.

죽어!

 

윈체스터가 끼릭거리른 소리를 내며 다시 총알을 발사하려는 찰나, 도원의 허벅지에 총알이 박혔다. 

 

이 미친놈들아!! 제정신 아닌 놈들아!! 니네는 씨발 제정신 들이냐! 말로 해결하면 될걸 왜 총들을 들어 이 미친 새끼들아!!

 

태구는 울면서 쌍권총을 도원과 창이를 향해 나눠 겨누었다. 연막탄이 걷히며 시위대로 가득 찼던 도로는 총을 들고 있는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허벅지를 관통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창이에게서 총신을 거두지 않는 박도원과, 다시금 총신의 방향을 윤태구에게 돌린 박창이와, 두 사람에게 쌍권총을 겨눈 채 오열하는 윤태구.

 

그 세사람의 주위를 둘러 싼 전의경들은 그들을 향해 조용히 최루탄을 장전했다. 준비, 발사. 세 발 중 하나는 어떤 이의 몸통을 가격했고, 두 발 중 하나는 어떤 이의 얼굴을 스쳐지나갔고, 나머지 하나는 그들 사이에 옆에 떨어져 희뿌연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비명은 오로지 한 사람의 것이었다. 이거 왜이래! 난 말리러 온 것 뿐이라고! 이봐들! 내 말 들려! 그러나 검은 옷의 악마들은 곧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러 무기를 들었다.

 

돌격, 전진. 

 

사방으로 진동하는 구타 소리 이 후로는 끔직한 정전 뿐이었다. 악마가 그들을 잡아먹어버렸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길다란 핏자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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