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샵 도원

from 놈3 2013. 7. 20. 23:40

본사에서부터 올해 새로 수입을 시작한 물품이 도착했다. 도원은 직원들과 함께 와인을 매장에 진열하기 시작했다.


"박매니저님~ 전화받으세요."


물품 도착 확인 전화였다. 확인메세지를 보낸 후 상사의 질낮은 농담을 멋쩍은 웃음으로 응수하고 있을때,


'매니저님!!!! 큰일났어요!!!'


사무실로 달려온 한 여직원의 다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다음 대사를 들은 도원은 상사가 여전히 떠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그분 오셨어요!'


새하얗게 질린 직원을 뒤로하고 매장으로 갔다. 울것같은 표정의 직원들과, 그 사이에서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그'가 있었다.


"박창이."


이를 갈며 세글자를 뱉어냈다. 창이는 피식 웃으며 거만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어, 박도원 매니저. 고객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야? 다시한번 말해봐봐."


저 개객기가. 

도원은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빛을 한숨으로 거둬내고 다시금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가 입고리만 살짝 올렸다.


"오늘은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박창이씨."


미소가 날카롭다.


"아 뭐, 다른게 아니고. 저번에 내가 주문한거 있지? 그거 왔나 해서."


아 그거.. 도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바닥을 주먹으로 콱 내리쳤다.


그랑크뤼 르 뮈지늬(Le Musigny). 생산량이 적어서 가뜩이나 구하기 힘든 와인을 주문한 개객기.

블랙리스트인 동시에 최우수고객인 창이의 주문덕으로 매장은 물론 본사까지 그 와인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게 생각나 뒷목이 아려왔다.

마침 또 본국에서 판매를 일시중단할게 뭐람.


"르 뮈지늬라면 사무실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만."


도원의 대답에 창이는 만족스러운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그럼 잘 비치해 놔. 와인샵이면서 그런것도 안들여놓으면 어째."


하면서 빙글 몸을 돌려 매장을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도원은 몸의 피가 땅끝으로 쏠리는 느낌을 받으며 재빨리 창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안..찾아가십니까?"

"아~. 내가 사려는게 아니고, 그냥 이런 고급 매장에 그런 와인이 없는게 안타까워서 말야. 아까 말했지? 잘 비치해 놓으라고. 다른 손님 사가게 말야."


창이는 전신경련을 일으키는 도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기분좋게 하하하 웃었다.


도원은 유치하지만, 이순간 만큼 진심으로 빌었다. 

넘어져라. 넘어져라. 가다가 넘어져라. 넘어져서 이마깨지고 코깨져라.

신은 무자비했다. 도원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원따위 무참히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빨간색 마티즈를 끌고 매장을 빠져나가는 창이를 창문너머로 지켜보면서 계속되는 한숨에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디올옴므 빼입고 마티즈?

디올옴므에 마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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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box 조이스틱을 미친듯이 두드리며 낄낄대는 모습이 영락없는 미친놈 같았다.


"이런 박창이같은놈."


태구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게임오버가 뜨는데도 캭캭대는 창이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 빌어먹을 박창이.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방 한가득 차지하는 비싼 수트는 웬말이며, 방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저 수많은 와인병들은 무엇일까.

개념이 있다면 방 두칸밖에 없는 좁은 집에 저렇게 짐을 많이 두면 안되지라며 수없이 면박을 줘도 소용이 없었다.

집구석에 박혀서 게임만 하는 주제에 브랜드와 와인을 사대는 출처없는 돈들은 어디서 나는 것일까. 더불어 게임 소프트웨어까지.


그러니까 그날. 그래 비오는 그날. 주워와서는 안되는 거였다.

눈빛이 꼭 뭐 싼 강아지 같아서 덜렁 데려오긴 했는데, 알고보니 이리 위험한 인물이었을 줄이야.


"야임마. 넌 게임오버가 뜨는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연신 낄낄대냐?"

"아? 아아~ 내가 오늘 그녀석을 보기좋게 한방 먹였거든."

"그녀석? 그 네가 짝사랑 한다는 녀석말이냐?"


'짝사랑'이란 말에 열심히 팔근육을 움직여 조종하던 조이스틱이 움찔 멈추었다. 

태구는 콧속에 손가락을 넣어 열심히 휘저으면서 창이의 반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저 뒷통수만 봐도 이제 표정을 알 수가 있어.


"씨발, 누가 짝사랑이래? 너 미쳤냐? 누가 사내새끼를 좋아한다는거야? 나 그런 취미로 만들지 마라."


역시나, 가오잡는답시고 잔뜩 굳힌 표정으로 태구를 돌아보았다.


"허이구~ 그러셔? 너 하는짓 보면 딱 코찔찔이 초딩이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는 모양인데그래?"

"이상한데 대입시키지마!!!!!!!!"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화를 내는 창이를 보면서 태구는 혀를 끌끌 찼다. 가만보면 놀리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다.

화면 한가득 떠있는 게임오버 화면을 보며 시바시바 욕을 해대던 창이는 엑스박스를 구석에 몰아넣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조금 전까지 웃어제끼던 주제에.


저 출처도 모르는 놈을 언제까지 데리고 있어야 하는지.. 앞으로를 생각하자 한숨이 나오는데, 방안에서 기절할듯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또 신상에 때가 탔나 드라이클리닝이 잘못되었나 갖가지 의문점을 안고 창이의 굳게 닫힌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오는 공기가 탁하다.


"왜? 또 무슨일이야?"

"야.. 너 이거 마셨냐?"


불쑥 들이미는 와인병이 낯익다. 전날 새벽에 목이 타서 한모금 들이켰던 와인의 병이었다.


"아.. 그거? 한모금만 마시려고 했는데말야, 맛있더라? 미안하다."

"너 이 새끼야."


멱살까지 잡혔다. 눈빛이 살벌했다. 여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아. 이거 참 난감한 상황이다.


"아 거참 와인 하나가지고 살인나겠네. 내가 사줄게. 사주면 될거아냐. 얼만데?"


피식 웃는 입매가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


"새끼야. 이거 한병 네 전세값이거든."


네?

오마이 갓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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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은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한 착각아닌 현실에 맞닥드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 박도원이?"

"네. 상당히 오래간만이네요 박창이고객님. 이틀만이군요."


언듯 화사해 보이는 미소로 응대하는 도원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그러니까 오늘은 화요일. 베르사체 세트다.


요일별로 브랜드를 돌려입긴 하는데, 세탁여부가 의문인 저 명품 수트들. 

팔뚝에 뭍은 흰 이물질은 2주전에도 붙어있었다.


창이는 진열대를 바라보다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는 뜨거운 눈길을 느꼈다. 

도원은 더럽고 한심한 놈이라는 의도로 보았으나, 창이에게는 그 눈빛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 좋아하는 취미 없는데.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닙니다. 둘러보시죠."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묻잖아."

"아니라고 했습니다."

"허, 고객 무시하나?"


아..개창아.. 개창아아...


비죽비죽 잘도 웃는 저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놈과 인연맺게 된건지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저 한숨으로 모든것을 가라앉힐수밖에.


"수트 팔꿈치 쪽에 먼지가 묻었습니다."


라면서 손수 털어주면서 겉으로는 방긋, 속으로 수도 없이 욕을 했다.


"흠.. 그래? 고마워."


빨래 안한거 들켰구나. 그놈의 공성전때문에 시간개념이 없어져서 빨래를 잊고있었다. 디올은 묵혀둔지 한달 반이나 됐다.

그래도 박창이답게 부끄러운 기색 하나 내비치치 않고 고개를 쳐들며 매장을 둘러보는데 직원들의 몸이 떨고 있다. 직원들도 저 먼지가 2주전 것이라는걸 알고 있을 터.


니들이 지금 나 비웃어? 나 창이야. 박창이. 만주최강 길드 길마이자 전 섭 최강군주 박창이라고. 박도원이 넌 항상 그 주둥아리가 문제야.


순간 도원은 창이의 눈빛에서 그려지는 반짝임을 읽었다. 동시에 팔에 돋는 소름은 자기가 본것이 잘못된것이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창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라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샵에서 들려오는 음율에 맞춰 천천히, 빠르게 돌았다.

매장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뭐야 저 미친놈은? 하하. 나? 나 창이야. 박창이.

두어바퀴를 더 돌던 창이는 우뚝 발을 멈추고 앞에 있는 와인을 가리켰다.


"이거. 테이스팅이 어때?"

"블루 넌 돈팰더말입니까? 스위트하기 때문에"

"이건?"

"드라이하면서도"

"이건?"

"그건 약간 드라이합"

"이건?"

".....스위트합니다."


이것저것 손가락질을 하던 창이는 꽤나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허릿짐을 지고 있다 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따봐."


네? 제가 지금 잘못들은건 아니죠?


"따 보라고."

"저.. 고객님. 매장에서는 행사시 시음 외에는 와인을 딸 수 없습니다."

"따."


고집도 보통 똥고집이 아니다. 창이와 도원은 그렇게 10여분을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창이의 손에 들린 와인병을 잽싸게 빼앗으려는데, 반사신경이 보통이 아니다. 미소가 점점 깊어진다.

창이는 주머니에 넣어둔 코르크따개를 손에 들었다.

도원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안"


돼라고 말하려는 찰나,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와인 코르크가 병에서 뽑혔다. 도원의 소리없는 비명을 즐기며 병 입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 달다.


"잘 보관 해 놔. 다음에 올 때 또 마시게."

"아, 돈은 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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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구는 쇼파에 드러누워 멍하게 티비를 보면서 한편으로 들려오는 창이의 욕 세레머니를 감상하고 있었다.

한참 방에서 욕지거리가 들리더니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리고는 잠잠.

창이가 저렇게 차분히 전화를 받은걸 겪어본적이 없었기에 의구심이 났다. 혹시 부모님에게 맞선 전화라도 온건지 궁금해져 창이의 방 문 앞에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대었다.


영어다. 개창이가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 태구는 몸에 오소소 돋는 소름과 귀에 박힌 귓밥을 털어내고 다시한번 들었다.

정말로 영어였다. 그리고 그동안 줄곧 들어왔던 창이의 씨봘이라는 발음이 범상치 않았다는걸 생각해냈다.

발음하나 기똥차다. 저거 완전 네이티브 스피커다. 오래전에 들었던 영어듣기평가가 생각나는구나.


한참이나 발음감상을 하고 있는와중에 갑자기 말소리가 멈췄다. 


"읭?"


문이 열렸다. 어째서인지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는 게임폐인 개창이가 서 있었다. 

아무리 눈매가 날카롭고 죽일듯이 사람을 노려봐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눈으로 노려봤자 무섭지 않다는걸 몸소 체험하던 태구에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리 꺼져."

"엉? 아 아니 난 네 영어로 대화하고 있길래 신기해서 그냥.."

"들었어?"


그런 몰골로 노려봤자 무섭지 않다는걸 체험한게 불과 조금 전. 그런데. 그런 몰골로 노려봐도 무서웠다.

안그래도 험악한 인상 더 험학하게 일그러뜨리자 태구는 손사레를쳤다.


"아아아아니 내가 무슨수로 영어를 알아듣냐? 나 하나도 못들었어! 진짜야! 맹세!"


믿는건지 안믿는건지 쯧, 혀를 차고는 다시 방 문을 닫았다.

태구는 그 자리에서 그냥 벙찌고 말았다.


오늘의 교훈. 박창이 화나면 무섭다. 그리고 정체가 뭐냐 너.



한참을 통화하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고 밖으로 나갔다 온 창이는, 얌전히 자기방으로 돌아가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스킬쓰는 소리가 댓번 울려퍼지는데도 욕도 안하고 얌전히 게임을 하는 박창이라니.

절대적으로 수상하다. 

이상하게 태구는, 저 게임폐인이 갑자기 느와르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조직에서 위협을 당해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서 남의 집에 은거하는 거물인사라던가.


정말이면 어쩌지? 창이가 없는 새에 갑자기 깍두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날 납치해가는거아냐?

박창이와 무슨관계야? 아무관계 아니에요! 거짓말 하지마라! 얼른 박창이가 있는 곳을 대!

끄아아아아아-


혼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없는 절규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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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쉬는날이라 집에 늘어져서 티비 리모콘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불연듯 달력으로 눈길이 미쳤다.

빨갛게 동그라미 쳐져있는 오늘은 분리수거의 날. 도원은 인상을 팍 쓰며 몸을 일으켜 일주일간 비축해놓은 쓰레기들을 양 손에 가득 담고 현관 밖으로 나왔다.


"아 씨발! 지는 뒹구는 주제에 왜 날 시키냐고!"


아래층에서 참으로 재수없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한두푼이 아닌 명품을 셋트로 입고 다니는 남자가 이런 허름한 주택에서 살 리가.


"야이 윤태구 이 빌어먹을놈!"


닫힌 현관문을 발로 뻥뻥 차대는 하얀 난닝구에 초록색 츄리닝바지를 입고 있는 저 사내가 무척이나 익숙했다. 아주 재수없게 익숙했다.


"박창이."


열심히 현관문을 차대는 창이의 발길질이 멈췄다. 식은땀이 흐르며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것이 느껴졌다. 와인샵도 아닌데 들려오는 차가운 저음의 그 목소리.

뻣뻣하게 고개가 돌아가고, 그 시선의 끝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도원이 걸렸다.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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