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세포군님에게 의뢰한 커미션. 센티널버스 기반. 너무 좋아서 같이 보자고 공유해요<
가자. 같이 가자. 어디든지, 얼마든지.
응.
네가 그렇게 대답해주었으므로, 나는 정말로 어디로든지 갈 수 있었다.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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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춥지 않은 겨울은 오랜만이라고 희준은 차가운 김을 뿜어내는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손이 꽁꽁 얼어 끝이 붉어진 채로 곱아있는데 하나도 춥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퍽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편의점의 두꺼운 유리문은 환기를 위해 아까부터 열어놓고 있었고 그런 것치곤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가 정말로 하나도 차갑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입김이 차갑고 손이 얼어붙은 건 편의점의 업소용 냉장고 때문이었다. 낮 동안 손님이라곤 점심시간 때 잠깐 점심을 사러오는 회사원들을 제외하면 거의 있지도 않은 시골 동네 모퉁이길의 손바닥만한 구멍가게 편의점에서, 희준은 비록 힘든일이라도 차라리 할 일이 있는 것이 더 반가웠다. 이 작은 편의점에 낮동안 새 물량이 들어오는 건 날에 따라 달랐다. (아니 어떻게, 편의점이 낮동안 새 삼각김밥을 안쟁여놓는 날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그거야 시골편의점에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시골도 그냥 시골이 아니라 깡이 앞에 붙는 시골이라면 더더욱.) 희준이 생각해봤을 때, 글쎄, 아마 월금토 정도일까. 그러니까 낮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희준은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일요일은 쉰다. 애인과 단 둘이 단칸방 살림살이속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며 이쁘게 지내는 날이 있어야 하므로.)이 유독 지겨운 날에 속한다. 다행히도 오늘은 금요일. 모처럼의 소일거리다. 그래서 희준은 몇 개의 박스를 택배 트럭에서 옮기는 와중 일어난 먼지를 빼내는 핑계겸 편의점의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아까부터 느릿느릿 새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꽁꽁 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몇 개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는데 그나마도 느릿느릿하게 하고 있느라. 새 물건이 적은 와중에도 편의점 인기메뉴들은 대부분 냉장고 안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냉장고 앞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면 그거야 손끝도 얼고 피부가 빨갛게 붓고 하기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희준에게 있어서 그런 건 별로 힘든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았다. 고통은 늘 멀었다. 특히 제몸에 오는 고통들이 그랬다. 왜냐하면 희준에게 진짜 고통이란 자기 몸에 오는 그런 것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지금 가장 큰 희준의 적은 심심함이고 졸림이었다. 무료함과 하품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 일부러 각세워 김밥들을 진열하고, 병들은 똑같은 형태로 앞을 보게 글자끝에 맞춰 대형도 맞추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에구. 다해버렸네." 희준은 조용히 한숨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기귀로 들리는 자기 목소리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신기하다고, 그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홀쭉해진 뺨위로 주름을 그으며 활짝 웃었더랬지. 저도 모르게 든 애인생각에 희준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너도 한결같거든, 이녀석아. 한결같이 그렇게 이쁘거든. 희준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심심함과 졸림, 무료함과 하품같은 것들이 적인 이유가 애인에게 있음을 새삼 깨달았기에. 빨리 알바를 끝내놓고 그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낮시간은 참 언제나처럼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목소리는 한결같다지만, 희준도 이제 마흔이 넘어 하얀 얼굴에 주름이 지고 피부가 턱밑으로 조금 늘어지기까지 했다. 냉장고 유리문으로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딜 봐도 마흔의 중년남자 그자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희준 본연의 외모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늙었다뿐이지 젊은시절의 흔적이 제법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약 이 십 년 전, 희준이 바란 이 십 년 후의 자신의 외모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과거의 자신과는 거리가 먼 외모의 중년이 되어있길 바랬었다. 그야말로 이 십 년 전 희준을 알았던 사람과 길에서 우연히 만나더라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스쳐지나갈 만치로 평범한 중년의 남자말이다. 그러나 마흔의 희준은 스물 몇 살 때의 희준이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 미쳤다. 학교마치고 학원가기 전 초코우유나 삼각김밥을 사러 편의점에 들리는 몇 명의 중학생들이 아저씨 얼굴보러 일부러 이 편의점에 들린다는 말까지 듣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학생들에게 잘생긴 얼굴이란 소릴 듣고 기분이 좋았던 건 거봐라 내가 참 이렇게도 여전히 잘 나간다고 애인에게 으스대며 그 말을 보고했던 딱 그 순간 뿐이었다. 애인은 작은 목소리로 키득대며 (최근 애인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기운이 점점 빠지고 있다는 증거일까. 희준은 그의 허공을 가르며 곧게 뻗어갔던 목소리가 때때로 그리웠다.) 두 손으로 희준의 뺨을 잡고 살짝 늘려댔다. 아이고, 그래서 기분이 좋으셨어요? 애들한테 먹힌다니깐 마냥 좋아요 아저씨? 그렇게 눈앞에서 예쁘게 웃는 애인과, 그런 애인에게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소리로 아야, 아야 라고 말하며 애인의 두 손목을 살짝 잡았던 바로 그 순간. 그 뒤부터는 마냥 걱정 뿐이었다. 편의점에 들리는 애들의 입소문을 타고 문희준이란 사람이야기가 여기저기로 퍼지는 것이 걱정됐다. 누가 들으면 자의식과잉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일의 심각성은 오로지 희준 본인과 그의 애인 둘만은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이십년에 가까운 도피생활을 하다보면 말이다.
사실 문희준은 조직을 뛰쳐나오기 전, 조직의 내부에 남아있는 자신의 신상명세를 미묘하게 고쳤다.
아주 미묘하게, 뭐라 말하기도 애매하게 고쳐놨기 때문에, 누구든 언뜻 본다면 딱히 이전과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게 희준의 계산이었다. 거의 원래와 다를바 없이 두고 아주 미묘한 부분을 바꿈으로써 어딘가를 애매하고 모호하게 만드는데 그 어딘가가 딱히 어딘지를 잘 모르겠는 느낌으로 얼버무리고 싶었다. 그리고 희준의 그런 계산은 아주 성공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들에게 잡힌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희준의 수정이란 말하자면 이런 거였다. 그를 거두어준 고아원의 지명을 한끗차이로 수정한 것. 수정한 지명에 실제 희준이 나온 고아원과 똑같은 이름의 고아원이 있었고 희준은 그곳을 찾기위해 전국을 다 뒤졌었더랬다. 그리고 신체사이즈. 정말 주의 깊게 보았어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 발사이즈나 허리둘레 뭐 그런 것들. 그리고 희준 스스로도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증명사진 조작이었다. 포토샵같은 흔적이 남는 프로그램은 일체 쓰지 않았다. 조작, 다시 말해 가공도, 아주 사소한 것들을 전혀 눈에띠지않을만큼 했다. 희준은 사진 속 자신의 쌍꺼풀 두께를 mm단위로 두껍게 만들었다. 콧망울의 벌어짐정도역시 mm단위로 조절했다.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을 mm단위로 넓혔고, 눈 아래 애교살의 부품정도를 수정했다. 언뜻보면 누구도 문희준의 실제과 사진이 다르단 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희준의 이러한 조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이었고, 희준의 그러한 계산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문희준의(그리고 그들의 재산, 소유물 취급이었던 희준의 애인의) 실물을 봤던 사람들은 줄어들어 둘의 행방을 쫓는 이들은 점점 더 조직에 남아있는 문희준 신상명세의 사진에 매달리게 되었다. 처음 둘이 손잡고 도망쳐 도피생활을 이어가던 때보다 점점 더 그들에게 위치를 들키는 날의 간격이 길어지고 있음으로 희준도 그 사실을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처음 그들에게서 도망쳤던 때보다 이 십 년이나 흐른 지금이 훨씬 과학도 발달하고 전자기기도 우수해졌는데, 그들은 여전히 둘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뻔한 거 아니겠는가. 신난다. 행복하다. 나 똑똑하다. 희준은 애인에게 칭찬받고 싶었지만, 자기보다 어린애한테 칭찬받고 싶어하는 애같은 마음을 드러내기 싫어 꾹꾹 참았더랬다. 그 녀석은 도리어 화내려나, 고작 한살차이에 뭘 또 어린애 취급이냐고. 뭐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은 언제나 내거니까. 널 생각하는 내 마음은 그러니까 언제나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내 마음대로.
하여간 그 때문에 희준은 과거의 자신과는 상당히 달라진 외적인 모습의 자신을 기대했고 그런 기대에 미치지 못한 지금 모습이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소문이 멀리 퍼지는 것도 두려웠고 말이다. 조직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민간기업 따위가 아니었다. 여전히 국가의 이름을 내세운 채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의 공무원을 거느리고 있는 국가기관이란 말이다. 전국에 그 수가 얼마나 많을 터이고,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그 기관소속 공무원이 없을 거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역시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희준은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해외에 나가야 안전도를 더 높힐 수 있는데, 희준은 솔직히 해외로 도망 칠 자금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역시 범죄뿐인가? 애인의 반대에 부딪혀 그동안 나쁜짓으로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녀석도 당장 절박해지면 별 수없지 않겠어? 킥킥. 애초에 도망자신세로는 여권도 만들 수 없으니 해외로 아주 튈려면 가짜여권 외엔 방법이 없는데다가.
희준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퇴근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늘 하는 잡생각을 오늘도 어김없이 처음부터 되새겼는데, 역시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것에 별 보탬이 되어주지 않았다. 희준의 가슴에 매달린 묵직한 걱정에 무게만 더 할 뿐. "에휴." 희준은 긴 한숨과 함께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폈다. 퇴근시간이 빨리 왔으면. 혼자서 반복해봤자 풀리지도 않는 걱정일랑 제쳐놓고 애인이랑 같이 저녁이나 차려 먹고싶다. 오늘은 김치찌개를 끓여야지. 길게 찢은 김치에 돼지고기 하나 둘둘 감싸서 뜨거운 국물과 같이 뜨곤 자기야 아~ 같은 거나 해야지. 그럼 그 녀석은 뭐라할까. 아 형 진짜 주책이야. 이럴러나. 그러고도 이쁘게 입을 벌리고. 아~ 하고 혀를 움직이며 귀여운 소리를 내고.
바깥공기는 여전히 미지근했다. 겨울 같지도 가을 같지도 않은 온기.
왠지 가슴 속이 간질간질 했다.
희준은 눈을 바깥으로 돌렸다. 여전히 문을 열어둔 걸 잊고 있어서, 이만 닫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준은 편의점으로 걸어오는 그들 중 누군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마치 제복인양 모두 같은 흰색 셔츠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어쨌든 계절도 겨울인데 점퍼 하나 입지 않고 검은색 정장바지를 서슴없이 구겨가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열댓명의 남자들이 대열을 이룬 채 능숙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모습이 희준에게는 제법 눈에 익었다. 오랜만이긴 하지만, 어쨌든 희준은 이런 상황에 제법 자주 처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저들은 참 한결같았다, 어쩜 저렇게 변하지 않고 계속 수로 밀어붙이는 수법을 반복할까. 전문용어로 다구리를. 열댓 명의 어깨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출입문을 막고 날 협박하고 날 두들겨패고 날 데려가려 하고. 정말로 그런다고 내가 그들 손에 떨어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 십 년 지난 세월을 그렇게 겪어놓고 아직도? 희준은 아주 가까워져 이제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는 개개인의 얼굴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이 거리를 좁혀온 순간 편의점 카운터의 밖으로 나왔다. 희준의 오른손이 성급하게 꿈틀거렸다. 손등 위로 튀어나온 푸른 힘줄이 마치 심장으로 이어지는 강물같았다. 저 열댓명의 남자 모두가 센티넬은 아니겠지만, 희준은 일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상대가 센티넬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 뒤는 쉬웠다. 가려 낸 센티넬에게 접근하여 강제 가이딩을 하면 된다. 일류 센티넬에게 강제 가이딩은 잘 먹히지 않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희준은 두 명 정도는 거뜬하게 해 낼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이것도 수를 좀 겸손하게 줄인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는 못 속이니까 현역 때의 수치로 자신을 가늠해선 안 되겠지.) 희준에게 강제 가이딩을 당한 센티넬은 순간적으로 세뇌를 당한 것과 똑같은 꼴이 되고, 그들이 자기편을 공격하는 상황을 노려 희준은 도망을 친다. 이때까지 늘 그런 식으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었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하면 되겠지. 희준은 편의점의 바깥쪽으로 열려있는 문에 그들의 손바닥에 닿는 것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아아, 지문. 그거 닦으려면 꽤 귀찮은데 말이지.
그리고 그들이 손만 뻗으면 희준의 얼굴에 거의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희준은 자신을 향해 사나운 얼굴을 해보이고 있는 그들 중 단 한 명도 센티넬이지 않음을 깨달았고, 아 그들도 학습이란 걸 하는구나 하고 뒤늦게 여유를 부린 것을 후회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냅다 편의점 뒷문으로 뛰어갔어야했다. 아냐, 어쩌면 뒷문에도 이미 저들이 포진하고 있을지도. 희준은 그제야 목아래까지 밀려오는 공포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아, 이건 정말로 다구리였다. 잡히면 끝장이었다. 그들은 이제 안일하게 굴지 않을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희준의 애인만큼 희준자신의 능력도 아끼며 그를 다치지 않고 잡으려는 노력을 했던 그들이었다면, 이제는 아니었다. 그들의 손안에서 망설임이, 머뭇거림이 사라졌고, 희준은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편의점 안으로 달려 들어온 남자의 거칠게 꺾인 손아귀가 자신의 목을 향해 뻗어온 그 순간,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는 다른 두 남자의 펄럭이는 상의 안쪽에서 장전 된 총을 본 순간, 그리고 그들이 망설임 없이 총을 빼내는 것을 본 바로 그 순간. 희준은 피를 토하고 편의점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시체를 떠올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일하고 있었던, 요 몇 개월 동안 꾸준히 다니고 있었던 이 평범한 편의점 바닥 위에 말이다.
너는 괜찮나? 내가 죽으면.
아니 절대 괜찮지 않을 텐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정말로 간신히,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죽음이란 상상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자 발끝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굳어버렸었는데 자신이 죽고 혼자 남은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희준은 그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하여 자신에게 나뭇가지처럼 뻗어 온 남자의 앙상한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 반동으로 과자를 담아 논 판매대가 와르르 뒤로 무너졌고, 희준은 손에 잡히는 것들을 정신없이 앞으로 던지며 뒷걸음질을 쳤다. 발 아래로 과자나 봉지같은 것들이 밟히는 소리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 자식 문희준!!" 양복의 그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고, 또 누군가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희준은 어느 샌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명이라고 부를만한 소리를.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그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희준이 유일했다. 그가 유일한 가이드였으니까.
"...칠현아."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손안에서 아무렇게나 쥔 과자봉지가 터져나가 과자의 부스러기들이 뚝뚝 떨어지는데 에도 희준은 그런 것들이 마치 자기와는 다 상관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오로지 그, 그 녀석에게만 전신의 신경이 다 뻗어가버린 것이다. 희준은 마치 눈앞에서 자기가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그가 달려오는 모습을 아주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거야? 그들이 날 찾았다는 걸 어떻게 안 거니. 이 시간, 그 녀석은 자고 있어야만 했다. 하루에 15시간 이상 자지 않으면 그는 하루를 지낼 체력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전력을 다해 달려오면, 그야말로 전신의 핏줄이 다 불거질만큼 그런 속도로 달려오면 넌... 그리고 희준은 그제야 오늘의 날씨가 왜 낯설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꼭 너와 만난 날, 그 날도 이런 날이었던 것이다. 겨울치고는 지나치게 따뜻했던 날. 가을이라고 말하기도 이상한 날. 파란 하늘을 하얀 구름이 닦듯이 흐르고 있었고 가끔씩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조금 차서 그제야 맞다, 지금 겨울이었지 참, 하고 옷깃을 여미던 그 날.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넌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하고 그렇게 말했어. 무척이나 까만 눈을 하고 그렇게.
희준을 향한 손들이 그의 어깨와 목에 몸통에 매달리고, 희준은 그들 모두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져 뒹굴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에도 희준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녀석에 대한 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달려오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그 비명과도 같은. 영혼을 그러모아 내지르는 것 같은.
그의 어깨와 등에서 빠르게 솟아나는 끝이 날카로운 강철의 촉수를 바라보며, 희준은 눈을 감았다. 그가 뽑아낸 긴 촉수들이 그를 또 얼마나 긴 잠에 빠지게 할까하는 생각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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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준이 자신의 가이드 능력에 각성한 것은 두 번째로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그의 집에 있을 때였다. 부모의 이름조차 모르는 희준이 키워준 고아원에서 나와야 했던 건 열 아홉 생일이 지나고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몇 개의 옷가지와 속옷이 들어있는 가방 하나만 덜렁 맨 채로, 희준은 적당히 자신의 외모에 넘어오는 여자들의 집에 굴러들어가 살았다. 때로는 남자의 집이기도 했다. 그들이 머무르라고 하면 그들의 집에 머물렀고, 그들이 그만 나가라고 하면 순순히 나가주는 그런 생활이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들을 여친 (혹은 남친)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생각되어서, 희준은 스쳐 지난 그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했지만 그들을 자신의 연인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더랬다. 그러지 말라고, 그냥 하룻밤 남친이라도 좋으니 날 너의 여자 친구로 삼아달라고, 이때까지의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해도 적어도 난 언제까지나 너의 여친이란 이름으로 너에게 기억되고 싶다고, 희준에게 그렇게 말한 그가 그래서 희준의 첫 여자 친구가 되었고, 그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 사귄 여자가 희준의 두 번째 여자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센티넬 훈련생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아직 훈련 중에도 제대로 힘을 발휘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지금보다 더 열심히 훈련해서 국가공무원이 되어 남들에게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말이다. 그런 목표가 있어서인지, 어쨌든 희준이 보기에도 그는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싶었다. 늘 지쳐서 집에 돌아오고, 양팔에는 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달고 있었다. 그는 뜻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어 언제나 상대의 힘에 튕겨나가버린다고 쓸쓸하게 웃었다. 하얗고 마른 팔에 죽죽 그어진 붉은 상처를 보며 희준은 알 수 없는 연민을 느꼈고 그런 그가 여자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가 쓸쓸하게 내려다보는 상처투성이의 팔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것 뿐이었다. 그럴때면 여자친구는 희미하게 웃었더랬다. 왠지 아픔이 가시는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날 밤도 여자 친구는 늦게 집에 돌아왔다. 현관에서부터 술 냄새가 나, 작은 원룸의 공기가 술냄새로 꽉 들이찼다. 희준은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그의 몸을 안아들면서 간신히 소파까지 걸어왔다. 술을 잔뜩 마셨다곤하지만, 여자는 전혀 취해있지 않았다. 취하지 않은 채로 그저 훌쩍훌쩍 울었다. 이러다 등급이 삼류로 매겨질지도 몰라. 여자는 속삭였다. 훈련기간도 끝나 가는데 난 아무에게도 이기지 못했어. 삼류로 등급매겨지면 국가 기관은커녕 민간기업에서 날 받아줄지 어떨지도... 희준은 여자의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들을 보았다. 손가락들에 죽죽 그어져 있는 새로운 상처들은 어제보다 더 붉어보였다. 희준을 눈을 깜빡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자기 옆에 있는데, 희준이 아는 그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조차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니. 희준은 슬픈 기분이 되어 애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센티넬 능력이 발휘된 건 희준이 그를 진심으로 연민하며 끌어안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원룸의 유리창이 터져나갈 정도였다. 순간 문희준의 가이딩 속에서 통제력을 잃어버린 여자의 능력이 파도치 듯 흘러넘쳐 버린 것에 대한 대가로써 말이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희준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희준은 이게 다 뭔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채 머리를 긁적여댔다. 원룸의 바닥이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으로 가득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다음날, 여자는 희준을 원룸에 둔 채 그대로 떠났다. 희준은 나중에서야 그 날 갑작스레 터져버린 연인의 센티넬 힘은 국가기관 소속의 일류 가이드들도 느낄 만큼 거대했다는 것, 그것을 몸밖으로 끌어낸 것이 다름아닌 희준의 가이딩때문이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재를 놓치는 법이 없던 국가기관의 공무원들이 희준을 데리러 올 것을 예감한-이미 그 조직의 생태를 몸으로 배웠기 때문에-여자는 그렇기에 희준을 떠난 것이었다. 조직이 먼저 둘을 떼어놓기 전에. "그 여자는 너에 비해 한참 모자라니까. 네가 아무리 물꼬를 틀어줘봤자 잘해도 이류정도에 그쳐. 그런 사람에게 맨투맨 가이드는 사치지. 아마 잘해봤자 세 명, ...다섯 명 정도를 한꺼번에 가이딩하는 가이드에 소속되게 될 걸." 희준을 향해 미묘하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설명하던 남자의 얼굴에 희준이 주먹을 날렸던 건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뒤, 두 번째 여자 친구와는 그걸로 끝이었다. 우연으로라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가이딩에 대해 정식으로 훈련받기도 전에 센티넬의 힘을 가이드 할 수 있는 일류 수준의 능력. 문희준은 국가기관에서 기초훈련을 받는 그 날부터 이미 다른 가이드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두각을 드러내는 수준으로 끝날일도 아닌 특출난 영재인지라, 기관 쪽에서는 금방 희준을 따로 훈련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희준은 그들이 시키는대로 순순히 훈련을 받았다. 마침 잘됐다 싶기도 한 것이다. 어쨌든 평생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걸 잘 배워서,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자. 희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난 일을 좋아해. 의외로 놀고먹는 것이 천성에 맞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늘 스쳐 지나는 하룻밤의 인간관계에 공허함을 느꼈던 거야. 서로 남자친구, 여자친구 하자고 이름 붙여준 그의 얼굴을 이렇게도 잊지 못하고, 두 번째 여자친구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희준은 또 생각했다. 그래 내 힘으로 돈을 벌자. 돈을 벌 수 있게 기술을 갈고 닦자. 그렇게 자리를 잡으면, 또 누군가와 사귀어야지. 어쩌면 사랑도 할 수 있을지 몰라. 사랑을 하게 되면, 연인이 생기면, 이번에는 정말로 잘해줄 거야. 내가 번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좋은 것들도 사주고. 희준은 목표가 생긴 것이다, 열심히 살았던 두 번째 여자친구의 옆얼굴과 비슷한 표정을 거울에서 볼 정도로 열심히 하게 만드는 인생의 목표가. 그리고 인생의 목표로써 돈은 제법 좋은 것이기도 했고.
희준은 누구보다 빠르게 국가자격을 땄다. 그의 가이딩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그 때가 문희준이 국가기관에서 훈련을 시작하고 정확히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때 이미 희준은 초보 가이드가 아니었다. 훈련생 시절부터 무던히 현장에 나가 실제 투입중인 센티넬러들을 직접 가이딩하는 등의 베테랑 못지않은 경험을 쌓은 것이다. 그것 또한 훈련의 일종이라고 선생은 말했지만 사실 그런 현장훈련을 훈련생 때부터 받은 것은 문희준이 유일했다. 또한 그것은 사실 노동법에 (센티넬-가이드 관련 법률은 노동법의 하위에 속했다)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희준은 그에 대해 아무 불만도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험을 쌓게 해준 점이 고마울 뿐. 이 때 희준은 이 국가기관에, 그리고 자신을 훈련시켜 준 그 선생에게 무한한 신뢰를 내심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고아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을 오로지 가능성, 재능 하나만 믿고 의식주까지 지원해주며 훈련시켜준 기관을 믿지않는 게 더 무리인 이야기였다.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날 때, 희준은 자기 몸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드럽게 반죽하여 선생과 기관에 뚝뚝 떼내주었던 자신의 마음들이 전부 더럽혀져 까맣게 굳어버렸을 때의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희준의 가슴속에는 어쨌든 희망이 있었다. 언제나 희망이란 것이. 그가 곁에 있어주는 한.
그가 곁에 있는 한.
겨울이었다.
겨울이라곤 하지만 퍽이나 따뜻해서, 바로 어제까지 매고 있었던 목도리를 풀지 않을 수 없었다.
희준뿐만 아니라 다들 두께가 애매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명색이 겨울이니 챙겨 입긴 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포근한 날씨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퍼를 벗을까말까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희준도 마찬가지였다. 희준은 몇 번이나 입고 있는 얇은 코트를 펄럭이며 몸통으로 공기를 흘러보냈다. 날씨가 포근한 탓도 있었지만, 희준은 자신이 긴장때문에 땀을 흘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희준은 선생에게 처음으로 네가 가이딩하게 될 센티넬을 만나게 해주겠단 말을 들었고, 덕분에 요 일주일간 설렘과 긴장에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희준은 연거푸 이마의 땀을 닦고 코트를 등 뒤로 펄럭여댔다. 역시 코트를 벗을까. 아냐, 너무 땀을 흘려서 셔츠에 땀이 배였을 것 같은데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첫만남 때부터 대체 어떻게 보여줄 수가 있겠어. 희준은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과 또 얼굴은 알지만 접점은 거의 없었던 기관의 높은 사람들과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 의사? 같은 사람들이 서있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려 그들이 보고 있는 건물을 빤히 쳐다보았더랬다. 대체 어떤 센티넬이기에 높은 사람들이 전부 다 나와 있는 걸까. 그들이 전부 마중나와야 할 만큼 대단한 레벨의 센티넬이라고? 그런 사람을 나와 짝짓겠다고? 그런 긴장에 희준은 참을 수 없이 숨통이 조여 왔다. 쉴새없이 코트를 펄럭여대는 희준을 바라보며 그들 중 누군가는 "그렇게 더우면 벗게나. 오늘은 날이 이상하게 따뜻하군." 그렇게도 말해주었지만, 희준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수 밖에 없었다.
이 당시, 희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앞으로 희준은 그와 손을 잡고 그저 멀리 멀리 도망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그것도 약 이 십 년 가까이. 그리고 그들의 도피생활은 제법 성공적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던 깡시골에서의 생활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그 깡시골에서 희준은, 바닥이 닳은 삼선슬리퍼를 끌고 매일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 카운터 정리와 바닥청소부터 시작할 것이다. 청소를 하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고시원의 눅눅한 이불을 끌어안고 잠들어 있을 연인의 목소리를 떠올릴 것이었다. 보증금 없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인 좁은 고시원은 벽이 너무 얇아 희준의 슬리퍼 끄는 소리에도 옆방에서 경고의 헛기침소리가 들리는데, 애인은 싫은 기색도 없이 키득대며 희준이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었다. 애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먹는 밥의 양도 줄고 뺨도 홀쭉해지고 낮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게 될 것이었지만, 희준은 애인이 행복한 얼굴로 웃으며 매일 아침 출근하는 자신을 배웅해주니까, 정말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미소를 지어주니까. 그러니까 희준은 더 이상 아무 걱정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속에서 애인의 목숨이 이어지는 나날만을 보물처럼 끌어안으며, 조용히 그와 함께 마지막까지 느릿느릿하게 걸어갈 것이었다.
안칠현은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희준은 걸어오는 칠현을 바라보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하얀 뺨과 날카로운 턱아래로, 겨울의 레몬색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걸어와, 거의 공기 같은 앞머리칼을 허공중에 흩뜨리며, 안칠현은 까만 눈동자를 조금 움직여 문희준을 얼굴을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빨간 입술을 다문 채 천천히 고개만을 숙였다. 반듯한 태도. 까만 터틀넥에 감싸여져 있는 너무나도 얇은 목.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희준은 세상에 들이 찬 자신의 심장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곳에 자신의 심장소리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아 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정말로 첫눈에 반한다고 하는 게 존재하는 구나, 그게 이렇게도 오는 구나 아무 소리도 없이 아무 예고도 없이. 하고 깨달았다. 저 하얀 얼굴과 붉은 뺨, 날씬한 턱과 긴 코를 한 아름다운 남자를 향해 오른 손 하나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그의 첫 인사에 제대로 된 답변조차 하지 못했던 문희준의, 그 날의 쓰고 달콤한 바람 찬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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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 유명한. 드디어 만났구나? 어땠어?" 문희준과 동기이자 희준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 하나가 넋을 놓고 있는 희준에게 자판기 커피를 하나 뽑아주며 다가간 것은 희준이 휴게실에 준비 된 긴 의자 위로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 직후의 일이었다. 희준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그가 건네주는 종이컵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내용물은 뜨거운 것이었고 목구멍과 위장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희준의 마음이 이미 불꽃이었으므로 그런 외적 고통 따윈 아무래도 좋았고, 자각하지 못한 화상이 남은 혀를 입안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희준은 깊은 한숨과 함께 안칠현의 이름을 꺼냈다. 안칠현, 아 그대는 왜 어째서 이름조차 안칠현인지.
동기의 질문에 희준은 동기의 얼굴을 흘끗 보다 금세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뼈저릴 정도로 있었다. 희준은 붉어진 뺨을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손바닥을 펼쳐 턱을 괴었다.
"아... ...예뻤어."
"엉? 하하. 내가 물었던 건 그런 외모 감상 같은 게 아닌데."
동기는 킥킥 대며 들고 있던 종이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렇지만, 엉. 그치. 안칠현 이쁜 건 이미 소문이 파다하니까."
"그냥 서로 인사만 나누게 하고, 선생들이 바로 다시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같이 있었던 건 일 분 남짓일까."
"과연. 역시 귀하신 몸답게 다루시는 구만들."
"아니 근데, 너무 하얘! 무슨 천사인줄."
"헐."
"그리고 어깨가 너무 얇고, ...몸에 뼈밖에 없이 앙상하던데 그거 괜찮은 걸까?!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아... 뭐. 흠."
동기는 희준이 무슨 말을 해도 대충 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겠지. 그런 식으로 개조를 하는데 성장이라고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있겠어? 아니 성장은커녕 몸이 제대로 버틸지나 모르겠다. 그 체격으로 너보다 한 살 연하라니 안 믿길 수 밖에 없지." "하? ......" 희준은 동기의 그런 태도에 견딜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고,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랄까, 자기도 잘 모르는 일에 말려들어가 공범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찝찝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동기는 내내 말을 얼버무렸고 얼버무린 간극 안에 너도 알잖아, 그거. 응? 같은 의미를 밀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희준은 아는 게 없었다. 첫눈에 반한 사람에 대해 자기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기분나쁘기도 전에 동기가 얼버무림 속에 밀어넣고 있는 그 강제공모의 분위기에 희준은 더 큰 불쾌감을 느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안칠현이 유명한 센티넬이야? 뭘 다들 알고 있고 무슨 소문이 그렇게 파다한건데? 난 당최 처음 듣는 이름인데."
유명한 센티넬들의 무용담은 나라의 경계선을 넘어 해외에까지 유명세를 떨치는 게 당연한 일.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센티넬의 닉네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 마치 히어로들이다. 그리고 희준은 안칠현이란 이름도 앞으로 둘이 콤비를 짜 활동할 때의 닉네임으로 주어진 강타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그 녀석이 유명한 건 물론 우리들 사이에서고, 외부에선 아직 모를 걸, 그게 알려지면 안될 달까 들켜선 안된달까..."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일순 멈칫한 동기는, 희준을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어, 너 몰라? 진짜 아무 것도?" 같은 소릴 해대는 것이었다. 그러다 금방 자신의 말을 후회한다는 듯 이미 빈 종이컵을 손안에서 와자작 구겼다.
"...아, 맞다. 너 이 기관에 소속된 지 일년인가밖에 안 됐지. 그나마도 훈련에 올인하고 있었고. 니가 너무 재주가 좋아서 쌩신인이란 걸 깜빡했다. 젠장, 뭣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대형문제아를 맡기는 게 어딨냐... 아님 기관에서 안 굴러 본 싱싱한 애 갖다가 쓰는 게 더 낫다 판단한건지. 하여간 여러모로 찝찝한 곳이라니까."
"? 뭐냐고. 뭐 알고 있는 거 있으면 가르쳐줘. 아무래도 나만 모르나본데. 다들 대강 아는 이야기들인 거야 그거?"
"......"
동기가 눈에 띠게 가라앉은 표정을 지으며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톤이 남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밀얘기를 하듯 한창 작아진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 안칠현에 관한 건 전부 외부에 절대 흘러나가면 안 되는 이야기야. 내부에서도 다들 쉬쉬하면서 서로 소문(을 가장한 정보)들만 공유하고 될 수 있으면 신경 끊으려고 하는 거거든. 물론 화제가 화제인만큼 신경이 진짜 끊어지진 않지만. 안칠현 걔. 그 큰 격리소 건물 한 채 다 혼자 쓰면서 기관내 다른 건물엔 거의 오지도 않으니까, 진짜 한 번씩 지인짜 잠깐씩 우연히 마주친 녀석들이 걔 얘길 하면 정말 별 것 아닌 사소한 것들도 무진장 부풀려져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가짜이고까지가 애매해질 지경이기도 하고."
"? 왜 안칠현이 외부에 흘러나가면 안 되는 이야기인데?"
"그거야, 아직도 실험단계이니까. 가이드를 붙였단 건 슬슬 최종단계에 도달했다는 이야기겠지만."
"안칠현이 실험단계라고?"
"그래. 실험."
그리고 동기는 정말로,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의 그것처럼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희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다가가 숨소리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인체실험말이야." 다시 마주친 동기의 갈색 눈에는 희준을 향한 연민이 미미하게 어려 있었다. 그런 대형 문제거리와 엮이게 된 희준을 동정하고 있는 것이 명백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잘나서, 그런 것과 엮이게 되냐 그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물린 동기의 입은 꼭 그런 대사를 보관하고 있는 함이 된 마냥 파리했다. 희준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려 눈앞의 벽을 바라보았다. 안칠현. 부르는 것 만으로도 희준의 모든 것이 그저 안칠현이 되는 그의 이름. 그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 희준은 그의 가냘픈 어깨를 떠올리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희준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동기가 이것저것 말해주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나 자신이 뭘 알고 있고 뭘 모르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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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칠현과의 두 번째 만남은 금방 이루어졌다. 어쨌든 희준은 안칠현에게 기관이 붙여준 가이드였다. 당연히 칠현과 자주 만나 그와 교감을 이루어내 그가 센티넬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그것이 희준에게 주어진 임무인 것이다.
희준은 칠현과의 두 번째 만남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선생은 희준의 예상보다 더 담담해 보이는 얼굴에 좀 당황한 것 같았다. 하긴 첫 만남 때 안칠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뺨을 붉혔던 걸 고스란히 들켰던 상대이니 이상하게 여기기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희준은 자신의 감정고조를 기관 사람들에게 너무 들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어제 동기와의 대화 후 혼자 생각하여 결론을 내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 상대가 아무리 자신을 일 년 내내 가르친 사람일지라도 그가 기관쪽 사람임에 틀림없었으므로 더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었다. 희준은 너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미소로 선생과 평소와 비슷한 담소를 짧게 짧게 주고 받았다. 선생의 의아한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좋아.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만 하자. 희준은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이때 이미 과거 국가기관을 철썩같이 신뢰했던 그 때의 감정은 희준의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봐도, 이 까맣고 작은 건물은 격리소란 단어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30만평 가까이 되는 국제 센티넬 기관에서 격리소란 건물이 차지하는 구역은 별 것 아닌 수준이었지만 그 정도의 건물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거라 생각하면 꽤 거창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 격리소의 외관을 보고도 그걸 부러워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벽에 잔뜩 나 있는 크고 작은 창에는 일일이 창살이 설치되어 있고, 정문의 블라인드는 대체 몇 겹인지 모르겠다. 안칠현이 아무리 자신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서툰 센티넬이라해도 이건 과한 처사이다. 그리고 동기의 말에 따르면, 이 격리소는 물론 혹시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한 안칠현과 외부의 차단이란 단 하나뿐인 이유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안칠현이란 존재를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한 어떤 장치로써... "이번에는 안으로 들여보내주 마. 앞으로도 종종 들르게 될 테니까." 선생은 그렇게 하며 희준의 등을 두드렸다. 언제나 훈련도중 희준을 칭찬할 때, 선생은 그런 식으로 등을 두드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등에서 들리는 톡톡소리와 등에 닿았다떨어지는 사람의 체온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희준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희준은 선생의 안경렌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겨울의 공기가 닿아 다소 뿌옇게 된 그의 렌즈를. 사실은 이게 다 거짓이란 말인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적절한 순간 다독여주는 게, 사실은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 마음을 주무르는 것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들은 저 안에서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안칠현에게. 이 나라의 이 국가기관의 모든 고름이 혹시 저 건물안에 있는 것일까. 안칠현이란 이름으로.
"다녀오겠습니다." 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격리소 건물로 걸어갔다. 정했다. 앞으로 무엇을 믿을지는 안칠현의 얼굴을 보고 결정하기로. 그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그런 생각을 하니 주먹 쥔 손안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랑이란 신기하구나. 희준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격리소의 내부는 희준이 생각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더 많은 인원의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쉴 새 없이 복도를 오고가는 것만이 조금 예상과 달랐달까. 격리소안은 희준이 생각했던 것만큼의 조명아래에서, 수술실처럼 보이는 곳 트레이닝 룸처럼 보이는 곳 사람이 자는 곳처럼 보이는 곳 식당처럼 보이는 곳 등등이 존재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안칠현은 커다랗고 넓은 방 안에서 혼자, 희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에서 붙여준 자신을 위한 가이드를. 희준은 넓은 방 안의 칠현을 감시하듯 문앞에 서 있는 중무장한 군인 넷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신의 카드를 방 옆의 입력키에 입력시켰다. 선생이 미리 희준의 키를 격리소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게 설정해두었기에 희준은 그런 일련의 행동을 아무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칠현은 넓은 방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바닥은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가 그 안에 또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현은 그 동그라미들의 가장 가운데 동그라미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희준은 그러한 바닥이 익숙했다. 모든 센티넬-가이드들의 트레이닝 룸은 다 이런식으로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가이드는 가장 바깥 동그라미에 서서 한가운데 앉아있는 센티넬과 교감하고, 차츰차츰 그 동그라미를 줄여감으로써 파트너가 되는 교감훈련을 하게 된다. 센티넬의 능력조작의 서툼도에 따라 훈련을 시작하는 동그라미 위치가 달라지고 말이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희준은 가장 큰 동그라미의 선에 말도 갖다 대지 않고 멀찍이 서서, 작은 동그라미 안에 앉아있는 칠현에게 말을 건넸다. 칠현은 표정의 변화 없이 대꾸했다. 여전히 홀쭉한 뺨에 앙상한 어깨에. 하지만 검다 못해 푸른 끼가 일렁이는 눈동자는 희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희준은 그 눈동자가 꼭 자신에게 '자신 있으면 다가와 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부드러운 것보다는 다소 난폭한, 비아냥거리는 듯 한, 어쩌면 깔보는 듯도한. 희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동그라미들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단숨에 칠현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때, 희준은 처음으로 안칠현의 얼굴에 일어난 어떤 감정의 물결을 보게 되었다. 그건 틀림없이 동요란 이름의 감정이었다. 희준은 속으로 웃으며 마지막 동그라미에 오른발을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거의 무릎이 닿을 만치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칠현은 흠칫하며 앉은자세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희준은 동그라미의 선에 엉덩이를 걸치는 칠현을 내려다보다 곧 그의 앞에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방은 너무나 넓었고, 거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고, 공기는 흐르는 것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칠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거침이 없네요. 자신 있다 이거예요? 아님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여기에 있는 겁니까 당신?" 희준은 붉은 입술이 치아에 깨물려져 더욱 붉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턱이 거의 움직이지 않을만큼 낮은 목소리는 마치 어떤 음악과도 같이 희준의 몸을 감싸왔다. 칠현은 이제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고 희준은 그 뜨거운 눈길에 어깨를 한 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아, 내가 지금 뭘 제대로 모르고 있단 건 잘 알겠어."
"......"
"아마 이만큼이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거 이 기관 소속 중엔 내가 유일할 거야. 거기다 너에게 날 붙여주기로 한 그 선생, 날 맨투맨으로 훈련시킨 것도 그 사람인데 아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날 훈련시켰나? 싶기도 하고. 하여간 그 사람 정말 뭘 하나도 설명해주질 않았거든."
"...그..."
그걸로 당신은 정말 괜찮으냐고 그렇게 말하려는 거였을까? 희준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리고 생긋 웃어주었다. 가능하면 자신의 미소가 칠현을 안심시켜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근데 왜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선 대강 알 것도 같다. 너와 만나서, 가까이 가면, 전부 다 알게 될 거라 생각했겠지."
그것외에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겠지만. 희준은 눈을 깜빡였다.
"! ......"
"응. 그러네. 알겠네. 이만큼 가까이와 보니 대강 다 알겠다. 안칠현. 넌 정말 자연스러운 센티넬이 아니구나."
"...하."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불온한 공기. 그의 체내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센티넬 파워. 자연스럽게 몸 안에 섞여 들어가기는커녕 혼자 날뛰며 언제라도 안칠현의 몸을 찢어버리겠다는듯이 위협하고 있는 그 날카로운 감각. 희준은 그의 몸에서 넘쳐나는 인공적인 센티넬 파워에 단숨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칠현은 웃음을 흘리며 앞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조명아래에서, 부드러워보이는 머리칼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래요, 맞아요. 잘 잡아냈네요. 당신 가이딩 능력은 정말 쓸만한가 보군요. 그래, 이 몸 안에 제대로 정착해주지도 않는 인공 센티넬힘을 어떻게 안정시킬건데요?" 어떻게? 그거야, 열심히. 열심히 노력해서 잘. 널 아프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희준은 히죽 웃으며 칠현의 앞을 향해 펼쳤던 손바닥을 조심스레 칠현의 무릎위에 올렸다. 두 다리의 허벅지가 배에 닿도록 모은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칠현이 흠칫 놀라며 다리를 끌어안은 두 손의 깍지를 풀었다.
"야 인마. 근데 너는 날 잘 알 거 아냐? 근데 왜 그런 존대를 쓰냐? 너 나보다 한 살밖에 안 어리다며?"
"? 갑자기 왜 그런 소릴,"
"당신이라 부르지 말란 말이잖아. 고작 그 정도 나이차에 존댓말도 싫어, 짜증나. 형이라고 해 형이라고 인마."
"...하..."
그렇게 희준이 웃었고, 희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칠현의 얼굴은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고, 그리고 희준은 칠현의 무릎을 움켜쥔 자신의 손에 천히 힘을 주었다. 희준의 손안이 천천히 뜨거워졌고, 칠현의 눈동자도 덩달아 열이 차오르는 듯 붉어졌다. 희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희준의 전신은 이미 더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열이 차오른 상태였다. 희준은 목구멍 안쪽이 타들어가는 듯 한 감각에 밀려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아내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아, 이, 무슨..." 칠현은 안절부절 못하며 희준에게서 떨어지려했지만, 결국 떨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두 손을 뻗어 희준의 팔 어딘가의 옷을 움켜잡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래. 떨어지지 못하겠지. 멀리 가기 힘들겠지. 센티넬게 있어 가이딩이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안정감인지는 나도 잘 아니까. "아, 아..." 칠현은 마치 녹아내리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떨리는 손끝만큼이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희준은 등이 흠뻑 젖을 만큼 비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칠현의 목소리에 귀가 다 간지러웠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젖은 속눈썹 너머로 안칠현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붉게 상기 된, 눈물이 맺힌 까만 눈동자도 전부.
저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사리판단이 안 됐다. 희준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전부 저 얼굴을 보고 난 뒤로 판단하겠다 결심했건만, 막상 얼굴을 보니 아무 생각도 안 드네. 그냥 계속 같이 있고 싶단 생각만.
계속 옆에 있고 싶단 생각만. 계속 옆에서 얼굴을 보고 있고 싶단 그런.
"...칠현아. 너 목소리 참 좋다."
"...읏, ...읏."
"나는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고, 안 말랐으면 좋겠고, 나랑 있는 거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
"언젠가 그 예쁜 목소리는 노래 부를 때 쓰면 좋겠다 싶다."
말은 힘이었다. 진실 된 말은 더욱 그랬다. 진심을 담았으면 그것보다 더 벼린 무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말에 힘을 싣는 건 가이드에게 가장 중요한 제어력 중 하나가 된다. 희준은 말 한마디한마디에 자신의 진심을 담았다. 분명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란 확신이 드는 진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나하나 내뱉을 때마다 칠현의 얼굴에는 점점 더 의아함이, 당혹함이 퍼져서, 아 이 녀석은 이런 말을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있나. 너에게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네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니. 이 모든 너를 위해 있는 것 같은 말들이 너에게 마냥 낯선 것으로만 느껴지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제 희준의 손바닥은 거의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희준은 속눈썹에 고인 땀을 떨구어내듯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그 땀은 꼭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슨 눈이 사슴 같다. 뭘 그렇게 동그랗게 뜨고 있냐. 그리고 희준은 아주 가까이에서, 이내 칠현의 뱃속으로 잠잠해져가는 거대한 센티넬의 힘을 느꼈다. 조금씩조금씩 가라앉아가는 그 까맣고 거대한 것을.
어떻게 이런 게 사람의 몸속에 있을까 싶었다. 처음에는.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센티넬러 중에서도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리라. 희준은 솔직히 처음에 자신감이 흔들렸었다. 그것이 점점 가라앉아 가고 있으니 겨우 한숨을 돌려도 되겠다 싶었고 말이다.
이런 걸 강제로 사람의 몸에 밀어 넣었다고?
희준의 귓가에 동기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인체실험.'
희준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무력감을 느끼며 칠현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인체실험.'
"...좀 괜찮아?" 희준은 뒤늦게 입을 열며 생긋 웃었다. 하얀 얼굴이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희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희준은 웃는 얼굴을 계속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아니, 간간히 손을 들어 얼굴의 땀을 닦아내긴 했지만.
"...아..." 칠현은 어색하게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려도 보고,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기도 했다. 날뛰었던 기운이 뱃속 깊은 곳에서 잠잠해져 몸이 편해졌는지 움직임이 한결 자연스러웠다. 다행이다. 희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 손으로 머리칼을 전부 쓸어 올렸다. 머리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때까지 중 가장 편해요. 대단하다."
"그래? 후아~ 다행이다. 난 좀 지쳤어."
"아... 저기, 고생하셨"
"아니 아니. 그러니까 한 살 차이밖에 안 난다니까 우리."
"......"
"응? 응?"
칠현의 눈매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더 이상 노려보는 눈길도 없었다. 희준은 히죽히죽 웃었다. 칠현의 콧잔등이 찌푸려지면서, 끝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혀엉..."
그때였다. 칠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레이닝 룸의 문이 활짝 열렸다.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두 팔을 과장되게 넓게 벌리고서 방안의 두 사람을 향해 희열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상에! 성공이군! 단 한 번에 이만큼이나 진정시키다니 자넨 정말 보기드문 인재야 희준군!" "...! 선생님." "......" 희준은 선생을 보는 와중도 흘끗 칠현에게 눈동자를 돌려보았다. 칠현은 처음부터 입을 열 생각이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어느새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선생은 두 사람에게 더 다가올 생각은 없는 듯 멀찍이서 크게 웃기만 했다. 희준은 선생의 뒤에서 방안을 노려보며 쥐고 있는 큰 총을 가슴께로 당기는 군인들을 보았다.
"저만큼이나 안정이 되었으면 현장에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게 아니로군. 강타프로젝트가 시작하고 15년이 흘렀어. 나도 드디어 윗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있게 되겠는걸. 정말로 덕분이야. 희준군."
강타프로젝트. 십 오 년. 윗사람들. 희준은 그의 말 하나하나를 유심히 새겨들었다. 그가 모르는 모든 것들이 그 말 틈새틈새에 들어있음이 분명하므로.
"...칭찬 감사합니다 선생님. 음, 그래도 당장 현장에 나가는 건 솔직히 자신이 없는데요. 좀 더 칠현과 교감을 하는 시간들을 늘리고 나서..."
"아, 그거야 물론이지. 그렇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마냥 할애할 순 없고, 다음 주에 센티넬들을 투입 할 예정인 소규모 소탕작전이 있는데 거기에 시험 삼아 가보는 걸로 하지. 그동안 계속 오늘 같은 교감을 충분히 반복하도록 하고."
"그렇다면 나는 오늘부터 이 건물에서 지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그래. 그쪽이 더 편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 가이드들 기숙사나 여기나 크게 다를 것도 없지."
그리고 선생은 그제야 안칠현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겠지, 칠현군?" 희준은 선생이 말하는 괜찮겠지, 란 말만큼 의미가 없는 말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앞으로의 일정을 단독으로 다 정해놓고 이제와 칠현의 의견을 묻는 척 해봤자 그건 기만밖에는 되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칠현은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그저 순종했다. "네. 선생님." 얼마나 오랫동안 그 말들을 해왔을까? 칠현이 너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네, 선생님. 네 선생님이라고. "좋아 좋아." 그리고 선생은 또 한 번 크게 웃고는 다시 룸을 나갔다. 문은 열렸을 때와는 딴판으로 소리 하나 없이 닫혔다. 그리고 방은 공기조차 흐르지 않는 고요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복잡한 생각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게 되자 침묵이 더욱 무거워졌다. 희준은 몇 번이고 칠현의 안색을 살폈다. 이내 무거운 한숨과 함께 칠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도 그만 가봐요.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죠. 나도 그만 혼자 있고 싶고." 덕분에 편해졌으니 더 잘 쉴 수 있겠네요, 칠현은 그런 말을 덧붙여 속삭였다. 그의 말들은 전부 배려가 넘치는 말들이었지만 이상하도 방안의 침묵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젠장. 아까전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선생이 들어오기 전의 그 부드러움 넘치는 공기 안으로. 하지만 이미 그때의 분위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산산이 깨졌고 희준은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따위 평생을 공부해도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희준은 이대로 물러나는 게 너무 억울했다.
적어도 하나만큼은 자기 뜻대로 해놓는 게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희준은 용기를 억지로 끌어안으며 버럭 소리치듯 외쳤다. "좋아! 갈게! 하지만 한 가지," 이미 공기가 얼어붙은 만큼 이런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데에는 정말로 젖먹는 힘까지 짜내어야했다. 근데 내가 과연 엄마젖을 먹었던 적이 있을까, 고아원에 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나에게 그런 일을 일어났을까? 모르겠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엄마, 어쨌든 지금의 나에게 힘을 보태줘. 부탁이니까. "...한가지, 아까 말한 것 들어줘." "......" 그리고 칠현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흔들렸다. 천천히, 천천히 흔들렸다.
그때의 칠현의 입술에 어린 가느다란 미소를, 희준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미소를 위해 살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칠현은 입술을 모으고 우물거리는 듯 하더니 곧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붉은 입술을 볼쪽으로 잡아당겨 가느랗게 하고는 "...정말 어쩔 수 없는 형이네." 하고 말하는데, 볼에 폭 패인 보조개가 그때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희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가슴을 간질이는데, 너의 웃음이 아주 소중한 것이란 걸 너에게 말해준 사람이 이때까지 한 명도 없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희준은 도피생활 중 언젠가, 칠현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바다였을 것이다. 바다는 처음 본다고 노을 볕이 부서져 반짝반짝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이는 칠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희준은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처음이 많느냐고. 어째서 그렇게 모두가 너에게 아무말도 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그거야 기계니까 그렇지, 기계로 만들려고 했으니까, 실제로 기계로 생각했으니까. 칠현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 대신에 엷은 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아마 그 말을 하면 희준이 더 가슴아파할거란걸 헤아려준 것이겠지. 이렇게 착한데. 이렇게 예쁜데. 그래서 희준은 그렇게 말한 것이다. 거의 울먹이면서, 너는 소중하다는 걸, 이렇게도 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걸.
그 뒤로 일주일동안, 희준은 언제나 칠현과 같이 있으려했다. 아무리그래도 같은 방에서 자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수면과 샤워 화장실 등등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은 칠현에게 붙어 있었다. 칠현도 별다른 눈치를 주지 않고 자기 옆에 있으려는 희준을 고요히 받아들였다. 아마 칠현에게 있어서도 가이드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매력적이었으리라. 칠현은 거의 먹지 않았다. 희준이 먹는 양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양을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겨우 먹었다. 그리고 그가 먹는 약들은 그의 식사량의 배 이상이었다. 칠현은 해당시간이 될 때마다 그 시간에 맞는 약을 잊지 않고 챙겨먹어야만 했다. 창살은 촘촘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너무 얇거나 거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그나마 볕이 잘 드는 곳이 칠현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희준은 기꺼이 그곳에서 칠현과 교감했다. 서로 살짝 어깨만을 부딪히거나 그의 발끝에 살짝 손을 대거나 한 채로, 교감은 삼십분에서 네 시간까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자유로이 이뤄졌다. 어느날은 손과 손을 마주잡기도 했는데, 그 날은 희준의 심장이 거의 터질 것 같았던 날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가이딩도 하지 못했다. 칠현은 어째서 심장소리가 이렇게 크냐고 물었고 희준은 그것도 모르냐고 도리어 되물었다. 그러면 칠현은 또 동그랗게 눈을 떴다. 하하. 희준은 웃었다. 칠현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왜 모르냐고 닦달이나 해대는 자기 꼴이 퍽 웃겨서 웃었다. 정말로 언젠가 적혀있는 그 흔한 로맨스소설의 답답한 주인공 그대로가 된 자기자신이 하나도 싫지 않은 게 이상해서 웃었다. 그날 밤 희준은 침대에 누워 까만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 희미하게 보이는 못자국들을 꼭 별자리처럼 이으며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 칠현에게 전부 말해야지. 내가 사랑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를. 내가 그동안 얼마나 한심했고 멍청했는지를, 하지만 그 한심하고 멍청한 나까지도 전부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이야.
그리고 너를 사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첫눈에 반한 걸 '첫눈에 반했다'란 말 말고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 자기감정들을 정말 시적으로 잘 표현해내지만, 그거야 결국 소설가가 쓴 거니까.
나도 소설가였다면 좋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면, 희준은 꼭 누군가의 비명에 잠에서 깨어났고, 그 비명은 물론 안칠현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러나 희준은 칠현에게 달려갈 수가 없었다. 밤마다 자신의 침실이 바깥에서 잠긴다는 건 이곳에서 자기로 한 첫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칠현이 밤마다 자신의 침실이 아닌 병실로 들어간다는 것, 병실에서 무언가 긴 호스를 몸에 잔뜩 연결한다는 것, 그 호스가 칠현을 치료인지 고통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처리를 해댄다는 것들은 전부 나중에야 알았다. 끝없는 비명을 지켜보며 그의 몸 상태를 상세히 기록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차가운 눈동자의 의사들은, 그러니까 칠현에게 그런 말들은 안 해줄 것이 뻔했다. 네가 참 아름답다고는, 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럽다고는, 너의 성격이나 너의 생각들을 좀 더 알고 싶다고 하는 그런 말들은. 그래서 희준은 울었다. 문고리를 붙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군데도 칠현의 몸에 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그와 교감하려 애썼다. 무용한 가이딩은 희준의 몸속을 맴돌았다. 희준의 혼자 품은 감정과 마찬가지로.
둘은 많은 대화를 했다. 칠현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뭐든 말하려고 노력은 해주었다. 생각을 하느라 말이 느려지는 게 귀여웠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들은 하나도 재밌지 않았고, 희준은 그게 좋았다.
"가이드는 내가 처음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형이 열 다섯 번째인가 그래."
"뭐? 굉장하네."
"형은 대체 내가 여기에 몇 년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엉... 생각해본 적 없는데."
"바보네. 그럼 나를 제어하려다 실패하고 망가져버린 가이드들이 몇 명인지 알려줄게."
"...칠현아."
"형. 그들을 아직도 믿어?"
"......"
"그들이 왜 형을 나에게 붙였는지, 슬슬 의심할 때도 되지 않았어?"
의심이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나 내색을 안했나? 이 녀석이 속을 정도면 선생들도 다 속고 있는 중이려나? 잘됐다. 내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네. 희준은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어지면 언제든 그래도 돼. 화 안낼게."
"칠현아."
"진짜야, 원한다면 도와줄 테니까."
"......"
"...뭐, 지금은 그런 생각 안 들어도, 금방이야. 현장에 가면 형도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수 없을 테니까."
"......"
두고 가도, 원망 안할게. 내가 망가뜨리기 전에 먼저 떠나줘. 칠현의 마지막 말은 거품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그가 입 밖에도 내지 않은 것일 거다. 그러나 희준은 그의 그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그가 말한 이유도, 그가 말하지 못한 이유도 전부 이해했다. 희준은 그와 나눈 무수히 많은 대화 중 그 대화를 특히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날의 모든 정경이 유리처럼 조각나 가슴 깊이 박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희준의 마음에 확신 찬 무언가를 피어나게 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대화가 있었던 날부터, 그날 밤 안칠현의 비명을 들으면서 희준의 결심은 점점 구체적이 되어갔다. 그의 가슴속에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송이가 큰, 오직 단 한가지의 이유로 피기 시작한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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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칠현의 현장투입의 소문은 단숨에 기관전체를 장악하는 거대한 담론으로 커졌다. 누군가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하고 누군가는 들인 돈에 비해 투입이 늦어도 한참 늦어진 거라고 반론했다. 누군가는 말하길 포기하고, 누군가는 마냥 두려워했다. 희준은 칠현이 나오길 기다렸다. 차가운 날씨에도 칠현은 까만 터틀넥에 바지차림으로 걸어 나왔고, 희준은 그가 그렇게 나올 거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한 코트를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칠현은 잠시 희준을 바라봤지만 이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부지내 건물에서 온갖 사람들이 나와 안칠현을 구경했다. 이곳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걸 희준은 이 날 처음 알았다. 구경 나온 인파속에서 희준은 자신의 동기들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전에 희준을 연민하는 그는 여전히 동정의 눈빛으로 희준을 보고 있었다. 희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너는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다고, 희준은 굳이 말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곧 도착한 지프차에서 내렸다. 내렸다가 격리소 쪽 주임인 듯한 흰색 가운의 늙은 남자와 무언가 대화를 하고선 다시 지프에 탔다. 희준은 그를 알았다. 안경너머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며 매일 밤 안칠현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기록하는 사람. 선생에게 말하며 건네준 자료는 틀림없이 그동안의 안칠현의 생체 데이터이겠지. 희준은 칠현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지프 쪽으로 걸었다. 칠현의 몸은 차가워져 있었다. 겨울위때문에 차가운 게 아니란 걸 희준도 금방 알았다. 펄럭이는 코트자락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로 희준은 속삭였다. "괜찮아. 칠현아. 괜찮아." 내가 여기 있잖아. 네 옆에. 칠현이 과연 그 말을 들었을까. 지프에 오르고 나서는 희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칠현 역시 굳게 다문입으로, 잠잠히 숨만을 토해낼 뿐.
텅 빈 넓은 공터에는 출입금지 줄이 잔뜩 처져 있었다. 아파트나 아스팔트 도로 같은 것들도 까마득히 멀었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독무더기에는 척 봐도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중앙의 컨테이너 박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척봐도 조폭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양아치답게 생겼다. 낮은 동산너머에 몸을 숨긴 채 희준은 양아치들이 나르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칠현은 희준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고, 선생은 그들의 뒤에 서 있었다.
희준은 몸을 돌려 선생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전부요?"
선생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느냔 투였다.
어림잡아 마흔이 넘는 인원이었다. 거창하게 끌고 온 지프는 소리가 요란하단 이유로 아주 멀리서 대기 중이고, 무장한 군인들도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까지 걸어온 사람은 희준과 칠현, 그리고 선생이 전부였다. 희준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화가 치밀었지만 어떻게든 억눌렀다.
"저들 전부를 칠현이 혼자서 어떻게."
"아니, 충분해.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점이 아니거니와."
"? 뭐라고요?"
"저 정도 인원은 칠현군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그 뒤의 폭주가 도리어 문제라면 문제지. 제어되지 않는 그의 힘이 풀리면 이 일대가 어떻게 되는 줄 아나 희준군?"
"......"
"이제 칠현군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가늠정도는 하는 줄 알았더니."
그리고 울컥한 희준이 다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칠현은 그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김으로써 그를 저지했다. 희준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로 칠현을 돌아보았다. 칠현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잠한 눈동자 속에 무거운 슬픔이 찰랑였다. 희준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칠현의 눈물로도 흘러나오지 못하고 그저 안에 고여있기만 한 그것들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 희준의 옷깃을 잡은 칠현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현장투입이 오늘이 처음 아니란 거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칠현아."
"폭주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버려. 아군도 적군도 구별을 못 해. 저번에는 그래서 같이 싸운 아군마저 다 죽여 버렸어. 그 뒤 또 한 동안 현장에서 제외되었고, 그리고 격리소에서. ...격리소에서..."
"......"
칠현의 아랫입술이 떨려왔다. 희준의 눈에는 그게 선명하게 보였다. "...그 뒤 격리소를 지키는 중무장군인들 수도 많아졌다는 그런 얘기야. 그러니까 나 혼자 해야하는 게 맞지. 다 죽여도 되는 거면 도리어 쉬운 일이야."
희준이 말문을 잃고 칠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선생은 후, 하고 숨소리를 토해내며 안경을 쓸어 올렸다. "사실 저 컨테이너안에 일반인들 몇 명이 있긴 하지. 저놈들이 강제로 납치해 온 사람들인데." 그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인심 써서 말해준는 거야 라는 태도에 희준은 정말로 빈정이 상해버렸다. 그러나 칠현이 다소 충격받은 표정이었으므로 자신의 기분이 그렇게 되었다는 걸 필사적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선생에게 본색을 드러내선 안 됐다. 희준이 이미 선생의 말 대부분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 기관에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칠현의 서포트가 제일 중요했으니까. 희준은 칠현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그의 두 손을 움켜잡았다. 칠현의 손은 차가웠다. 너무나도 차가웠다.
"칠현아. 나 봐."
"...형."
"내가 괜찮다고 했지? 걱정 마. 괜찮을 거야."
"...응."
그제야 칠현은 아주 살짝이나마 미소를 지어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핀 웃음은 아주 어색했지만 그래도 웃음은 웃음이었다. 칠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느다란 숨을 토해냈다.
"...응. 형만 믿을게. 내가 구해야 할 사람들을 죽일 것 같으면 꼭 막아줘. 내가 그들을 구분해 낼 수 있게 해줘."
"응. 알았어. 꼭 그럴게. 네 손 절대 안 놓을게."
"그리고...형... 내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
"...아니다. 아냐. 아무것도." 그리고 칠현은 눈을 감았다. 아주 고요히. 순간 그는 체념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 하얀 얼굴에 어린 모든 것을 놓는다는 슬픈 기운.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흘렀다.
아니 모든 장면장면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으므로, 도리어 아주 느리게 흘렀다고 해야 맞을까.
눈을 감은 칠현의 긴 속눈썹을 타고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진 순간 희준이 덮어준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칠현의 터틀넥의 등 부분을 찢어내며 칠현의 등에서 긴 촉수들이 뻗어나왔다. 물론 찢어진 것은 그의 옷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등도 찢어졌다. 살갗과 피부가 동시에 찢어지며 핏줄과 근육들이 끊어졌고, 끊어진 부위에서 새까만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희준은 칠현의 양팔을 꽈악 잡았다. 칠현의 몸이 너무 뜨거워 그대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꿈틀거리는 촉수에는 칠현의 피부와 핏줄 같은 것이 금속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어디까지가 금속이고 칠현의 살인지 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희준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칠현은 입안으로 토해낼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촉수는 언제까지나 길어졌다. 멈추지 않고 하늘로 하늘로 뻗었다. 뻗어져갈수록 점점 더 단단해져 금속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촉수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양한 굵기와 뾰족함을 가진 촉수들은 서로 다른 길이로 좌우로 뻗어나갔고 그럴 때마다 칠현의 등을 찢었다. 희준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하고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결코 그 모든 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칠현의 팔꿈치를 찢고 뻗어 나오는 촉수가 자신의 팔을 감는데에도 고통 한 번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리고 촉수는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을 공격했다. 공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온갖 욕설과 고함, 비명으로 가득 찼다. 칠현의 촉수들은 크게 바닥을 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공격을 반복했다. 꿈틀거리며 남자의 몸통을 조이기도 하고 날카로운 끝으로 배를 관통하기도 했다. 얼굴을 내려치기도 하고 허리를 칭칭 감아 높이 들어 올려 그대로 내동댕이 치기도 했다. 비명은 커져갔다. 흙먼지가 피냄새를 풍기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총을 쏘는 소리도 들렸다. 칠현의 촉수가 중간에 잘려 끊어지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칠현은 왈칵왈칵 피를 쏟아냈다. 변형되었지만 그건 분명 칠현의 신체 중 어느 일부분이었고 그 일부분이 뚝 잘라져버린거니까 피를 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끊어진 촉수는 그대로 금속과 살점이 붙은 무언가가 되어 기능을 멈추었다. 칠현의 몸에 연결된 부분은 끊어진 부분부터 다시 길어져 원상태로 돌아갔다. "...으윽." 칠현이 숨을 헐떡이며 낮은 신음을 토했고, 희준은 그런 칠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칠현의 뜨거운 이마가 희준의 어깨에 닿았다. 그의 체온을 느끼며, 희준은 또 굵은 눈물방울을 흘렸다.
촉수 중 가장 굵은 촉수가 이윽고 허공에 높이 뜨더니, 두 개로 갈라졌다. "아악..." 칠현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갈라진 촉수 사이에서 쏟아지는 빛같은 것은 무슨 기관총서 발사되는 탄환과 같은 소리를 내며 컨테이너박스를 집중 공격했다. 으아아악, 하는 소리가 쏟아지고 컨테이너가 갈라는 소리가 들리고... 공터는 이윽고 소규모 전쟁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되어갔다. 희준은 하도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안으로 피맛이 느껴지 지경이었다. 저게 대체 뭐지, 총, 대포, 레이저? 저딴 걸 사람의 몸에 심어놨으니 신체가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지, 성장은커녕 앙상하게 말라서, 조금도 튼튼해질 수가 없는 거야... 희준은 칠현을 끌어안은 두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눈을 꽈악 감고 칠현의 몸 속 기운을 느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깜깜하고 그 어느때보다도 거대해진 그의 힘을. 칠현아, 컨테이너 박스 안에 죽여선 안 될 사람들이 있잖아. 희준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몸안의 모든 힘이 칠현과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빠져나갔다. 전신이 흐물흐물 뭉개져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따위, 지금 칠현의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칠현은 천천히 화력을 줄였다. 촉수의 움직임도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조폭들의 반항 아닌 반항도 이제 끝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둬! 이런 건 너무 하잖아, 이 괴물 자식들아..."
단말마의 외침이 들리고서 이내 공터는 잠잠해졌다.
칠현의 집중포격도 곧 끝이 났다.
이윽고 흙먼지만이 자욱한 공터에서 비단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 비명은 이어지다가 어설프게 끝이 났다. 비명을 지른 사람은 비명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그대로 기절을 해버린 게 분명했다. 흙먼지는 가시지 않았지만 공터에는 시체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처참한 모습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차라리 기절하는 쪽이 더 나을 것이고. 그리고 희준은 어쨌든 그들에게 쓸 신경이 없었다. 물론 지프에서 대기중인 무장한 군인들에게 이제 상황이 끝났으니 현장정리 하러 가라는 연락무전을 하는 선생도 무시했다. 희준의 모든 신경을 칠현에게 가 있었다. 칠현은 이제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생살이 찢어지고 핏줄이 끊어지고 몸이 변형되는 고통을 더 이상 울음과 신음 없이 참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더기가 된 터틀넥 안쪽으로 희준은 칠현의 등에 하얀 뼈마저 드러나는 것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뱃속에 쌓인 고통은 까맣게 고여서 칠현의 폭주를 자극하는 것처럼 때때로 폭발했고, 희준은 안간힘을 쓰며 그 위에 막을 덮어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살이 갈라지는 그 어마어마한 고통이 그의 힘을 폭주하게 만드는 원인이란 걸 깨달을 때마다 희준은 차라리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칠현이 마음껏 폭주해버리게, 그냥 모든 걸 파괴해버리고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힘든 건 너뿐이겠지. 넌 분명 혼자서 더욱 아프고 혼자서 더욱 슬퍼질 테지. 네가 슬픈 건 견딜 수 없어. 네가 혼자 그 작은 등을 끌어안고 몸을 움츠려 우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내 심장은 바스러질 것 같아. "형, 형... 희준형..." 그리고 칠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며 자신에게 매달리는 그때, 그때 희준은 정말로 자기가 죽은 것 같이 느껴졌다. 송두리째 죽은 것처럼.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처음부터 오로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났으므로, 희준은 앞으로의 삶을 얼마지 자기 멋대로 살 수가 있는 거였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도 자기 멋대로 만들 수 있는 거였다.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는 칠현을 위해서만 살 거야.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유도 물론 너 때문이야. 난 널 위해 태어난 거야. 널 위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희준 혀엉... 나 아파아..." 그리고 엉엉 울며 그렇게 매달리는 칠현의 몸을 가득 끌어안으며, 상처투성이라 차마 두 손을 대지 못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허공에서 애처롭게 헤매는 그의 촉수들을 바라보며, 희준은 가만히가만히 속삭였다. 방금 자기가 생각한 것들을. 자신이 태어난 이유들을.
그리하여, 가이드의 말은 센티넬에게 힘이었으므로, 희준의 진심을 담은 모든 말들이 칠현의 힘이 되어주므로, 이윽고 칠현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몸 안으로 다시 거둘 수 있는 힘을 되찾게 되었다. 칠현의 눈물이 고인 두 눈에 다시 빛이 차올랐다. 정신을 차린 칠현은 여전히 희준에게 매달린 채로, 안간힘을 썼다. 턱에 힘을 주고 온 몸이 부서져라 힘을 퍼뜨렸다. 몸이 재구성되는 고통은 여전히 참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칠현은 서서히 돌아오는 촉수들을 느끼며 희미한 기쁨을 느꼈다. 길어진 촉수들은 다시 짧아지며 점점 뿜어져 나왔던 본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칠현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희준은 쉬지않고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맞닿은 희준의 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칠현에게 얼마나 큰 안심인지. 형의 온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아직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지 형은 모를 거야. 언젠가 이 온기가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냥 사물의 무언가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까봐 무서웠어. 끔찍했어. 하지만 지금 이순간 이렇게 맞닿은 채라면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을 것 같아. 형이 그렇게 날 안심시켜줘. 난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될 수 없어. 그게 날 이렇게 행복하게 해줘... 형,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되는 날이 오다니. 형. 희준 형.
그리고 마지막 촉수가 전부 칠현의 몸속으로 돌아오고, 칠현은 두 번 숨을 토해내다 그대로 기절했다. 희준의 품안인 것에 안심하며 그대로 기절했다. 아주 조금, 행복한 꿈을 꿀 거라는 기대에 차서, 모든 곳이 캄캄해지는 것도 그지 두렵지가 않았다. 이곳이 희준의 품안이므로.
눈을 뜨면 있어줘. 형.
제일 먼저 보게 해줘.
그거면 되니까. 계속 옆에 있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도망가게 해줄게, 이 무서운 곳에서.
하지만 떠나기 전에, 단 한 번만.
한 번만 형. 날 또 행복한 사람으로 한 번만 더 그렇게 만들어줘. 그렇게 해 줘.
내가 형에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줘...
희준은 자신의 품안에서 기절한 칠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촉수는 전부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지만, 찢어진 생살들은 그대로였다. 흘러넘치는 핏물의 양도 그대로였다. 핏물들은 진하다 못해 새까만 색을 띄고 있었다. "이제 정말 완벽해졌군. 이걸로 인공센티넬 실험은 성공이야. 자네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선생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다소 호흡이 벅찼다. 고개를 들면 선생은 틀림없이 웃고 있으리라, 그 안경너머로 차가운 눈동자는 더할나위없이 기뻐 보일 것이고. 그런 것들을 보면 희준은 제어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거라 예감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선생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사이로 칠현의 핏물이 흘러넘쳤었으니까. 그 너무나 뜨거운 생명들이 하릴없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따위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칠현이 죽겠어요, 피가 안 멈춘다고요."
"그따위거라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없는데.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칠현군에게 쏟아 부은 돈은 또 얼마고."
"찢어진 부분이 아물지도 않아요! 피도 멈추지 않고요!"
"사람의 살이 찢어진 건데 멋대로 아물 리가 없잖아. 물론 피도 멈출 리가 없지. 그래도 괜찮네, 희준군. 아무리 피가 흐르는 채로 두고 찢긴 부위를 방치해도 칠현군이 죽는 일은 없어. 신체적으로 다소 약해지긴 하겠지만, 글쎄. 그건 뭐 달리 보충할 방법이 언젠간 생기겠지."
거짓말. 보충할 생각 없잖아. 상처를 방치해도 괜찮단 건 당장은 그걸로 죽지 않는다는 얘기일 뿐이잖아. 그렇게 약해져 언젠가 죽어버리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고. 희준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강타프로젝트가 무엇이건, 어쨌든 안칠현은 프로토타입에 불과하단 걸. 희준은 시선으로 사람을 찢어죽일 수 있는 거라면 벌써 선생을 죽이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희준의 뺨을 가르고 떨어지는 눈물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칠현군을 위해 그렇게 울어주다니, 의외로군. 희준군. 칠현군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연민을 할 수가 있던가?"
"......"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희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의 전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선생의 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들어야만 했다.
"이제 그는 사람이라 하기도 힘들게 됐는데. 처음에 생체를 베이스로 하고 기계를 심은 것에서 이제는 그 반대가 됐단 말이야."
"......"
"어쨌든 나도 감사는 하고 있네, 나 나름대로 말이지. 사람의 몸을 개조하여 인공으로 센티넬 파워를 심는 실험, 즉 인공 센티넬러 탄생 실험, 강타프로젝트. 덕분에 쾌거를 이루어냈네. 칠현군을 발표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인공 센티넬러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앞선 나라가 될 거야."
"인공 센티넬러..."
"아, 물론 발표라고해도 관계자들끼리만 공유하는 은밀한 발표가 되겠지만 말이야. 인권단체니뭐니에서 시끄러워지는 건 우리 모두 딱 질색이거니와."
그리고 선생은 정말로 기쁜 듯이 말을 이었다. "뭐, 하여간 이제 인공센티넬러들로 구성 된 군대 같은 것도 영 꿈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는 그 말이지. 정말 기대가 되는군. 정말 기대가 커." 정말로 꿈을 꾸는 것처럼 들떠서 말이다. 그 와중에도 희준의 품안에서, 칠현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생살은 찢어진 채로,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칠현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마치 시체처럼 무거워졌다.
희준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갈라진 목소리는 엉망진창이 되어 공터를 울렸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칠현이부터 어떻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선생님! 칠현이 살려주세요!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아니, 그런 몸이 되었으니 일반병원같은델 가도 소용이 없지. 우리 격리소라면 또 모를까."
"선생님!!!"
"진정 좀 하게. 희준군. 물론 갈 거네, 지금 칠현군을 절대 죽게 만들지 않는 거야 당연하잖나. ...근데 자네 지금 반응이 좀 신기하군."
"센티넬을 가이딩 하다보면 센티넬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품게 마련이긴 하지만, 자네의 마음은 정말로 뜨겁고 깊어 보이는데." 그리고 선생의 눈이 번뜩였다. 희준은 그 눈이 익숙했다. 희준이 두각을 보일 때마다, 능숙하게 가이딩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보여주던 그 눈이었다. 그때는 자신의 재능에 탄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정확하게 알았다. 그 눈은 실험체를 보는 눈이었다. 실험을 하는 연구자의 눈이었다.
그리고 희준은, 정말 모든 것을 알았다. 고아인 자신을 칠현에게 붙여준 이유도 전부. 고아를 세상과 단절시키기는 너무나 쉬우니까, 희준이 어느 날 행방불명되거나 죽어도 아무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을테니까. 희준은 칠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부터 이 기관에 있었을까. 그는 언제부터 이토록 혼자였을까. 나처럼.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든 센티넬러네. 그럼에도 가이드로써의 애틋한 마음이 생겼다는 건, 그가 천연 센티넬러와 전혀 다름이 없다는 뜻인가? 희준군. 그를 가이딩할 때의 느낌이 어땠지? 가르쳐줄 수 있나? 다른 천연 센티넬러와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희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전부 포함해서, 나의 뭐가 됐든 전부 해체하고 전부 연구해도 좋습니다. 선생님."
그래, 이때까지 칠현에게 했던 것처럼. 지금까지의 칠현이 전부 감수해왔던 것처럼.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요. 제발요... 네? 선생님."
"......"
"격리소로."
그리고 선생은 웃었다. 자기 입으로 직접, 실험대상으로써, 격리소에 가겠다는 그 말이 바로 선생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기다리던 그 한마디였으므로. 희준앞에서 모든 걸 다 말한 것도 칠현의 목숨을 인질로 삼고 그를 초조하게 만든 것도 다 그 말을 위해서였다. 인공 센티널러는 완성이 됐다. 이제 프로젝트는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했다. 다음단계란 물론, 가이드였다. 인공 센티넬러와 진정한 교감을 이뤄내는 가이드에 대한 연구. 선생은 활기차게 몸을 돌리며 다시 무전을 들었다.
희준은 바닥에 떨어뜨리어진 칠현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는, 코트는, 사실은 하얀색이었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칠현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리고 실제로 잘 어울렸었지. 정말 너무 예뻐서 무슨 천사인 줄 알았다고. 아 이 생각은 한 번 했었나? 하하. 뭐 두 번이면 어떻게 세 번이면 어떠랴. 희준은 코트로 조심스럽게 칠현의 몸을 감싸고 그를 끌어안았다. 하늘을 울리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더 가까져 오고 있었다. 희준은 칠현의 뺨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와 흙먼지의 냄새너머로, 아주 연하게 칠현의 냄새가 났다. 그의 숨도 그만큼이나 연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희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칠현에게만 들릴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칠현아. 나랑 갈래?
나랑 갈래? 어디든.
어디든지,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곳 어디로든지. 언제든지.
응? 그럴래?
칠현아, 일어나면, 대답해줘.
응? 일어나 대답해줘. 가자, 나랑 같이. 어디로든.
...둘이서.
그리고, 칠현이 눈을 떴을 때. 칠현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시간이 많은 흐른 뒤였다. 약 이주일 정도. 칠현은 하얀색 이불을 덮은 채 침대에서 눈을 떴고, 고개를 돌리니 자기 바로 옆에 희준이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솔직히 말해 희준이 의자에 앉아있고 자신은 그것을 발견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바로 옆에 누워있는 것에 대해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가이딩을 위해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거란 생각에 미치자 결국은 그냥 웃음이 나고 말았다.
좀 더 솔직히, 좀 더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사실은 눈을 뜨면 희준은 이미 없을거라 생각했다. 꼭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칠현은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은 아주 고요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희준의 움직임도 아주 고요했다.
언제부터 깨어나 있었을까? 처음부터 잠든 게 아닌가. 칠현은 희준에게 고맙다고 말하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희준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희준은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소리로, 칠현에게조차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칠현아. 나와 갈래?
나와 가자.
그리고 칠현의 눈은, 또 언젠가처럼, 그야말로 사슴처럼 동그래졌다. 그 까맣고 커다란 눈이.
그래서 희준은 웃을 수 밖에 없어서, 또 웃는 소리를 내며 도르륵 굴러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닦아주어야만 했다.
가자. 같이 가자. 어디든지, 얼마든지.
응.
칠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칠현이 그렇게 대답해주었으므로, 희준은 정말로 어디로든지 갈 수 있었다.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너와 함께.
그리고 선생들의 유일한 오산이란, 바로 문희준의 가이딩 실력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제어력을 희준은 실은 숨기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신뢰를 조금씩 잃어갈 때부터, 조금씩 자신의 본연의 힘을 감춰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날 밤, 희준은 칠현을 등에 업고 기관에 있는 모든 센티넬들을 한꺼번에 가이딩했다.
그의 가이딩에 넘어온 절반 이상의 센티넬이 나머지 센티넬들과 뒤엉켜 싸웠고, 그들의 전쟁과도 같은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 두 사람은 이미 기관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안 돼. 고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칠현은 그렇게 말했고, 희준은 그 분명한 목소리에 퍽 가슴이 설렜다. "아이구, 똘똘하기도 하지 우리 칠현이." 희준은 그를 업고 달리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기어코 그런 말을 해대는 희준이 우스워서 칠현도 이 급한 상황에 웃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등은 왼쪽의 두군데, 길게 찢어져 있고, 희준이 찢은 옷조각으로 그의 상체를 칭칭 감아 겨우 지혈을 했다. 칠현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한 채였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이 눈을 깜빡이다 간헐적으로 기침을 토해냈다. 희준은 애인이 뭐라고하건 일단 당장 살아야겠기에 재빨리 불법주차가 되어있는 차의 문을 발로 찼다.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고 박살 난 문은 어긋나며 열렸다. 희준은 그와중에도 도둑질은 나쁜 거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칠현을 보조석에 앉히고 자신은 빠르게 달려 운전석에 앉았다. 멀리서 차의 주인이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칠현이 놓친 몇 명의 기관 사람들의 소리도 코앞에서 들리는 듯했다. 희준은 재빨리 차의 운전대 아래를 뜯어내 전선들을 조작하여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의 주인이 문의 유리창을 쾅쾅 두드리는 데에도 무시하고 그대로 엑셀을 밟았다. 차의 주인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비켜났다. 희준은 도로를 정신없이 달렸다. 표지판도 신호도 보지 않고 무작정,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까지 이어지는 길인지도 모르는 채로.
희준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래, 고시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짐도 거의 없으니까 다행이지 뭐."
그의 옆에서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갸냘픈 숨을 토해내던 칠현이 씨익 웃으며 가슴포켓에서 두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치만 이건 무사히 가져왔어."
아, 최고다. 역시 내 애인이 최고다. 희준은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둘의 유일한 물건, 다른 모든 건 버리고 가도 두사람이 버릴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너무 좋아. 역시 칠현이 최고야."
"사진보니까, 다시 가고싶다. 그 바다에."
"그래. 가자. 지금 가자. 바로 가자."
칠현의 목소리는 똑똑 끊어져 제대로 이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칠현은 이대로 잠들어버리는 걸까? 잠들면 또 언제 깨어날까? 나 혼자 몇 주를 기다려야 하나. 어쩌면 몇 달을, ...혹은 몇 년을. 그러다 그것이 그의 잠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희준은 턱 아래까지 올라온 슬픔을 간신히 밀어냈다. 희준아, 문희준. 이 슬픔에 짓눌리지 않기로 했잖아. 칠현이 앞에서 슬퍼하는 모습 보이지 않기로 했잖아. 희준의 목소리는 상황과 다르게 더욱 쾌활해졌다.
"근데 칠현아, 나 궁금한 거 있다."
일부러 더 칠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잠드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어서.
"...응, 뭐야. 이렇게 갑자기."
아주 작아졌지만 너무나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칠현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렸으므로, 희준은 안심했다. 안심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있잖아, 그러고보니 나 네가 나한테 반한순간에 대해선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대체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거야?"
"...하하, 그런 거..."
"난 다 말했잖아. 첫 눈에 반했다고 전부 말했잖아. 그러는 넌 어떤데. 넌 대체 어느 시점에 날 좋아한단 걸 깨달았는데?"
응? 대답해. 가르쳐줘. 대답해줘 칠현아.
칠현아? 듣고 있어?
자는 거야?
대답해주고 자지.
그리고 훔친 차의 앞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는 겨울의 공기. 희준의 울먹임. 헐떡이는 숨과 희미한 불안.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갈 때쯔음, 이미 잠든 줄 알았던 칠현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차안을 메웠다. "...글쎄, 맞춰봐." 희준은 정신없이 운전을 하는 와중에 잠시 고개를 돌려 칠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좌석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파리한 안색의 칠현을. 피를 토해 턱과 옷 앞섶이 더러워진 칠현을. 그리고 여전히 까만 머리에 홀쭉한 뺨을 하고 있는 칠현을.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네가 거기 있어서, 나도 여전히 여기에 있어.
응. 그러니까, 나는 내일도 여전히 여기에 있을 거야.
네가 거기 있는 한.
"..하하, 그게 뭐야. 너무하네. 그냥 좀 알려주지." 그리고 희준은 또 한 번 코를 훌쩍였다. 눈물이 차올라선 안 됐다. 시야가 확보가 되지 않아. 그들이 어디까지 쫓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과 얼마만큼 떨어졌는지 얼마만큼 가까운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희준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따끔한 날카로움이 입안을 스쳤고, 희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좀 더 가자. 좀 더 저어기 멀리까지 가야한다. 희준은 사납게 엑셀을 밟았다. 차라리 스스로가 차가 되고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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