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께오선 모든 업무를 중단하신 채 침소에서 나오질 아니하신다. 안색이 매우 좋지 아니하시니 상선이 허리를 굽혀 어의를 부를까 여쭈었으나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때 주상의 눈에 든 것은 무휼이라 이름 붙여준 푸른 난이었다. 실제의 무휼이 살아 돌아온 이후 줄곧 잊고 있던 난은 누렇게 변하여 죽어있었다. 주상께오선 옥체를 일으키시어 죽어 늘어진 난 앞으로 가셨다. 늘어진 잎을 매만지시던 주상께선 급히 내금위장을 불러오라 명하신다. 한달음에 침소에 든 정득룡은 주상의 앞에 부복하여 꿇어 어찌 부르시냐 여쭈었다. 내금위장이 보기에도 무휼이 그토록 큰 죄를 지었는가? 갑작스러운 하문에 당황하였으나 이내 표정을 다시 가다듬어 대답하였다. 소신 또한 도성안 사대부 출신이오나 공맹의 도리따위는 모르옵니다. 허나 저들이 부당하게 무휼영감을 내치려는 것은 압니다. 그저 이국의 눈이 두려워서, 그저 이치에 맞지 않을 뿐이라서 이대로 끝내기엔 영감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정득룡의 답에 힘을 얻으신 주상께오선 무휼을 구해내리라 다짐을 하신다. 앞에 정득룡을 둔 채 짧게 서찰을 쓰신 후 다시 하명하시기를 그대는 곧 강채윤과 가리온에게 가 나의 뜻을 전하라. 내금위에서 날랜 이들을 뽑아 일을 꾸미도록 하여라. 그리고 무휼에게 이 서찰을 전하라. 정득룡은 품 속에 서찰을 고이 품고 무휼이 갇혀있는 옥사로 향하였다.
무휼은 누운채로 간신히 숨만 고르고 있었다. 이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치고 울어봤자 저와 아이가 죽을 것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내가 기어이 이런 꼴을 당하기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구나. 알면서 무엇하러 돌아왔던 것이냐. 나의 어리석음으로 겸이 너마저 힘들게 하였구나. 현생에서는 아비가 힘이 없어 지켜주질 못하였으니 다음생에 다시 만나면 그때에는 반드시 지켜주겠노라 한다. 밖이 조금 소란스러우며 정득룡이 모습을 드러내자 무휼은 잔뜩 겁을 먹는다. 힘겨이 몸을 일으켜 배를 부여잡고 뒤로 기어가다 벽에 부딪치자 울상이 된다. 정득룡이 옥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더더욱 몸을 떨며 노려본다. 내 아이의 목숨을 가지러 왔느냐? 결코 아니된다! 정득룡 네놈이 어찌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려 하는 것이냐! 정득룡은 조심스레 무휼에게 절을 하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영감. 제가 온 것은 전하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이니 결코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만 경계를 푸소서. 아침에 보았던것을 제외하면 이리 자세히 보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의 제 눈 앞에는, 이전의 풍채가 좋고 위압적이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토록 가련하게 숨을 헐떡이는 무휼이 있다. 어찌나 두려워 하는지 떠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며 그 움직임에 따라 손목이 축 쳐진 채 힘없이 떨렸다.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목은 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 정득룡은 문득 눈물한방울을 떨궜다. 영감. 고생하셨습니다. 영감이야말로 만고에 길이 남을 충신이십니다. 뒷말은 목이 매여 삼키고 말았다. 품속에 있는 서찰을 꺼내려 손을 넣자 무휼은 칼을 꺼내려는줄 알고 발악을 하였다. 그만 두어라! 그만두어 내 다 잘못했다! 제발 우리 아기만은 살려다오! 그친줄 알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나오며 불어터진 눈가에서 물이 떨어졌다. 호흡이 심히 거칠어지자 정득룡은 급히 다가가 떨리는 몸을 안아주었고 품속의 것은 칼이 아니라 전하의 서찰이라며 달래었다. 그 말에 서서히 울음을 그치며 서찰을 받아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애써 움직여 서찰을 펴 보았다.
무휼아. 과인은 반드시 널 살릴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무휼은 서찰을 부둥켜 안은 채 또다시 울었다. 수하였던 자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게 되어 민망하지만 쏟아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수태를 하게 되면 이리 눈물이 많아지는 것인가. 민망한 꼴을 보여 미안하다. 아닙니다 영감. 부디 굳건히 견디소서. 무휼은 멀어지는 정득룡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며 한숨섞인 숨을 내뱉었다. 살려주신단다. 전하께오서. 겸아 기뻐하거라. 우리가 살게 된단다.
정득룡은 득달같이 움직여 가리온에게 명을 전하였다. 어제 처형된, 덩치가 큰 사형수의 시체를 구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라 하였다. 무엇에 쓰시려 하심입니까? 무휼영감을 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명으로 내려진 큰 일이니 실수치 말거라. 가리온은 울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였다. 정득룡의 앞에서 주상께 올리는 큰 절을 하고 제게 맡겨진 소임을 다하러 움직였다. 정득룡은 내금위와 별시위를 통틀어 몸이 날랜 이들을 몇 뽑아 자시 이후 복면을 한 채 자객으로 분하라 명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묻는 이들에게 지엄하신 어명이니 그리 알라고만 전하고 그 무리중에 끼어있던 강채윤을 따로 불렀다. 너는 궁 내가 소란해진 틈을 타 무휼영감을 빼내야 할 것이다. 전하께서 전하시길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그곳에서 기다리신다 하셨으니 그대로 전하여라. 어디로 가야 할지는 영감께서 잘 알고 계실 터이니 너는 따르기만 하거라. 채윤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차릴수가 없다. 분명 아침에 무휼나으리를 죽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주상을 어찌나 욕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토록 송구스러울수가 없다. 채윤은 멍한 얼굴로 소이에게 가 아침의 패악질에 대해 사과하였다. 진실로 전하께오선 그러실 분이 아니었다. 나는 여태까지 괜한 생각을 하였는데 네 말이 맞다. 이날 이때까지 전하를 따르겠다 말은 하고 다녔으나 그게 아니었다. 아직도 내 아비가 그리 돌아가신 것이 마음에 걸려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이야. 이제 내 마음을 분명히 알겠으니 온 성심을 다 하여 전하를 뫼실 거다. 소이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밝게 웃었다.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채윤은 긴장하였다. 아직 자시가 되려면 한참을 남았으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아찔하다. 괜스레 세상의 모든 것이 저를 주시하는 것만 같아 자꾸만 주위를 흘끔거리며 돌아다니다 조장에게 걸려 혼이 났다. 부산스럽다. 궁 내의 분위기도 엉망이거늘 어찌 이리 산만하냐. 채윤은 죄송하다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들뜬 기분은 여전하였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 둘 잠자리에 들었고 번인 자들만이 남아 불침번을 선다. 지나가던 한 겸사복이 내금위장께 아뢸것이 있는데 어디에 계시는지 아느냐며 한번 물었던 것 빼고는 사위가 고요하다. 부엉이 한 마리 울지 아니하고 쥐새끼 하나 돌아다니지 아니한다. 달 또한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으니, 못내 그것이 불안하신 주상께오서 잠들지 못하신다. 혹 일을 그르칠 예지인 것인가. 어찌 이리 평소와 같이 아니한가. 안절부절 못하시는 주상의 곁에서 허리 굽은 상선이 다 잘 될 것이라며 애써 달랜다. 무휼 또한 잠을 이루지 못하니, 구해주신다 하시고 이 시간까지 아무런 연통이 없어 숨이 막혔다. 시간은 점점 흘러 해가 뜨면 온 몸이 찢겨 죽게 된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두려움에 떨 힘도 없어 구석에 누워 짚을 덮고 있었다. 주상께서 주신 서찰을 품에 안고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전하께오선 반드시 구해줄 것이다. 혹여 누가 서찰을 채갈까 품속에 밀어 넣고, 뻑뻑한 눈을 달래려 잠시 눈을 감았다.
밤이 더 깊어지자 채윤은 조장의 명을 받고 궁을 벗어나 깊은 언덕에서 검은 복색으로 갈아입었다. 상투를 틀고 두건을 쓰니 다시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시작이다. 드디어 무휼영감을 구하러 가는 것이다. 정신 차려라 강채윤. 너의 임무가 막중하다. 임무 시작 전 정득룡이 간곡히 말하였다. 네놈이 행여 실수하면 모든이가 위험해진다. 또한 전하에게까지 해가 가니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채윤은 두 손으로 볼을 짜악 때렸다. 긴장하지 말라. 목표는 의금부 옥사다. 삐익 하는 호각 소리에 모두가 내달렸다. 채윤은 날랜 것 하나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나 목적을 위해 남들보다 조금 뒤쳐졌다. 바람이 빠르게 귓바퀴를 지나며 비명소리를 낸다. 인원은 십수명에 불과하였다.
오늘밤 우리는 잠시간 역적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역적이 되어 궁으로 칼을 디밀고 혼란을 일으켜야 한다. 이 일이 비록 어명이기는 하나 행하기에는 명분이 없다하여 개의치 않아 하는 자들이 있어, 정득룡은 그들에게 어명이라는 것 자체가 명분이라 일갈하였다. 무사에게 주군의 명은 곧 법이요 나의 명분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채윤의 시야에 궁의 담이 가까워진다. 모두는 힘껏 내달려 높은 담을 훌떡 넘었고, 궁에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담 뒤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채윤은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가자 급히 담을 넘어 궁 안으로 들어갔다. 소이에게 제발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게 빌어달라고 하였고 소이는 걱정스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기필코 성공해야 하니, 책임이 막중하다. 눈으로 건물을 한번 훑고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해냈다. 의금부 옥사까지는 조금 더 가야 한다.
무휼은 급작스런 소란에 깜빡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인데, 밖에서 난리가 난 듯 요란하였다. 혹여 저를 꺼내 배를 가르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소란인 것인가 하여 몸이 굳었다. 주상께서 구하여주신다 약조하셨던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그저 눈앞의 두려움에 반응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주어지는 큰 압박감 탓인지 배가 아파왔다.
채윤은 앞을 가로막는 겸사복들을 칼등으로 쳐내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다 별시위 중 무공이 뛰어난 자가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는데, 칼날이 날아오기 전에 재빨리 몸을 비켰다. 자칫 피하지 못하였으면 목이 날아갈 뻔 하였다. 다시 칼날이 번뜩이며 채윤을 쫒아왔고, 급하게 칼집으로 날을 막았다. 별시위 무사는 곧 다시 공격을 하였으니 카랑 거리며 칼날끼리 부딪쳤다. 북방에서도 오랑캐들을 잡아 죽이며 살았고 그간 궁에 들어와서도 열심히 수련을 하였다 생각했다. 저의 무공 또한 많이 강대해졌다 생각하였거늘 그 생각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다시금 칼날이 춤을 추며 목숨을 위협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별시위 무사를 불렀다. 이곳에서 무얼 하는가! 그자는 내가 한칼에 처리하겠으니 자네는 침전으로 가라. 전하의 안위가 우선이다. 검은 복색 무리 중 채윤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어 찾아 돌아다니던 정득룡은 별시위 고위무사와 채윤이 맞붙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곧이어 정득룡의 묵직한 칼이 달려들었고 무사는 침전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채윤에게 어서 가라며 눈짓을 하곤 일부러 칼을 놓치고 말았다. 채윤은 다시 내달렸고, 곧 옥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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