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소린의 힛싸가 짧게 끝났음. 이맘쯤이면 집에 간다고 해야 할텐데 정신을 못차리고 늘어져 있었어. 항상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는 얘기가 생각나 오밤중에 소린의 사이즈에 맞는 옷을 구해다 입혔음. 자기들이 데려다 놓겠다는 수행원들을 제치고 직접 소린을 차에 태워 운전을 했음. 소린의 집은 차 한대가 꼭 들어갈만한 크기의 골목을 구불구불 지나 언덕 꼭대기쯤이 되서야 나타났음. 이 이상은 차도 들어갈 수 없어 소린을 업어 올라갈 수 밖에 없었어. 한편 집 앞에서는 스라인과 킬리가 함께 나와있었음. 형은 이 시간까지 왜 안들어오냐고 들어오면 이번엔 내가 혼내줄거라고 할아버지에게 투덜거렸음. 방금 전까지 레골라스와 대화를 나누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하늘을 쳐다봤음. 달도 없이 별만 가득한 밤이었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뚫어지게 보자 킬리도 같이 고개를 돌렸어. 언덕 밑에서부터 밝은 금발의 남자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음. 킬리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어. 킬리의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든 장본인 스란두일이 삼촌을 업은 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음. 킬리를 발견한 스란두일은 피식 웃고는 그 앞에 멈춰섰어. 킬리는 분노와 놀람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었음. "아저씨가 왜 삼촌을 업고있어요?" "아저씨라니. 나 아직 40도 안됐어." "닥쳐요! 우리 삼촌 왜 업고있냐구요! 삼촌 왜 저러고 있어요?" 킬리의 패기에 스란두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파하하 웃었음. 역시 애들이란. "네 삼촌은 널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나와 거래를 하고 있다. 오늘도 그 대가를 치루고 오는 길이지." 그 큰 눈을 크게 부릅뜬채 스란두일을 노려보던 킬리의 눈은 더더욱 커졌고 스란두일은 속으로 저기서 눈이 더 커질수도 있구나 하며 감탄했음. 소린을 눕히려 무작정 집안으로 들어가자 킬리와 스라인이 후다닥 딸려들어왔음. 이불위에 소린을 눕히고 그 얼굴을 한번 빤히 쳐다보고는 휙 뒤돌아 나와버렸음. 뒤에서 킬리가 뭐라 고래고래 욕을 하며 소리질렀지만 들은 체도 안함.
킬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눕히고 삼촌을 살폈음. 씻은지 얼마 안됐는지 샤워코롱 향이 났음. 집을 나설때의 거적데기 같은 옷은 사라지고 되게 좋아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음. 킬리는 혹시나 하는 맘에 소린의 상의를 벗겼는데 곧 입을 막은 채 아무 소리도 못내고 부들부들 떨었음. 소린의 온 몸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선명했어. 골반 근처엔 손자국이 선명하게 멍이 들어 있었음. 얼른 다시 벌어진 옷의 단추를 채우고 그 몸 위에 이불을 확 덮어버렸어. 너무나 큰 충격에 머리가 멍 했음. 스라인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골았고 필리가 집에 들어올 때 까지 소린의 앞에서 멍하게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음.
뒤늦게 들어온 필리는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진 채로 비척비척 들어왔어. 자기가 와도 쳐다도 보지 않는 킬리가 이상해 어깨를 흔들었음. 킬리는 큰 눈을 꿈뻑이며 형 왔냐며 웃었고 얼른 자자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필리를 끌어안고 누워버렸음. "야; 나 옷은 갈아 입어야 될거아냐. 더럽다고." "괜찮아. 형 지금 냄새 하나도 안나. 피곤할텐데 얼른 자자아~." 필리는 궁시렁대다가 피곤했는지 이내 잠이 들었고 킬리는 잠도 못자고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없이 울어버림.
요 며칠 킬리는 소린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음. 소린이 뭐라 말을 건네려 하면 슬금 피했고 어색하게 웃으며 넘기는게 다 였음. 소린은 속상했지만 킬리에게 뭔가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넘어갔어. 다시 학교로 돌아간 필리는 킬리의 빈 자리를 메꾸려는 듯 진짜 미치게 공부를 했어. 아직 오인이 만들었다는 그 약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는건 포기하지 않았음.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 미친듯이 공부를 했고 나머지 시간엔 자료를 찾았어. 혼자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친한 동생인 오리를 찾아갔고 오리는 온갖 나쁜짓-해킹 포함-을 하고 다니는 제 형 노리를 소개시켜줬음.
레골라스는 출신이 천한 엄마 때문에 어려서부터 숨어 지냈어. 덕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얼굴 몇번 본 적 없는 제 아버지와 돌아가신 엄마, 수행원 몇명 뿐이었음. 친구라고는 하나 없는 제게 갑자기 킬리가 나타났어. 처음엔 이게 뭐지 싶었는데 놀다보니 애가 귀염귀염하고 재밌는게 호감이 갔음. 어차피 학교도 안다닌다니까 심심하면 불러서 같이 놀러다녔어. 킬리는 학교 다닐때 축구선수였고 또한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어.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다 했음. 안좋은 일로 퇴학당하고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한탄스럽다고 토로했음. 레골라스는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고 그냥 좋아하는 축구를 실컷 보여주고 싶어서 축구경기에 자주 데려갔어. 레골라스덕에 로얄석에 앉을수 있었지만 킬리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반석을 좋아했음.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날에 킬리가 좋아하는 팀과 라이벌 팀의 경기가 있었어. 아주 흥분을 하던 평소와 다르게 얌전히 음료를 마시며 경기를 지켜봤어. 레골라스는 추위에 덜덜 떨며 심상찮은 킬리의 눈치를 봤어. 킬리는 그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음. 하얀 얼굴이 추위에 더 하얘지고 빨개진 코 끝에 콧물이 매달린 채 눈이 마주치자 놀라는 모습이 우스웠어. 킬리는 푸스스 웃으며 레골라스의 머리 위에 소복히 쌓인 눈을 털어줬음. 레골라스는 킬리가 살며시 웃는 순간부터 그 모습이 매우 느린 속도로 재생되었음. 흰 눈이 스치는 까맣고 긴 속눈썹이 아름다워보였고 약간 붉어진 코 끝이 귀여웠고 호선을 긋고 있는 도톰한 입술이 사랑스러웠음. 레골라스는 갑작스레 몰려든 감정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뒷좌석에 앉은 관객에게 뒷통수를 맞았음.
소린과 스란두일의 관계는 딱히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어. 소린이 생각하는 그들의 관계는 그저 거래일 뿐이지 그 이상의 마음은 가지지 않았음. 그냥 내 몸이라도 좋다니까. 조카를 지키기 위해서니까. 스란두일과 본딩이 되었다는 사실도, 그로 인해서 스란두일이 제게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음. 그리고 그 날 스란두일이 직접 데려다 줘서 킬리가 알게 되었다는것도 모르고 있었어.
스란두일은 말 없이 소린에게 핸드폰을 던져줬어. 필요없다는 말에 앞으로 내가 자주 연락을 할 테니까 갖고 있으라는 명령아닌 명령을 했고 소린은 꽁해졌음. 토라져서 입술이 비죽 나온 모습이 제법 귀여웠어. 팔불출같으니.. 꽁한 채로 눈 앞의 약을 집어먹었음. 물을 넘기는데 문득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 이미 약은 뱃속으로 들어갔는데 물을 다 마실때 까지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어. 몸에서 거부하는 듯한 그런 느낌. '그 약 오래 먹고 제대로 된 사람 못봤어.' 드왈린의 말이 떠오르며 직감적으로 이 이상 이 약을 먹으면 안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소린은 거부할 형편이 되지 못했음.
보푸르는 모니터의 빛에 의지해 파이프에 담배를 짓이겼음. 어두운 방에서 마우스를 도록도록 굴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어. 이윽고 기사 하나를 클릭했고 그 기사 안에는 15년전 자신의 사진과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 오인의 사진이 함께 걸려있었음.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애꿎은 마우스에 손가락을 톡톡 굴렸음. 그리고는 핸드폰을 들어 담당 기자의 전화번호를 눌렀어.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했음.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워 파이프를 뻑뻑 피웠어. "고놈.. 저거보고 날 찾아온거구나. 옘병할." 한숨을 푸욱 내쉬며 독한 담배연기를 속에서 내버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