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린시절에 들었던 말이 새로운 의미로 들릴 때가 있다. 킬리는 가끔 언덕에 앉아 그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낼때가 있었다. 생각 없이 사는듯 한 그에게도 생각이란것을 할 시간이 존재한다는것은 온 청색산맥이 놀랄만한 일이었다. 종종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마을 처녀들이 말을 걸 때가 있다. 자기들 생각을 해주길 바라는것 같았지만 미안하게도 킬리는 그 여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다만 어린시절 잠결에 들었던 소린의 목소리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조금은 습한, 떨리던 목소리는 어린 킬리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내 아들 킬리. 엄마는 가슴이 아프단다.] 어린시절 이 말을 들었을 땐 삼촌이 무슨 소릴 하는 걸까하고 넘어갔을 뿐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귓가에 들리는 그 애달픈 목소리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이라니. 자신은 필리와 한 배에서 나온 형제라 알고있다. 소린이 무언가를 착각한 것인가 쳐도 정확히 킬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도 말 하지 말아야 한다는걸 알고 있기에 몇십년을 혼자 앓아왔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킬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종종 집을 나갔다. 낮에 들었던 주민들의 말이 생각났다. 어쩜 그리 소린을 닮았냐느고. 그런 말들이 곧이곧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마을로 돌아와 멋대로 행동했다. 소린은 당황해하며 킬리를 크게 혼내지 못했다. 화가났다. 소린이 제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너무나 화가 났고, 왜 자신에게만 쩔쩔매는 것인지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다. 그냥 말을 해줘도 좋으련만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소린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그것에 대해 말을 내뱉을라 치면 소린은 상처받은 눈을 했다. 차마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어 발린을 찾아갔다. 그때 발린은 집무중이었다. 어린녀석이 난데없이 씩씩대며 들어와 사실을 알려달라며 버릇없게 굴었다. 발린은 표정을 굳혔다. 이 어린것이 그것을 어찌 알았을까. 혼낼때 나오는 엄한 표정에 킬리는 움찔했지만 성난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진실을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있느냐?"

"무, 물론! 얘기만 해주세요!"

발린은 저 오만방자한 왕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소린의 어릴때와 똑같았다. 

"너도 알다시피 소린은 오메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린은 어떠한 알파를 취했고 몰래 아이를 낳았지."

"그게 뭔데요? 갑자기 소문은 왜."

"그것이 너다."

킬리는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 진실속의 소린은 알파를 일부러 취한것이 아니다."

킬리는 말이 없었다. 안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 그럼.... 제 아버지는.. 누구.."

"너와 필리는 형제가 맞다. 다만 소린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

킬리는 엄청난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와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명심하거라 킬리.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다. 이 사실은 필리도 알아서는 안된다. 앞으로 입조심하거라. 행여 그 누구의 앞에서라도 소린을 어머니라 불러선 안될 것이다."

킬리는 한참을 말이 없다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갔다.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큰 충격에 방금 들은 사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어 이런저런 저 혼자 추측을 해보고 생각을 해 보았지만 어찌해봐도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자신은 소린의 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킬리는 계속해서 발린을 찾아갔다. 종종 드왈린이 있었는데 진실을 알아버린 킬리에게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내가 널 받았단 말이다. 그날 네가 소린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아느냐?"

입이 가벼운 킬리는 결국 필리에게도 사실을 털어놓았다. 필리는 킬리가 똥마린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자 수려한 말솜씨로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킬리는 술술 뱉어놓았고 필리 또한 충격을 받았다. 필리의 충격받은 표정을 본 킬리는 그제야 발린의 충고가 생각났다.

"아씨.. 말하지 말랬는데.. 형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인데!"

소린은 그날 두 형제가 왜 싸웠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킬리는 간혹 소린의 등을 바라보며 입만 벙긋 거리며 말을 걸었다. 엄마. 엄마. 엄마는 날 보며 무슨 생각 해요?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어요. 엄마.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소린의 등 뒤로 달려가 안았다.


필리와 킬리가 청년이 된 어느날. 소린은 에레보르를 되찾으러 갈것이라 통보했고 그들은 고집을 부려 여정에 참여했다. 킬리는 한시도 엄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더욱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억지로 일원이 되었고 여정을 떠나기 전 날. 소린은 오래도록 조카들의 방을 떠나지 못했다. 일부러 잠에서 깬 척 잠투정을 부리며 소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허리에 팔을 두르니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린. 전요, 이상하게 어릴때부터 엄마 품 보다는 소린의 품이 더 좋았어요. 넓어서 그런가 소린 품에 안겨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소린의 몸이 굳는것이 느껴졌다. 

"..네 말 대로인것 같다. 디스보다는 내가 더 품이 크지."

약간 뜸을 들여 말하는 목소리는 평상을 가장하고 있었다. 

"여행.. 걱정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그래. 고맙구나."

엄마는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킬리는 소린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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