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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사이타마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하늘이 드디어 맑게 개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비가 이어진지 며칠이던가? 비만 쏟아지면 모를까, 강풍과 천둥도 어찌나 알차게 지상으로 쏟아지던지. 간간히 비가 그치던 날도 하늘은 흐려 햇살의 히읗도 보기 힘들었었다. 사이타마는 빗속에서 흐르던 시간들을 눈을 깜빡이며 가늠했다. 사실 언제나 어제가 오늘같고 어제가 오늘같은 나날을 보내는지라 흐르는 날짜를 헤아리는 것이 사이타마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날이 개었지 않은가. 저 하얀 구름사이로 빼꼼히 쏟아지는 레몬빛깔 햇살을 보라. 사이타마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슬쩍 미소지었다. 눈꺼풀이 조금 따끔하지만 그뿐이었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봐도 안구가 타오를 기미따위 없었다. 단지 사이타마는 아직도 저런 사소한 것-오랜 흐린날을 끝내고 드디어 모습을 보여주는 태양같은 것-에 감정이 촉촉해지는 인간적인 부분이 자신에게 남아있음을 연하게 안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노스는 돌무더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사이타마는 잠시 망설였다.
어느조각을 주워들어야 할지 헷갈렸던 탓이었다. 여기저기로 흩어진 파츠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제노스처럼 보였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저 모든 흩어진 부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제노스라고 한다면, 사이타마는 그것들을 단 한조각도 놓치지 않고 전부 다 주워들어야하는데, 솔직히 그것은 자신이 없었다. 저 돌무더기가 된 한때는 건물이었던 잔해사이에서 제노스의 완전히 부서져 너무나 작아진 파츠 하나하나를 일일이 골라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작아진 파츠가 정말로 한 때는 제노스였던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사이타마는 자신이 제노스였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제대로 골라낼 수 있을거란 자신같은 건,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너의 등, 너의 어깨, 너의 옆구리 작은 조각, 너의 왼쪽 허벅지와 오른쪽 허벅지.
그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들이 아주 작은 조각이 되어 여기저기로 흩어진 상태라면 더더욱 제대로 알아 볼 자신이 없었다.
못난 제자 위에 못난 스승이었다.
너의 모든 부분이 반짝반짝 빛난다면 좋을텐데.
아니면 내 눈동자에 빛가루가 뿌려져 있거나. 저 햇살같은 레몬빛. 너만이 빛나보이는 마법의 빛가루.
아니다, 어쩌면 과학으로 만들어낼수도 있지않을까? 너의 모든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천상 문과인 나는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더욱 마법같은 신기한 과학. 사이타마는 마음을 정했다. 마음을 정해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어이- 제노스-." 제노스의 모든 부분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들고 돌아 갈 자신이 없었으므로, 사이타마는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에게 대답하는 제노스만을 들고 돌아가기로 했다.
"...타마 선생, 님... 지지직.... 여ㅣ.... 지직..."
여기예요. 사이타마 선생님.
사이타마는 제자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선생님. 만약 제가 자폭을 하게 되면 절 놔두고 멀리 떠나시면 됩니다. 제노스는 그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과연 자신의 스승에게 필요한 말인가 의심스러웠다. 설사 자신이 사이타마의 바로 코앞에서 터진다고 해도 그에게 상처입힐수는 없을텐데. 사이타마는 제노스의 말에 여상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그 얼굴을 보면서 제노스는 더욱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졌다. 자폭하기 3초전, 제노스는 어쩔수도 없이 자신이 그렇게 말한 그 날을 떠올렸다. 그 날의 사이타마의 미소를 떠올렸다. 2초전, 사이타마가 그 날 제노스의 그 말을 듣고 내뱉었던 대답을 떠올렸다. 선생님. 그 말을 한 번 더 해주시면 안될까요. 꼭 그때와 같은 얼굴로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꼭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을 한 번 더 듣고싶은데. 1초전, 세상이 흔들렸고 제노스는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제가슴의 자폭장치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상의 대지위에 발을 디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생각은 꿈일수도 있겠다. 0초전, 제노스는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이 결국 스승의 얼굴이라는 것과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 사이타마, 라는 것에 자신은 참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생각을 했다. 제노스는 몸의 대부분을 기계파츠로 바꾼 그 날부터 자신이 인간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뇌를 하기 시작했지만, 죽음의 0초앞에서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사이타마의 이름과 함께 제노스의 신체가 폭발하고 주변의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대지가 파이고... 적들은 제노스만큼이나 조각이 나고. 사이타마는 아주 조금 도착하는 게 늦었다. 제노스가 덜 소중했던 것이 아니었다.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제노스가 대치한 적들만큼이나 강하고 수가 많은... 사실은 제노스가 대치한 적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수가 많은. 그래서 사이타마는 도시가 산산조각 난뒤에야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리고 비는 그치고 하늘은 개어서, 구름이 물러가고 레몬빛 햇살이 사이타마에게로 쏟아졌다. 사이타마는 자신이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는 제자에게로 걸어갔다. 두걸음, 두걸음이면 충분했다. 눈주변과 뇌부분이 부서진 제노스는, 그리고 물론 목만이 남아도 여전히 제노스였다. 사이타마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이타마의 귀찮은 제자였다.
사이타마는 제노스를 한 손으로 집어들었다. 목부분에서 부서진 파츠가 조각조각 떨어졌다. 사이타마는 그것들을 다른 손으로 받아들다가, 금방 손가락사이로 흐트러뜨렸다. 어차피 제노스는 여기에 있으니까, 반짝거리지 않는 한 이 모든 것들에서 제노스만을 골라내는 건 무리니까. 제노스는 사이타마의 옆구리에 끼인 채 끊임없이 지지직거렸다. 멀쩡한 한쪽 눈이 쉴새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선생... 님, 선생님..." 기계음은 제노스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노스에게 선생님이란, 사이타마 자신뿐이었다. 사이타마에게 제자란 제노스뿐이듯, 그래서 사이타마는 그가 선생님이란 부르는 한, 그가 제노스인 것을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가 제노스를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 할 참이었다.
사이타마는 그를 단단히 잡고 달렸다. "바다로 가자." 왜냐면, 갑자기 바다가 보고싶어졌거든. 제노스. 하늘이 오랜만에 맑잖아. 파란 하늘을 보니깐 자꾸 바다가 보고싶더라고. 그러고보니 바다 안본지도 진짜 오래됐어. 요샌 오염이니뭐니해서 바다도 위험하다고 하니깐 해수욕장도 거의 안열고 말이야. 게다가 해양에서 오는 괴인들도 많아졌고 말이야. 사이타마는 달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거의 제트기만큼이나 빠르게 달리고 있는와중에도 목소리는 제방에 누워 턱을 괴고 있을 때 내뱉는 것만큼이나 느릿하고 일정했다. 조금도 떨리거나 흐려지지 않는 분명한 그의 목소리는, 왜 갑자기 바다를 가고싶어졌는지에 대한 변명을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었다. 왜냐면 제노스라면 분명 물을테니까. 바다요, 선생님. 바다가 갑자기 왜 보고싶으신가요, 혹시 그것도 선생님의 현재 강함에 대한 어떤 비밀과 연결되 될만한 감정일까요? 그렇다면 기록해두겠습니다만. 아니 그럴리가 없잖아! 사이타마는 웃고 싶었다. 상상속의 제노스에게도 딴지를 걸고 싶었다. 그 노트 좀 작작 늘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리고, 옆구리의 제노스의 몇가닥 남지않은 머리칼이 날려 제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감각에 눈을 깜빡이며, 사이타마는 오랜만에 제 뛰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바다는 파랬다.
맑게 개인 하늘만큼이나 짙었다.
해변에서 까마득하게 먼, 바다 한가운데에 문득 솟아나있는 바위에 착지한 사이타마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고요한 주변 바다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갈매기 한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파도도 없었다. 가늠할 수 없을만큼 깊어 푸르름이 무거워보이기까지 하는 깊은 바다는 마치 하나의 덩어리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사이타마는 바위에 닿은 파도조차 포말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바위위에 앉았다. 발끝이 바다위로 덜렁거리게 바위에 걸터앉은 후, 제 허벅지에 제노스를 올려두었다. 부서진 목의 조각들이 뾰족뾰족하게 사이타마의 허벅지를 찔렀지만, 옷에 구멍이 날 뿐이었다. 제노스의 하나남은 눈꺼풀이 감겼다떴다를 반복했다. "선생, 님. 선생님..." 다른 말을 전부 잊어버린 게 분명한 제노스는 그저 조각난 입술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사이타마는 웃으며 제노스의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주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지근한 몸. "저기 봐, 제노스. 바다야. 너도 바다 오랜만에 보지?" 사이타마는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의 비릿한 소금냄새, 습기 찬 젖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깜빡였다. 후회는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갈걸. 조금만 더 빨리 가볼걸. 그녀석을 처치할 시간에 제노스에게로 달려갔다면. 그녀석은 다른 히어로에게 맡겨두고 제노스에게 2초만 더, 3초만 더 빨리 달려갔더라면, 제노스가 자폭하기 전에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면...
그런 후회는 없었다.
사이타마는 그런 후회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사이타마는 제허벅지에 있는 제노스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부서진 부분을 조심조심 매만지고, 얼마남지않은 머리칼을 잘 매만져 뒤로 넘겨주었다. 쉴새없이 깜빡거리는 눈꺼풀이 진정할 수 있도록 눈두덩도 꾸욱 눌러주고, 갈라진 입술사이가 더 갈라지지 않도록 손끝으로 슬슬 문질러주었다. 기계음은 제노스의 부서져 겉으로 드러난 뇌에서 나오는 것도 같고, 하나남은 눈에서 나오는 것도 같고, 찢어진 턱아래 조금 남아있는 목부분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선생... 님. 지지직.... 님...." 어쨌든 그가 여전히 자신을 부르고 있으므로 제노스는 여전히 제노스였다. 그래서 사이타마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자신은 제노스와 함께 있지않은가. 이 못난제자와. "이 못난제자야."
바다요? 바다가 어디던지요. 어디든지 같이 가겠습니다. 같이 가고싶습니다. 선생님,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노스는 뒤늦게 바다가 기억났다. 제노스는 눈꺼풀을 흔들며 바다의 정의를 내뱉으려 하지만, 목소리와 뇌가 이어지는 회로가 망가졌다. 그 회로가 뭐냐면, 몇 번째 부품이냐면... 선생님. 바다라는 건 넓고 깊군요. 바다라는 건 선생님이었나요. 그런데 선생님은 손인데요. 손끝에 맴돌고있는 체온인데요. "이 못난제자야." 그리고 제노스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제 심장이 어디에있는지도 잊고 있었는데, 그 심장은 제노스가 잃어버린 몸뚱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곳에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 것이다. 그래 저 목소리였다. 저 입술이었다. 제노스는 자신이 자폭하기 직전 다시 듣고싶었던 그 날의 그 말을 들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자신의 심장을 이미 그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하여 세상은 파랗게 깊고 넓었다.
선생님. 그리고 제노스는 속삭였다.
떨리지 않는 눈꺼풀로, 벌어지지 않는 입술로, 끊어진 회로로, 잃어버린 기억으로, 속삭였다.
"이 못난 제자야."
그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더. 그것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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