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님* 2023. 9. 27. 22:50

싫소. 길동이는 싫단말여라. 나는 어리니랑 성이랑 아부지랑 살랑게요.

차디찬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집안에 하나뿐인 음인 아이. 눈독들이던 양반댁에서 데려가겠다며 덜컥 비단을 내렸다. 이걸로 옷을 지어 입히게.보내지 않겠노라 한번은 거절했으나 두번은 없었다. 말하자면 노비는 짐승이었다. 자기들이 성적으로 마음껏 갖고 놀 짐승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길동이는 조금 모자란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멍한 구석이 있더니 커서도 그랬다. 스스로를 길동이라 칭하며 샐쭉 웃고 다녔다.

아가 덩치 아깝게 겁도 많은지라. 마님께서 우리 아를 잘 봐주셨음 합니다. 부디 아프지 않게 살살혀주십쇼.

아모개의 웃는 낯이 말이 아니다. 누가 제 아들을 갖다 바치며 살살 윤간하라 할까. 주저앉아 가기 싫다며 우는 길동이를 매몰차게 일으켰다. 고운 비단옷감이 손 안에서 서걱였다. 물결치는 느낌이 낯설어 얼른 뒤돌려 보냈다.

싫소! 아부지! 길동이는 싫소!

목청높여 우는 어린 아들을 뒤로 한 채 아모개는 방으로 틀어박혔다. 아이가 운다. 달래주지 못하는 손이 허공에서 맴돈다. 음인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삶이 힘들 것이여. 그래. 나도 알고있다. 알고 있느니. 어쩔수 없지 않으냐 우리같은 것들은. 아모개는 남은 비단을 눈독들이는 어리니가 생각났다. 오늘 밤엔 댕기를 만들어줘야지. 댕기를 만드는 뒤에서 길동이의 비명이 고스란히 들려왔다.

아파요. 한땀. 살려주세요. 한땀. 아 따거라. 피가 나네 것 참. 내가 바느질 처음 하는 사람도 아니고. 허참. 허 참나.

피가 나는 손 끝에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방울은 손을 타고 흘러 빨간 비단을 적셨다. 피가 섞여들어가도 모를 색이었다. 어리니는 아비의 피가 섞인 비단 댕기를 한 채 팔려갔다. 그걸 만들어 주는것이 아니었는디. 나가 모자라도 한참을 모자랐어야. 생각이 짧아부렀어. 그게 눈에 띈다는 생각을 못혔단 말이여. 혼자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자니 큰아들이 다가와 꼭 끌어 안았다. 길현이. 이제 하나 남은 자식이다. 이놈만이라도 나가 데리고 있을 것이여. 그날 밤 얇은 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부지. 아부지 나 길동이여라. 길동이가 왔어라. 문좀 열어주소. 아부지!

팔려간 놈이 무에 왔드냐. 썩 돌아가지 못혀!

아부지 길동이가 잘못했으요. 다시는 비단옷에 눈독들이지 않겠어라. 맛있는거 먹고 싶다고 조르지 않겠어라 나 아부지랑 살고싶어요.

아부지아부지 엉엉 우는 소리가 밖에서 메아리쳤다. 어떻게 도망나온건지, 힘 하나는 장사라 설마 주인마님 때려 눕히고 온건 아닐런지. 밖에서 소란이 있었다. 길동이를 야단치는 소리. 어디 씨받이 놈이 더럽게 구냐며 때리는 소리. 죽겠다며 비명지르는 길동이. 아모개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부지. 성아. 어리니야.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아모개는 날이 샐 때까지 귀를 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