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으로 끌려간 무휼 외전 1
1. 무휼
무휼은 아주 어릴때부터 자리에 누워만 있는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 동네 동무들이 서로 제 아비가 더 훌륭하다 자랑할 때마다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의례 제 아비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갔음. 왜 우리 아버지는 대단하지 못하고 저리 누워만 있어 날 곤란하게 하는 걸까 싶어서.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아들 얼굴 한번 보고 싶어 무휼아 하고 부르면 잽싸게 도망가는게 버릇이 됨.
무휼이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보였음. 무휼은 더더욱 아버지가 싫었고 언제나 죽을 상을 하고 누워있는 모습이 무서워 아예 쳐다도 보지 않음. 아비가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 이름을 부르짖을 때도 산속에 숨어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고 오랜 시간 앓다 끝내 숨을 거두고 만 아비가 불쌍하기는커녕 속이 시원하기까지 함. 아직 죽음에 대하여 모를 나이라 눈앞에 아비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음. 어머니는 그런 무휼을 혼내지 않았음.
12살이 되었을 때 북방에서 아버지의 친우가 찾아왔음. 아버지에게 벗이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무휼은 그저 그 존재가 신기해 어른들이 들어간 방 안을 연신 기웃거리다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맘. 무휼이 벌써 열두살이라니, 그 일이 있은지도 십년이 지났구려.
그일이라니 이게 뭔소리야. 십년전에 있었던 일이라면 저가 두 살때의 일이니 알 수 있을 리가 없음. 생전 처음 본 아버지의 벗이 돌아가고 무휼은 어머니에게 십년전 일이 뭐냐고 떼를쓰며 물어봤는데 어머니는 이때껏 본 적 없는 가장 무서운 얼굴로 무휼을 혼냄. 네놈이 감히 어른들의 말을 엿들었단 말이냐! 어머니는 무섭게 회초리를 들었고 처음 맞아보는 매에 무휼은 겁을 먹어 울었음. 회초리가 부러질때까지 매질하던 어머니는 잘못했다며 안겨오는 아들을 안아주었고, 그제서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을수 있었음. 아버지는 고려의 무관이었는데, 고려왕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다 붙잡혀 문초를 당하였다는 것임. 그때 너무나 심하게 당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반병신이 돼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는 거. 너의 아버지는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셨고 이 마을 사람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었다고. 그리고 내도록 아버지를 거부하는 무휼을 혼낼까 생각했던 어머니었지만 아버지가 극구 말렸었다고 함. 아들의 나이 아직 어리니 그대가 참으라면서. 돌아가실때도 그렇게 무휼이 보고 싶어 애타게 찾으셨다고 하는데 무휼은 도망가고 없었지. 무휼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걸 느껴. 자기는 아버지가 그리 귀신같은 몰골에 걸걸한 목소리로 자길 부르는게 너무나 싫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거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너무 죄송해서 엄마 품에 안겨서 아버지 죄송하다며 울고 말았음.
무휼이 16세가 되었을때 어머니는 이제 혼기가 차니 장가를 가라고, 좋은 규수를 데리고 오겠다고 했지만 무휼이 마다해. 그 즈음 북방에서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돌았고 잘 하면 이름을 떨칠 수 있을거라고 함. 무휼은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입신양명을 하려 북방으로 갈 차비를 하던 때였음. 어머니 소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북방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후에 돌아오겠으니 혼인은 그 후에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셨고 무휼은 그날 바로 단촐한 봇짐을 하나 메고 북방으로 떠났음. 무휼이 북방에서 본 것은 지옥이었어. 발에 채이는건 시체였고 사람들의 눈엔 살기가 가득했음. 그곳 사람들은 나이어린 무휼을 매우 무시했음. 무휼보다 어린 녀석들도 종종 있었지만 어린 혈기만으로 버틸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어리다보니 힘이 딸려 죽어나가기 부지기수였음. 그 틈에서 살아남은 한 살 어린 사내아이는 북방민족들에게 부모를 모두 잃었고, 그들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음. 그 아이는 멀끔한 하얀 얼굴에 단정한 차림을 한 무휼을 매우 비웃었음. 그렇게 샌님처럼 있다가는 단박에 죽을거라면서 독설도 서슴치 않았고. 그놈때문에라도 오기가 생겨서 전투가 있을때마다 죽자사자 달려들었어. 무휼의 실력은 그 나이대에서는 수준급 이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차츰 무휼을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음. 무술을 배운적이 없는 사내아이는 무휼의 정도를 걷는 듯한 검에 반해 자기한테 가르쳐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고, 급기야 팔자에도 없는 제자를 들이게 되었음. 제자라고 해봤자 그냥 이리 저리 툭툭 건들이며 자세만 잡아주는게 다였지. 누구를 가르쳐본적도 없으니 서투르는건 당연하고. 그러면서 둘은 많이 친해졌음. 그 전장 안에서 또래라고는 둘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아이는 죽고 말았음. 무휼이 가르쳐줬던 초식을 완벽하게 이용해 자기 몸집보다 두배는 되는 장정하나를 쓰러뜨렸는데, 그것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방심을 했기 때문임. 형! 나 잘하지! 잘하지! 폴짝뛰면서 무휼에게 다가오는데 뒤에서 창이 날아와 몸을 뚫어버림. 무휼은 아이를 묻어주고 이를 꽉 물었음. 다시는 누구에게도 온정을 주지 않겠노라며 다짐을 했음. 마음이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음.
그날 이후로 무휼은 웃음도 잃은 채 전장에서 그저 야차가 되어 침략해오는 이민족들을 베어넘길 뿐이었음. 입신양명이란 명분도 아닌듯 복수란 명분도 아닌듯. 무휼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침략자를 한합에 베어넘기고 다음을 기다리며 뒤를 돌았지만 아무도 없었음. 주변엔 몸이 동강나 누워있는 시체들만 즐비했고 오롯이 서 있는 건 혼자뿐임. 피가 줄줄 흐르는 땅 위에 혼자 서 있자니 불현듯 한기가 몰려와 얼른 그 곳을 벗어났음.
2년이 지나 18세가 되었고 무휼은 북방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음. 항간에서는 조선제일검으로, 백인의 무사를 상대로도 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되었음. 그 소리를 들은 이방원은 조말생을 시켜 무휼의 됨됨이를 알아오라 명을 내렸음. 조말생은 무휼이 피를 뒤집어 쓴 채 눈에 어린 살기를 주체 못하는 꼴을 보고 혀를 쯧쯧 차. 네놈은 아직 크게 되려면 멀었구나. 누구십니까? 조말생이라 한다. 조무휼이란 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여 한번 보러 온 것이네. 조말생은 그 치기어린 살기를 내뿜는 무휼이 매우 맘에 들었음. 길들이는 재미가 쏠쏠할거 같아. 나와 같은 주군을 모셔보지 않겠느냐? 무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대로 집어 이방원 앞에 가져다 놓았지. 막 전장에서 온 티를 풀풀 내며 온 몸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도 거두지 못한 채로 이방원 앞에 무릎 꿇고 있었음. 이방원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곤 피비린내를 음미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음. 애송이 같고 아주 좋아. 네 이름이 조무휼이렸다. 무인 집안인가? 그렇습니다. 어느 집안이냐는 물음에 본관과 3대조의 이름을 댔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이방원의 표정이 싸하게 굳음. 그 자의 아들이었다니. 조선이 세워지기 전, 공양왕을 옹호하던 무휼의 아버지를 끌어내 직접 고신을 명하였던거임. 무휼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많이 닮았어. 너는 네놈의 아비가 왜 몸을 제대로 운신할수 없었는지 아느냐?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그 고신을 내가 직접 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 아버지이신 전하의 부관이었으며 명철하고 어진 성품을 지닌 자였지. 지금 이 자가 뭐라 하는거지? 아버지가 무휼의 반평생동안 가엾이 누워만 지내다 돌아가신 이유가 이 사람이라 함. 입술을 짓씹고 고개를 들어 노려봤어. 그러나 앞에 있는 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 내 너를 잘 벼려 나의 검으로 쓰고 싶었거늘 이런 악연이 다 있나. 허나 너를 갖고 싶구나. 내게로 오겠느냐? 나으리는 누구십니까? 나는 현 국왕의 아들 정안군 이방원이다. 무휼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고, 이방원은 헛헛하게 웃고 있었음.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눈 앞으로 다가왔어. 이방원이라 하면 현 주상전하의 아들 중에서 가장 권력욕이 크고 힘이 막강한 사람이라고 들었음. 이 사람 곁에서 공을 세우게 되면 순식간에 거물급이 될 지도 몰라. 그런데 아버지의 원수야. 총명하던 아버지를 약방의 노인만도 못하게 만든 자가 바로 저 사람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지키고 싶었던 고려는 무너졌고, 무휼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 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해. 그러나 무휼은 한번 생각해보겠다 하고 물러났어. 만약 마음이 바뀌어 저 사람이 자기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반드시 나를 데려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음. 이 일에 대해서는 어머니와도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만 같아. 그날 바로 무휼은 짐을 꾸리고 개성으로 돌아갔어. 고려가 망하고 도읍이 천도되면서 썰렁해진 개성의 도성 안에 부는 가을바람은 몹시 찼어. 무휼은 발걸음을 서둘러 집 앞에 도착했는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늙은 유모만이 울면서 반겼음. 아이고 도련님 어찌 이제 오십니까요! 우는 유모를 방 안으로 모셔가며 어머니는 어디가셨냐 물으니 돌아가셨다고 함. 작년 가을, 몹쓸 병을 얻으셨는데 돈이 없어 약 한 재 지어드리지 못했다고 함.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무휼을 부르겠다는 유모를 말렸다고 해. 무휼 그 아이가 뜻이 있어 간 것이니 나같은 이의 소식으로 심기를 불편케 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어미는 너를 믿으며 네 선택은 언제나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함. 무휼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묻혀있는 산소 앞에 가 하루 종일 목 놓아 울었음.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소서.
3일이 지난 후 묘소를 내려와서는 땋아서 틀어 묶어놨던 머리를 풀어 상투를 틀고, 북방에서 대충 주워 입었던 옷들을 버리고 도포를 입었음. 어머니가 후일 무휼이 돌아왔을때를 위해 지어놨던 푸른색 도포였음. 유모는 무휼이 깔끔하게 차려입은걸 보고 눈시울을 붉혔지. 생전 주인마님 같으십니다. 똑 닮으셨습니다. 무휼의 장성에 유모는 매우 기뻐했고, 집을 떠나기 전 유모에게 큰 절을 올렸음. 얼마 있지 않은 재산을 처분하고 이방원의 앞에 섰음. 그래. 생각이 바뀌었느냐? 무휼은 그 앞에 부복하여 꿇어앉은 채 무휼은 이제 이방원의 사람이라 선언하였음. 네 아비를 죽게 만든 자인데도 충성을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어찌 그런 결심을 하였느냐? 북방에서 이름을 날려 입신양명하게 되면 어머니를 편히 모실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두해 만에 집으로 돌아갔더니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계시더이다.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은 있으나 마나하니, 이 무휼은 조 가였던 성을 버려 이제 그분들의 자식이 되지 못함을 아뢰옵니다. 이제부터는 조무휼이 아닌 그저 무휼이라 불러주십시오. 이방원은 무휼의 호기로움에 반해 크게 웃었음. 앞으로 너를 크게 쓸 것이라 약조하고 무휼을 받아들였음. 그 후로 몇 번의 공을 세워 무휼의 집안은 다시 일어났고 떨어졌던 신분은 복권되었음. 이방원의 명으로 충녕대군의 호위를 맡다가 그가 세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곁에서 죽 지켜서고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