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님* 2013. 7. 21. 01:41

무휼은 배에서 퍼지는 아련한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을만큼 두려움에 떨며 문가를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렸고 호흡을 잘게 하였다. 수없이 살려 달라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단단한 손이 어깨를 잡았다. 놀라 눈을 홉뜨자 검은 복색의 자객이 눈앞에 있다. 살려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자객이 복면을 살짝 벗었고, 그 곳엔 땀에 절은 채윤이 있었다. 나으리! 뫼시러 왔습니다. 이것이 현실같지 않아 잠시간 아무 말도 못한 채 눈만을 깜빡였다.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영문을 몰라 하는 무휼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청하였다. 다른 눈 들이 있으니 소인이 나으리를 겁박하는 걸로 보이기 위해 잠시 칼을 들이밀겠다 하였다. 채윤에게 이끌려 몸을 일으키자 몸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으니, 그제야 배가 아픔을 알았다. 표정이 좋지 않은 무휼에 어찌 그러시냐 묻자 조금 머뭇거리더니 아니라며 응수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그 소란에 의금부에선 죄인들의 탈출을 염두하여 병력을 더 배치하였으나 뒤로 돌아서 빈틈을 파고들었던 채윤은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오는 것이 문제였는데, 어찌할까 고민 하던 차에 주상의 연통이 의금부에 도착하였다 한다. 감히 이 나라 지존의 침전에 침범한 자가 있어 추포를 해야 하는데, 현재 모든 궁 안의 사람들이 검은 복색의 자객들을 쫒고 있어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으나 때가 때인지라 아무도 그것이 거짓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간수 하나를 빼고는 거의 전부가 이동을 하였고, 채윤은 방심하고 있던 간수를 손쉽게 제압하였다. 그리고 옷을 벗겨내어 무휼에게 대강 입혀주었고 서둘러 빠져나갔다. 
밖은 아비규환이었고, 무휼은 정신이 없었다.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식은땀이 흘렀으며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어찌하여 이리 아픈 것인가. 아직 산달은 두어달이 남아있다. 아직 나오면 아니된다며 배를 달래었다. 한참을 가던 채윤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멈춰 숨을 골랐다. 몸이 무거워서인지 평소보다 배는 거칠게 숨을 내뱉는 무휼이 안쓰러웠다. 나으리. 제가 이러한 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어명이옵고, 지금의 이 소란 또한 어명입니다. 소란을 틈 타 나으리를 구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무휼은 울컥 하였다. 주상께오서 저를 구하여 주신다 하셨던 것이 기억났다. 정녕 살려주시는 것입니까. 망극하옵니다. 이 길로 다시는 주상을 뵈올 수 없을까 더더욱 절절하게 망극하다 하였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는 것이냐? 이대로 너를 따라 궁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전하께오서 너와 나만이 알고 있는 그곳에서 기다리신다 하셨습니다. 내금위장께오선 어디로 가야 할지는 영감께서 잘 알고 계실 터이니 너는 따르기만 하라 하셨습니다. 무휼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면서 서둘러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가시는 것입니까? 무휼은 대답조차 아니한 채 비틀비틀 걸었고 채윤은 그런 무휼을 부축 하여 따라갔다. 얼마를 갔을까. 궐 안에서 이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 있을까 시피 한 공간이 있었다. 채윤은 처음 보는 공간에 놀라워하였고 무휼은 눈 앞에 굳게 닫힌 문을 당겨 열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그 곳은 정도껏 내려가자 평지가 나왔고 평지는 긴 통로가 되었다. 채윤은 눈이 휘둥그래졌으나 무휼은 익히 아는 곳인 듯 태연하였다. 궁에 이러한 곳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당연하다. 이곳은 궐 안에서도 단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곳이니, 바로 조선의 임금과 내금위장이다. 주상께오선 일전에 이것에 대하여 무휼을 근근히 놀리셨다. 너와 나만이 아는 공간이라니. 네가 여인이었거나 과인이 여인이었으면 아주 이상한 말이 될 뻔 하였구나. 벌써 언제인지도 모를 해묵은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려왔으나 배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 금세 잊혀졌다.



무휼이 빠져나간 후, 정득룡은 가리온이 들쳐메고 온 시신을 멍석째로 옥에 밀어 넣었다. 신체와 얼굴을 훼손시켰으나 눈썹 위의 상처같은 특징적인 흔적들을 무휼인 것처럼 꾸며놓았다. 배를 찢어 뱃가죽을 늘려놓았고, 배 안에는 죽은 암소의 자궁을 찢어 넣어놓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너는 어서 자리로 돌아가라.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할 것이다. 그 말에 가리온은 감사하다며 정득룡에게 절을 올렸고, 다시는 뵈지 못할 주상께 또한 절을 올렸다.


한편 침전에서는 주상께서 사라지셨다 하여 얼른 찾아뫼시라 야단이었다. 이 난리통에 어딜 가셨단 말인가. 내금위장은 또한 대체 어디로 가신 것인가. 상선과 상궁들이 수선부리며 돌아다닐때 주상께오선 용포도 걸치지 아니하신 채로 비밀통로 안쪽을 걷고 계시었다. 무휼이라면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알아들었을 것이니 이곳으로 나를 만나러 올 것이다. 마음처럼 빨리 걷지 못하는 다리를 질책하시며 걸음을 옮기셨는데, 멀지 않은 앞쪽에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힘들게 걷는 큰 사내와 그를 부축한 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보다 작은 사내, 무휼과 채윤이었다. 무휼은 배가 아래로 쏟아지는 것 같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애써 한발한발 걸었고, 채윤은 조금만 힘내시라 하고 있다. 주상께선 천천히 걸음을 멈추혔고, 이내 무휼아, 하고 큰 소리로 부르셨다. 
그 음성에 무휼은 순간 배의 통증을 잊었다. 흐릿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야장의 차림의 주상께서 서 계시는것이 보였다. 무휼아. 주상께서는 계속하여 무휼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셨고, 무휼은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은 점점 다가오는 성상을 좇았고, 손을 뻗어 성상을 잡고 싶었다.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주시듯 주상께선 땀에 절은 무휼을 품에 끌어안으셨다. 무휼은 파득 몸을 떨며 주상께 온 몸을 맡겼다. 틈 사이로 새어나갈까 두려우신듯하여 힘 있게 끌어안아 등을 도닥여 주시다 곧 얼굴을 두 옥수로 매만지셨다. 눈물로 인해 부어버린 눈가를 쓸어주시고 흐트러진 머리도 쓸어주셨다. 너무나 상해있는 모습을 보시자 절로 옥루가 흘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과인은 결코 네 이리 고생케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무휼아. 무휼아.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주어 정말 고맙다. 그 말에 무휼의 눈에서 또다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지더니 이내 오열을 하였다. 그만 아이처럼 엉엉 울어 곁에 서 있던 채윤마저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상의 옥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닐진대, 어째서인지 그 말 한마디에 그간의 고생이 모두 보답을 받은 것만 같아 줄줄 울었다. 소신이 얼마나 전하를 원망하였는지 아십니까! 널 고생시켜 미안하시다면서, 겸이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하셨으면서 어찌하여 그런 명을 내리신 것이옵니까! 무휼의 원성은 주상께서 미안타 하시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명을 내리셨는지 알고는 있으나 마음이 울컥하여 터져버린 것이다.


처음 듣는 원성이었다. 무휼의 애끓는 절규에 주상께선 다시금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하실 수 없었다. 그때에 이 깊은 공간 속 까지 밖의 어수선함이 전해졌고, 주상께선 부둥켜안은 팔을 풀어 무휼을 일으켜 세우셨다. 무휼은 잠시 잊고 있던 배의 통증을 다시 느끼고 휘청였고, 주상께선 놀라 괜찮은 것이냐 물으셨다. 무휼은 애써 웃어 보이며 괜찮다 하였고, 주상께선 영 걱정스러운 기운이었으나 이내 마주 웃어주셨다. 그나저나 무휼아. 울다 웃으면 몸 어딘가가 변한다는 민가의 속설이 있더구나. 내 확인할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채윤은 웃어넘겼으나 무휼은 크게 당황하였고, 너는 여전히 농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하느냐며 핀잔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연과 시간은 여기까지였고, 이제는 보내주어야 하였다. 주상께선 채윤에게 어서 무휼을 데리고 왔던 곳의 반대편으로 가면 궁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다 하였다. 그 곳으로 가면 가리온과 소이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어서 가 다시는 궁에 돌아오지 말아라. 채윤은 저가 잘못 들은 줄 착각하여 여쭈었다. 소이라 함은 누굴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이 궁 안에 소이가 그 아이 하나 뿐이 더 있겠느냐? 너는 무휼을 데리고 나간 후, 소이와 함께 떠나 살거라. 과인의 오랜 사람인 무휼을 구해준 보답이다. 채윤은 크게 감읍하여 넙죽 절을 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하면 어서 떠나거라. 채윤은 벌떡 일어나 무휼에게 어서 떠나자 하였다. 무휼은 이 길 떠나면 다시는 주상을 뵈올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직 쉬이 그치지 못하는 눈물을 떨구며 너무나 서러운 얼굴로 용안을 바라보았다. 다시 웃어다오 무휼아. 네 마지막 얼굴을 우는 것이 아닌 웃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구나. 주상의 바람대로 무휼은 애써 웃어보였고, 채윤의 도움으로 아픈 배를 부여잡은 채 절을 올렸다. 만고의 성군이신 주상전하, 신 내금위장 무휼 이만 하직인사를 올리옵니다.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무휼은 용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채윤에게 이끌려갔다.


용안이 보이지 않을 무렵이 되자 무휼은 다시 주저앉았다. 주상을 뵈옵는 동안 고통을 참았던 것인지, 앓는 소리까지 내며 몸을 떤다. 채윤이 놀라 어찌 그러시냐 묻자 배가 너무 아프다 하였다. 업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조금만 참으시라 청하며 무휼을 끌고가듯 부축하였다. 비밀통로는 너무나도 긴 듯 하여 마치 끝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것도 길인가 하여 기어이 끝은 있었고, 통로의 끝에는 가리온과 작은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 소이가 보였다. 채윤은 무휼의 무게에 힘겨워 하면서도 이를 악물어 끝까지 이끌었고, 가리온이 다 쓰러져가는 무휼을 받아들었다. 무휼이 배가 아프다며 앓자 가리온은 이리저리 상태를 살폈고 곧 양수가 터졌다 말하였다. 너무나 고통이 커 무휼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아직은 나오면 안 된다며 아이를 도로 집어넣으려 몸에 힘을 주었다. 아니됩니다 나으리. 한번 터진 양수는 다시 채워지지 않으니, 이제 무사히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채윤과 가리온은 급히 소달구지를 구해 무휼을 실었고 몸이 식지 않도록 짚을 덮어주었다.




무휼이 궁을 떠나고 작전이 끝났음을 알리자 검은 복색을 한 자들은 서둘러 궁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제 자리로 복귀하였으며, 정득룡은 무휼이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통로로 들어가 주상을 알현하였다. 주상은 내금위장과 함께 다시 침소에 나타나셨으며 무슨일이기에 상궁과 상선은 이리 호들갑인가 하시며 호통을 치셨다. 뒤늦게 의금부의 군사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옥 안을 확인하니 무휼이 있던 곳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신 한 구가 뉘어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지난밤 자객들의 짓이라 판단하였다. 뱃속의 태아를 꺼내기 위함이었는지 배를 찢어 자궁을 들어내놓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하였다. 아침일찍 궁의 습격소식을 전해들은 사대부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런 침입을 허가 하고 전하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내금위장이 소란토록 돌아다녔다 하여 문책하여야 한다며 한목소리를 내었다. 내금위장은 내도록 과인과 함께 하였거늘 무슨 소리들을 하느냐며 반박하시었다. 또한 궁의 담을 넘어 감히 과인에게 서슬 퍼런 칼을 들이민 자들은 대체 누구인가. 어제의 그 괴인들은 무휼을 죽이고 태아까지 꺼내갔다. 비록 무휼은 죄인인 몸이며 오늘 아침이 되면 참할 것이었으나 이 행위는 내도록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누구의 소행인지 낱낱이 밝힐 것이다. 주상께선 또한 경비 강화를 위하여 궁 내의 군사들을 증강할 것이라 하였고 신료들은 서슬퍼런 주상의 분노에 떨었다. 전날 그 일에 가담하였던 자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그때에 깨달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무휼의 진통은 이틀이나 계속되었다. 약해진 몸으로 그 고통을 참을 길이 없어 실신하다 깨어나길 반복하였다. 그들은 한양에서 한참을 벗어나 인적조차 드문 벌판에 버려진 집을 발견하여 그곳에 무휼을 눕혔다. 서둘러 땔깜을 구해와 불을 지폈고 버려진지 오래되어 구멍난 솜이불을 털어 덮어주었다. 노산에 초산인지라 아이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가리온과 채윤은 무휼의 몸을 주물러주었고 소이는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이대로 또 하루가 지나가나 하였을때 무휼이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가리온이 급히 살펴보니 피가 줄줄 나오며 아이의 새카만 머리꼭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아기님의 머리가 보이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주시라 청하였고 무휼은 온 힘을 다 하여 아기를 밀어내었다.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점점 많아지니 내벽까지 잘못된 것인가 하여 심히 염려가 되었다. 머리가 빠져 나오고 어깨까지 나온 이후로는 수월하였다. 태반까지 빠져나온 후 검붉은 피가 울컥이며 쏟아져 나왔다. 무휼은 진이 다 하여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였고, 가리온은 재빨리 아기를 무휼에게 안겨주었다. 나으리. 드디어 나셨습니다. 아들이십니다. 부디 이 모습 보십시오. 채윤이 겨우 부축하여 몸을 반 일으킨 무휼은 아기가 제 팔에 안겨 가슴팍에 입을 대 젖을 빠는 모습을 보곤 환하게 웃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도 작은 모습이지만 살겠다고 열심히 젖을 빠는 모습이 기특하였다. 겸아. 네 어찌 이리 일찍 나왔느냐? 손을 들어 아이를 쓰다듬으려 하다 툭 하고 팔을 늘어뜨렸다. 눈을 뒤집은 채 몸이 축 쳐졌고, 다리 사이에서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배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