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年華) 6
보름, 진초시에 일이 진행될 것이오.
며칠 전 홍인방이 다녀갔다. 예상보다 빨라지는 날에 태미는 눈으로 연유를 물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소. 그 말이 전부였다. 살아달라거나 도망쳐 달라거나, 그런 진득함은 있지 않았다. 그가 떠난 빈 자리를 보며 말 없이 앉아있다 어렵게 입을 떼었다.
"고마워."
그 이상 신경써 주지 않아서. 실은 마음에 걸렸다. 그가 마치 저를 마음에 두는것 같았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남길 수 없었다. 그것이 마음이든 사람이든.
보름의 아침 해가 유독 밝다. 태미는 평소보다 짙은 화장과 피빛의 복색을 한 채 유의 방에 들었다. 며칠 전 부터 열을 내며 앓고 있다. 어찌 고뿔이 이리도 심한 것인가. 어서 나아야 할 텐데. 이듬 해까지 살아있으면 예쁜 규수와 혼례를 치뤄줄까 했으나 이성계 장군이 결국 거사를 치뤘다. 예상보다 빨라 짐짓 당황하였지만 조금 더 빨리 죽을수 있게 된 것을 위안 삼았다. 궁을 장악하면 이 곳을 치러 올 것이다. 고려의 권력자 이인겸과 수시중 길태미가 있는 이 도화전으로. 태미는 그간의 일 들을 곱씹으며 이마에 끈을 뒤집어 썼다. 나약해 빠진 정신머리로 무슨 무사를 하느냐며 호통을 치던 스승이 생각났다. 그 스승도 이리 말 했었지. 어서 강해져 그를 죽여야 할 것이 아니냐. 나 또한 무휼에게 그런 말을 했었는데. 그런데. 결국 힘에 굴복하고 말았네요 스승님. 그래서 죽어 마땅한 짓을 했어. 그들이 날 죽여줄거야.
"오늘.. 어디 가십니까?"
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열에 들떠 힘이 없으나 쳐다보는 눈 만큼은 또렸했다. 태미는 이 눈을 그렇게 사랑했다. 저를 닮은, 옛날의 그 사람을 닮은 눈.
"응. 이 어미 좋은 곳으로 간단다."
애써 웃으며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드님. 꼭 살아남아야 해요."
열에 들떠 못알아 들은 것인지 베시시 웃고만다. 비단에 흩어진 머리칼을 몇번 쓰다듬어 주고는 검을 들어 밖으로 나왔다. 도화전의 입구 앞. 무휼에게도 인사를 할까 하다 그냥 나가버리고 만다. 검도 다 전해주지 못했거늘, 앞으로 그 아이 인생에 저보다 더 좋은 스승이 나타나길 바랐다. 무휼은 제법 배가 부른 태가 나기 시작했다. 밥도 먹지 못하고 다 토해내며 방 구석에 박혀있다. 기다리거라. 오늘이 지나면 너는 이 곳을 나갈 수 있다.
어디가시냔 계집종의 말을 뒤로 한 채 도화전을 나섰다. 홍인방의 말과는 다르게 그 누구도 있지 않은 거리는 적막. 어찌하여 아무도 없는가. 수시중 길태미는 오라를 들라는 소리가 귀를 때려야 하거늘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다. 설마 속은 것인가. 불길한 감각에 도화전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찰나 귀 뒤에서 검 소리가 들렸다. 발검. 태미는 기습에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챙강 하고 장검이 부러지고 난 후 쌍검을 꺼내들었다. 첫 합부터 상당한 고수를 마주쳤다. 면복조차 하지 않고 온 이 놈은 그래, 이 일대 가장 유명한 까치독사. 일전 한번 검을 부딪쳤던 까치독사 놈은 그새 일취월장을 해 저를 뛰어넘고 말았다. 죽기 위해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나 막상 죽으려니 뒷목이 서늘했다.
칼이 부딪치고 불꽃이 튄다. 온 몸에 땀이 범벅이 되어 찬 바람이 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이 자는 왜 홀로 저를 상대하고 있는 것일까. 아차 하는 새에 그에게 이끌려 깊은 곳 까지 와 버렸다. 그 곳에는 도포를 입은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니, 태미의 두 눈은 경악으로 커졌고 크게 허리를 한번 베인 후 뒷목에 힘이 가해졌다. 사위가 까매졌다. 그 곳에 서 있던 인방은 쓰러진 태미를 둘러멘 채 그 곳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