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님* 2013. 8. 25. 23:53

거친 정사가 끝난 후, 세상모르고 잠든 소린을 뒤로 한 채 아예 집을 나왔어. 자주 가는 호텔 룸을 빌려 거기서 자기로 했지.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소린과 함께 있을수가 없었어.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는 하루종일 어떻게 일을 했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넋을 놓고 있었어.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마음은 더더욱 무거워졌음. 그래 이대로 며칠간 마음을 정리하자 싶어 또 호텔로 향했어. 소린은 소린 나름대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스란두일 때문에 안그래도 잿더미가 된 마음이 또다시 타들어가고 있었어. 핸드폰이 박살나는 바람에 집 고용인에게 번호를 물어봐 전화를 걸었어. 스란두일은 핸드폰을 꺼둔 상태였기 때문에 받지를 않아. 소린은 긴 수신음만 듣고 있었어. 이러다 전원이 꺼져있다며 뚝 끊어지는게 벌써 며칠째인지 몰라. 전화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이렇게 막상 기다리면 어쩌자는거지? 그가 돌아오면, 돌아와서 나에게 당장 꺼지라고 한다면, 내가 아닌 킬리를 내놓으라 한다면, 필리를 더이상 찾아줄수 없다 말하면.. 소린의 두려움도 모르고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스란두일은 좀 두려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어. 소린이 날 어떻게 볼까, 날 어떻게 대해줄까. 무작정 진심이 아니었다며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문을 열었는데, 전화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소린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아, 그냥 즉시 사과를 했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는 찰나 소린이 뛰어와 스란두일 앞에 무릎을 꿇었어. "자, 잘못 했습니다. 천한 오메가 주제에 주제를 모르고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저, 절 버리지 마세요 앞으로 잘할게요!" 놀란 스란두일이 대꾸가 없자 크게 뜬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져 창백한 뺨을 적셨어. 눈에 보일정도로 덜덜 떨며 스란두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어. 스란두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소린을 붙잡아 일으켰어. "무슨.. 왜.. 이러는거야?"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스란두일은 절망적이었어. 분노를 참지 못해 내뱉은 한 마디가 소린을 무겁게 짓밟고 말았어. 소린은 그게 진심이었다고 생각해버린거지. 이제와 다른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소린은 믿지 않을거야. 그날의 서슬퍼런 눈빛과 차가운 말이 너무나 날카로웠던 탓이었어. 미안하다, 진심이 아니었다 사과하려는 스란두일을 막무가내로 막으며 다 제 잘못이라고 엎어져 오열했음. "아냐. 아냐 소린. 내 말은 그게 아냐." "아녜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소린 내 말좀 들어봐요. 응? 들어보라니까!" 스란두일이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자 소린은 그대로 굳어버렸어. 너무나 겁을 먹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어. 기어이 딸국질을 시작하는 소린을 애처롭게 쳐다보다 떨고있는 몸을 확 끌어안았어. 지금은 무슨 말도 통하지 않을게 분명해서 그냥 이렇게 안아 줄 수밖에 없었어.


필리와 킬리가 살던 방엔 아예 레골라스가 눌러앉았어. 같이 필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같은 방에 같이 머무르면서 유대를 다진다는 거였지. 킬리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레골라스를 쳐다봤어. "넌 이게 장난인거 같냐?" "저도 장난 아니거든요? 진지해요." "아.. 됐다. 말을 말자." 킬리는 레골라스에 대해 학을 뗐음. 그저 멍청하고 돈만 많은 백수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제법 큰 벤처를 하나 운영중인 사장이었어. 그래서 올ㅋ 꽤 하는데, 하며 사람을 다시 봤는데 웬걸. 지금의 느낌은 마치 처음 느꼈던 그 멍청하고 돈만 많은 백수 그대로임. 회사에 나가는거 같지도 않고 하루종일 킬리 옆에 붙어서 필리를 찾는 일을 도와주고 있는 꼴 하고는. 킬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설설 저었지. 그나저나. 정말로 필리는 어딜 간걸까. 살아는 있는걸까. 사라진 형을 생각하자 다시 마음이 울적해졌지.


필리는 무사하게도 아직 보푸르와 함께 있었어. 대충 꿰메는것 같았어도 봄부르의 꽤 솜씨가 좋았던지 상처는 금방 아물었고 별 탈 없이 움직일 수 있었어. 보푸르는 그날 머리와 수염을 조금 깎았어. 아주 깎으면 옛날모습이 나와서 안된다며 멋지게 꼬아놓은 수염의 끝을 자르며 아깝다고 눈물지었음. 조금은 길다 느낄정도의 도망생활속에 수염은 다시 멋드러지게 자라고 있었어. 지쳐가는 생활중에 필리는 자꾸만 꼬부라지는 보푸르의 수염을 보며 웃었고 보푸르는 그런 필리에게 재롱을(?) 부렸지. 부슬부슬 비가 오는 바람에 버려진 폐가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었어.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자 필리는 살살 졸음이 쏟아져 벽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어. 눈 앞에서는 보푸르가 나무토막을 가지고 장난감을 깎고 있었지. 필리는 눈꺼풀을 슬쩍 감으면서 잠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어. "아저씨. 우린 왜 도망가는거예요? 아저씨는 왜 날 도와주는거예요?" "그냥." "대답해줘요." "네가 귀여워서." "아저씨이.." "..하하." 보푸르는 머언 생각을 하는지 눈이 깊이 잠겼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금 투덜거리던 필리는 이내 잠이 들었음.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을 쫒던 요원들에게 실탄을 사용해도 좋다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졌어.